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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미궁 8


29화. 미궁 8 꿈틀! 꿈틀! ​ “응?” “왜 그래 카엘군?” ​ 무언가 들렸던 것 같은데……. ​ “아니야…….” ​ 아무래도 아까 전 촉수 벌레에게 당하는 엘레노아의 모습이 너무 뇌리에 박혀서 그런 것 같았다. 여전히 벌레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기분이다. ​ “응….” ​ 아까의 위기에서 벗어난 엘레노아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준 겉옷으로 몸을 애써 가리고 있지만, 그녀의 큰 가슴이 온전히 가려지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옷깃을 꼭 움켜쥔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겉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 곳곳에는 붉게 물든 이빨 자국들이 또렷히 새겨져 있었다. 큰 가슴에 비해 작은 크기였던 유두도 이빨 자국이 새겨진 채 부풀어 올라 평소보다 배는 커보였다. ​ 언제나 밝게 웃으며 주변을 안심시키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내 겉옷을 꼭 붙잡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고, 나는 검을 쥔 채 주위를 경계했다. ​ 미궁은 여전히 불길할 정도로 조용했다. 간혹 멀리서 마물의 울음소리나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적어도 이 근처만큼은 잠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엘레노아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마력은?” “조금은 회복됐어.” 엘레노아는 피곤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 “전투를 연달아 할 순 없지만…….” ​ 엘레노아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 “적어도 내가 카엘군을 도와줄 순 있을 것 같아.” ​ 엘레노아의 주변으로 갈색 빛의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손끝에서 마력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 덩어리는 그녀의 의지대로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 움직임은 다소 둔했지만 형태는 안정적이었다. 이정도라면 최소한 능력 자체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다행이네.” “응….” ​ 루크레치아는 지하수에 휩쓸렸으니 아마 미궁의 최하층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지금 상태로 내려가는 건 조금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 정비하고 돌아오는 사이, 루크레치아가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지도 몰랐다. ​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고쳐 쥐었다. ​ “가자.” ​ 엘레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향해야할 곳은 미궁 최하층. 그리고 그곳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은 하나였다. ​ 촉수 마물이 미궁을 뚫고 지나가며 만들어낸 일직선의 통로. 나는 무너진 벽 너머로 이어지는 검붉은 흔적을 바라봤다. 억지로 벽과 바닥을 찢고 지나간 탓에 통로라기보다는 짐승이 파헤쳐 놓은 상처에 가까웠다. 곳곳에 부서진 석재와 검붉은 체액이 들러붙어 있었고, 아직 죽지 못한 촉수의 잔해들이 간간이 꿈틀거렸다. 꺼림칙하지만 미궁의 복잡한 통로를 따라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 ​ “이쪽으로 내려가자.” “……저길?” ​ 엘레노아가 잠시 굳은 얼굴로 통로를 바라봤다. 나 역시 그 기분을 이해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붙잡고 있던 마물의 흔적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길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 “루크레치아가 지하수에 휩쓸렸다면 최대한 아래로 가야 해.” “응.” ​ 엘레노아는 짧게 대답했다. ​ “가자. 카엘군.” ​ 우리는 촉수 마물이 뚫어놓은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벽면 곳곳에는 체액과 살점이 말라붙어 있었다. ​ 꿈틀! 꿈틀! ​ 엘레노아가 지나갈때마다 촉수 조각들이 반응하듯 꿈틀거렸지만, 엘레노아가 마력으로 밀어내자 힘없이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다 죽어가는 마물의 접근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미끄러운 잔해와 남은 촉수들을 피해 조금씩 아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 얼마나 내려갔을까. 통로의 깊은 곳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즉시 검을 고쳐 쥐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들이 기어 나왔다. 촉수 마물이 뚫어놓은 통로를 따라 다른 마물들까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 “하필이면…….” ​ 엘레노아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앞으로 나섰다. 선두의 마물이 달려들었다. ​ 콰직! ​ 검이 놈의 앞다리를 베어냈다. 그러나 뒤이어 두 마리가 더 튀어나왔다. ​ “카엘군!” ​ 갈색 마력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엘레노아가 만들어낸 마력의 창이 마물의 몸통을 꿰뚫었다. 위력은 약했지만 충분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물의 몸이 반쯤 갈라지며 검은 피를 뿌렸다. ​ 엘레노아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마력을 움직였다. 때로는 방패로 내 옆을 막아주고, 때로는 창으로 마물의 움직임을 끊었다. 나는 그 작은 빈틈을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 마침내 마지막 마물이 쓰러졌을 때, 나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엘레노아 역시 벽에 손을 짚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 “괜찮아?” “응…… 아직은.” ​ 그녀는 힘겹게 웃었다. ​ “루크레치아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촉수 마물이 남긴 검붉은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의 냄새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거센 물소리…. ​ “들려?” ​ “응.” ​ 엘레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수였다. 통로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촉수 마물이 지나간 흔적도 더욱 선명해졌다. 벽과 바닥에는 거대한 몸체가 쓸고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고, 곳곳에는 부서진 석재와 말라붙은 체액이 널려 있었다. ​ 콸콸! ​ 드디어 우리는 루크레치아가 휩쓸려 내려간 지하수가 흐르는 구간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하수는 여전히 거센 굉음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 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남겨 놓았던 푸른 얼음 조각들이 이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는지, 아니면 이미 녹아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차가운 물소리와 텅 빈 흔적뿐이었다. 나는 잠시 물길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 "……?" ​ 지하수 옆 공동 한쪽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죽은 마물의 시체라고 생각했다. 몸 곳곳이 찢겨 있었고, 일부는 짓뭉개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 "카엘군." ​ 엘레노아 역시 그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 "혹시…." "응." ​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어쩌면 저 마물을 쓰러트린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어 나는 곧장 놈에게 다가갔다. ​ 꿈틀. ​ 죽은 줄 알았던 놈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즉시 검을 고쳐 쥐었다. 엘레노아 역시 남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살아 있는 것은 맞는데, 어딘가 어색했다. ​ 끼이…. ​ 놈의 입으로 보이는 부분이 벌어지며 울음소리를 냈다. 짐승의 포효와 벌레의 울음, 그리고 사람의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뒤섞여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 "뭐야…." ​ 엘레노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놈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부림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놈은 마치 걷는 법 자체를 모르는 생물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뒤틀린 팔다리는 제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몸통 역시 제대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 질척 질척 ​ 거대한 몸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그 모습은 마물이라기보다는 갓 태어난 짐승에 가까웠다. 이상하게 불길했다. 저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 “카엘군?” ​ 엘레노아가 나를 불렀지만, 이미 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 푸욱! ​ 검끝이 놈의 머리로 보이는 부위를 꿰뚫었다. 놈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기괴하게 뒤섞인 목구멍에서 엉성한 울음소리만 새어 나왔을 뿐이었다. ​ 끼이이…… ​ 그 소리는 곧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잦아들었다. 축 늘어진 몸이 몇 번 더 꿈틀거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한동안 검을 뽑지 않은 채 놈을 내려다봤다. 혹시라도 다시 움직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그제야 검을 뽑아내고 천천히 놈의 상태를 살폈다. ​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기괴했다. 몸 곳곳에는 미노타우르스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꺼운 근육과 부러진 뿔처럼 솟은 뼈 조각들…. ​ 하지만 그것들은 완성된 신체가 아니라, 억지로 자라나다 만 흔적에 가까웠다. 마치 미노타우르스가 되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 “……이상해.” ​ 엘레노아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힌 채 놈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 “틸렌 근처에서 지휘형 개체들이 갑자기 늘어났다고 했지?” “응.” “그리고 그 개체들이 흘러나온 장소가 이 미궁이라고 했고, 아마도 그건 이 미궁에 마물들의 번식지가 있을거란 추측이었는데…….” ​ 엘레노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녹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본 건 평범한 마물이 아니야.” “만들어지다 만 것 같았지.” “맞아.” ​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마물이 자연스럽게 태어난 게 아니라, 이 미궁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면…….” ​ 나는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그 말의 끝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계속 안쪽으로 향했다. 통로 곳곳에서 기형적인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생명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다행히 강하지는 않았다. ​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통로 한쪽 벽면에 익숙한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다. ​ “……!” ​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벽면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다. 크게 부서져 있었지만 분명 루크레치아의 흔적이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얼음. 나는 손을 뻗어 차가운 표면을 만졌다. 아직 완전히 녹지 않은 걸 보면 생각보다 오래된 흔적도 아니었다. ​ “카엘군.” ​ 엘레노아 역시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얼음을 바라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 “찾았네.” “응.” “적어도 방향은 맞았어.” ​ 나도 모르게 긴장이 조금 풀렸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흔적을 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분명 이곳을 지나갔다. ​ “루크레치아는 역시 쉽게 당하지않네.” ​ 엘레노아가 작게 웃었다. ​ “당연하잖아.” “응. 카엘군. 당연하지.” ​ 잠시였지만 둘 다 조금은 안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 꿈틀. ​ “……?” 나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무언가 들린 것 같았다. ​ 꿈틀. ​ 분명했다. 어디선가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나는 즉시 검을 고쳐 쥐고 주위를 둘러봤다. 엘레노아는 갑작스러운 나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 주위를 둘러 보지만 통로는 텅 비어 있었다. 마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 꿈틀 꿈틀 ​ 마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 “엘레노아.” “응?” ​ 나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들린 소리가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 꿈틀 꿈틀 “왜 그래?” ​ 엘레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혹시 엘레노아도 방금…….” ​ 콰아앙! ​ 그 순간 통로 깊은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돌벽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 ​ 천장에서 먼지와 자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와 엘레노아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 “방금 그건…….” “전투 소리야.” ​ 나는 곧장 검을 고쳐 쥐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 콰직! 쿠르르릉! ​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거대한 존재가 벽을 들이받는 듯한 충격음. 그리고……. ​ “쿠어어어어어!” ​ 멀리서 들려오는 마물의 포효. 엘레노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 “미노타우르스?” “아마도.” ​ 나는 곧바로 통로 안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위치. 그리고 조금 전 발견한 얼음의 흔적.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 “카엘군!” ​ 엘레노아도 황급히 뒤를 따라왔다. 폭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엘레노아와 함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전력질주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전투의 흔적도 선명해졌다. 벽면 곳곳이 얼어붙어 있었다. ​ “루크레치아……!” ​ 엘레노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숨을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가 끝나고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공동 전체가 마치 전쟁터 같았다. 기괴한 마물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공동 한가운데에는 다른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물이 서 있었다. ​ 반쯤은 미노타우르스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 곳곳에서 검붉은 촉수가 증식하고 있었고, 등 뒤에는 온갖 팔다리들이 기괴하게 매달려 있었다. 마치 미노타우르스를 흉내 내다가 실패한 괴물. 놈은 미친 듯이 포효하며 앞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 쿠어어어어어! ​ 그리고 그 맞은편. 푸른빛이 번쩍였다. ​ 콰직! ​ 거대한 얼음 창이 괴물의 어깨를 꿰뚫었다. 괴물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금발의 푸른 눈.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검을 들고 있는 한 사람. 루크레치아였다. ​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몸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났다. 한동안 숨을 가다듬던 그녀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 “루크레치아!” ​ 내 외침이 공동 안에 울려 퍼졌다. 루크레치아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쪽을 돌아봤다. ​ “카엘……?” ​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괴물만 노려보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감이 스쳤다. 그녀의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 쿠어어어어어! ​ 괴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대한 팔이 공기를 찢으며 루크레치아를 향해 휘둘러졌다. ​ “위험해!” ​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루크레치아 역시 뒤늦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 거리에서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콰아아앙! ​ 거대한 충격음이 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의 몸은 멀쩡했다. 괴물의 팔과 그녀 사이에 갈색 빛의 거대한 벽이 솟아올라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 쩌저저적! ​ 마력의 벽에 균열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끝내 무너지지는 않았다. ​ “하아…… 하아…….” ​ 엘레노아가 이를 악문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정말…… 잠깐도 눈을 못 떼겠네.” ​ 루크레치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엘레노아……?” “오랜만이네요. 루크레치아.” ​ 엘레노아가 힘겹게 웃었다. ​ “구하러 왔어요.” ​ 루크레치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다시 셋이 모였다. ​ 물론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우리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고 모두 지쳐 있었다. ​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검을 고쳐 쥐고 냉기를 풀풀 흘리기 시작했다. 엘레노아는 갈색 마력을 다시 끌어올렸고 나 역시 검끝을 괴물에게 겨눴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수없이 반복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 “하아!” ​ 나는 기합과 함께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 ​ * * * ​ ​ ​ ​ ​ 쿵! ​ 괴물의 목이 비틀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검에 묻은 검붉은 체액을 털어냈다. 엘레노아 역시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고, 루크레치아는 한동안 쓰러진 괴물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 “후우…….” ​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곧장 루크레치아에게 다가갔다. ​ “루크레치아 괜찮아?” “카엘은 어떤가요?” ​ 루크레치아는 지친 얼굴로 웃으며 내 얼굴을 한 번 훑어봤다. 그리고 곧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엘레노아. ​ 그녀는 내가 준 겉옷을 여전히 꼭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여전히 큰 가슴엔 이빨 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답지 않게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 “엘레노아…….” ​ 짧게 이름을 부른 뒤 루크레치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고생했어.” “루크레치아.” ​ 엘레노아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루크레치아의 손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뜩이나 가슴이 큰 두 사람이 서로 껴안으면서 가슴이 잔뜩 뭉개진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민망해졌다. ​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엘레노아가 슬쩍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 “왜 그래? 카엘군~ 부끄러워?” “아, 아니야.” “맞네.” “아니라니까….” “맞네!” ​ 엘레노아는 피곤한 얼굴로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루크레치아도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 “둘 다 여전하네요.” ​ 잠시 공동 안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오래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어?” ​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녀는 공동 반대편을 바라봤다. ​ “카엘. 그때 지하수에 휩쓸린 다음에 간신히 유속이 약해진 곳에서 빠져나왔어요.” ​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바라봤다. ​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기형 마물들?” ​ 엘레노아의 말에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검끝으로 가까운 곳에 쓰러진 시체 하나를 가리켰다. ​ “처음에는 한두 마리뿐이었는데 점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대다수는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라 문제는 없었어요.” ​ 나도 다시 한번 시체들을 둘러봤다. 가까이서 볼수록 기괴했다. ​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쓰러트리면서 이곳까지 왔는데, 마침 저 문을 발견했어요.” ​ 그녀는 공동 반대편에 자리한 거대한 석문을 가리켰다. 그 문은 지금까지 미궁에서 봐왔던 구조물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아주 오래된 유적을 잘라내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모습. 높이만 해도 십여 미터는 되어 보였고, 양쪽 문기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와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 특히 중앙에는 원형 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겹겹이 얽힌 고리와 기하학적인 선들. 마치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마저 정상적이지 않았다. 검붉은 조직들이 문 아래에서부터 기어오르듯 퍼져 있었고, 오래된 문양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 루크레치아는 그 불길한 문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아무래도 일련의 사태는 저 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카엘.”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아 역시 긴장한 얼굴로 석문을 바라봤다. ​ “솔직히 별로 들어가고 싶진 않네.” ​ 하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린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문 앞에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 우웅 ​ 문 전체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조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문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새어나왔다. ​ “조심해!” ​ 엘레노아가 즉시 마력의 벽을 펼쳤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벽에 부딪히지 않았다. 마치 우리를 확인하듯 천천히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 끼이이익 ​ 굉음과 함께 거대한 석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먼지와 돌가루가 쏟아졌다.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신전 같은 공간이었다. ​ 높은 천장.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기둥들.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부서진 부조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공간의 중심에 거대한 제단 하나가 홀로 서 있었다. 제단 표면에는 날개를 펼친 존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는 보랏빛 수정 하나가 떠오른 채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두근! 두근! ​ 보석 내부에서 보랏빛 빛줄기가 맥박치듯 번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 “저건…….” ​ 루크레치아가 숨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 한 걸음 또 한 걸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제단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 “카엘?” ​ 뒤에서 엘레노아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보석이 더욱 강하게 빛났다. ​ 콰아아아아! ​ 보석 안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 “카엘!” ​ 루크레치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기운은 그대로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 ​ “카엘군!” ​ 엘레노아가 다급하게 달려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루크레치아 역시 내 팔을 잡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 “괜찮아요?” “모르겠어…….” ​ 그 순간. 내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 일부가 두 사람의 손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 “읏!” “......!” ​ 둘 다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검은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쩌적. ​ 작은 균열음이 울렸다. 우리는 동시에 제단을 바라봤다. 보랏빛 보석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수정은 순식간에 색을 잃더니. ​ 툭. ​ 힘없이 제단 위로 떨어졌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유지되던 힘이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신전 전체가 조용해졌다. 엘레노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거 아무래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카엘. 괜찮아요?” ​ 루크레치아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보석을 바라봤다. 분명 무언가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 “일단 가져가자.” “괜찮겠어?” “모르겠어.” ​ 나는 보석을 품 안에 넣었다. ​ “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텅 빈 제단을 바라본 뒤 천천히 신전을 빠져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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