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다시 아르세인
30화. 다시 아르세인
틸렌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엘레노아는 촉수 마물에게 당했던 상처와 마력 고갈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루크레치아 역시 지하수에 휩쓸린 뒤 기형 마물들과 연달아 싸운 탓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자 셋 모두 다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틸렌 지부를 찾았다
“미궁 의뢰 완료 보고입니다.”
틸렌 지부 직원은 의뢰서를 받아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미궁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서면으로 작성해서 넘겨주었다.
한동안 보고서를 보던 직원은 급히 지부장을 불렀다.
잠시 뒤 작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틸렌 지부장에게 다시 한번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품 안에 있던 보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문 안쪽 제단에서 발견했습니다.”
지부장은 조심스럽게 보석을 집어 들었다.
검은 색으로 빛나던 보석은 지금은 그저 투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게 마물들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입니까?”
“확신은 없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궁 안에서 본 것들을 생각하면 관련이 없는 물건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으음…….”
지부장은 빛바랜 보석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꽉 잡은 두 손이 공중에서 몇번 흔들렸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미궁에 대한 보고서는 아무래도 본부로 올라갈 것 같군요. 지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처리하든 이제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하지만 지부장은 아직 우리에게 볼 일이 남은 듯,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여러분들의 공로 또한 전달될 겁니다. 어쩌면 마물들의 근원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공은 반드시 서훈될 것입니다.”
“서훈…….”
두 사람의 눈동자가 달라진다.
몰락, 그것도 제국의 반기를 든 가문에게 서훈이 내려진다는 건 아주 큰 전환점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서훈을 받게 된다면 평민인 내 인생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물론 단번에 귀족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제국에서 공을 인정받은 사람으로 취급받게 된다.
잘만 하면 영지를 하사받을 수도 있다.
문득 이상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즈넉한 초원.
멀리까지 펼쳐진 목장.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커다란 집.
그곳에서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자신의 손으로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루크레치아는 로엔하임을 다시 일으키려 하고 있고, 엘레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멀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럼 이만.”
지부장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느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서고 있었다.
나 역시 잡생각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네.”
우리는 그대로 지부를 나왔다.
우리는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안에서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루크레치아였다.
“카엘.”
“응?”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 검은 기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건가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엘레노아 역시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궁금했어.”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보석 근처에서 뭔가 있었잖아.”
“…….”
“카엘군이 갑자기 멈췄고, 그 직후 우리 몸으로도 이상한 기운이 들어왔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르세인으로 갈 생각이야.”
“아르세인?”
“거기에 이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루크레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지?”
“루멘시아. 마법사야”
“…….”
두 사람 모두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확한 건 아직 나도 몰라.”
“…….”
“다만 저 검은 기운이나 보석, 그리고 미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루크레치아는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카엘.”
“응.”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작게 웃었다.
“지금은 확신이 없어.”
“…….”
“괜히 추측만으로 너희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대신 약속할게.”
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루멘시아를 만나고 나면 내가 아는 건 전부 이야기해줄게.”
엘레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응.”
“숨기는 거 싫어하는데.”
“알아.”
그녀는 잠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결국 피식 웃었다.
루크레치아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라면 기다리겠어.”
두 사람의 표정에는 아주 옅은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만큼 나를 믿어주고 있는 것이겠지.
다음날 우리는 바로 틸렌을 떠나는 마차를 타고 아르세인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도시였다.
도착한 날은 일단 하루 푹 쉬기로 했다.
이전에 가보지 못한 음식점에 가서 엘레노아가 원하는대로 마음껏 먹기도 하고 미궁에서 잃어버린 장비와 도구를 다시 준비하기 위해 루크레치아와 함께 대장간을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용했던 숙소에 다시 짐을 풀고 쉬기로 했다.
엘레노아의 가슴에 있는 이빨 자국들이 다 낫기 전까지는 우리는 별도로 관계를 가지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난 자국들을 볼때마다 굉장히 우울해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 1인실을 빌렸다.
엘레노아와 못하니 당연히 루크레치아도 할 수 없었으니까.
엘레노아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절대 자기빼고 하면 안된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녀의 뜻을 따라주기로 했다.
“으으으….”
기지개를 피며 침대 위로 누웠다.
푹신함에 오늘 하루 돌아다닌 피로가 살살 풀리는 기분이었다.
살며시 눈이 감겨온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엘레노아?”
복도에는 엘레노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카엘군. 안 자고 있었네?”
“무슨 일이야?”
엘레노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
“조금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어.”
그녀답지 않게 조용한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녀를 바라봤다.
엘레노아는 복도 창문 너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카엘군. 나한테 속이는 거 없어?”
“응?”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나는 다 괜찮아. 결국 카엘군이 날 구해준거잖아…?”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엘레노아?”
“나……. 사실 알고 있었어.”
“그게 무슨…….”
엘레노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 티몽 백작 의뢰를 받았을 때도 그랬고…… 이번 미궁에서도 그랬어.”
“…….”
“내가 당하고 있을 때.”
그녀는 애써 웃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카엘군이 근처에 있었다는 거.”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엘레노아…….”
그녀는 작게 웃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원망도 했어.”
“……!”
“왜 바로 구해주지 않는 걸까 생각했으니까.”
엘레노아는 고개를 숙였다.
“무서웠거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근데.”
엘레노아가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결국 카엘군은 왔잖아.”
“…….”
“언제나 마지막에는 나를 구해줬어.”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았다.
“그래서 원망할 수가 없었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차마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연의 사도의 탓이든 누구의 탓이든, 연인이 다른 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걸 엿보며 흥분하는 도착증을 가졌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 도착증 때문에 눈앞에서 낯선 남자들한테 강간 당할 뻔하고, 촉수 벌레의 모판이 될 뻔한 상황을 보며 흥분하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어떻게 얘기한단 말인가….
물론 나는 그녀를 구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늦게’ 구했다.
“미안해.”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건 그 한마디뿐이었다.
엘레노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 받으러 온 거 아니야.”
“…….”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카엘군이 나를 버린 적은 없다는 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당연하잖아.”
내 대답에 엘레노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절대로 너희를 버리지 않아.”
“…….”
“앞으로도 그럴 거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엘레노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를…, 아니 그럼 너무 비겁하니까……, 우리를 여전히 누구보다 사랑하는거지?”
“응. 내 모든 걸 걸고서 단언할 수 있어.”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면 됐어.”
그녀는 내 대답을 듣고 방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보내면 안될 것 같았다.
진실을, 그녀들에게 진실을 얘기해야했다.
“내일 같이 가자.”
“응?”
“원래는 적당히 둘러댈 생각이었는데……. 그건 너희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 없는 것 같아.”
“카엘군…?”
“내일 같이 루멘시아에게 가서 같이 듣자. 너희들한테 꼭 알려줘야할 게 있으니까. 내가 당장은 자세하게 얘기해주진 못하겠어. 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돼서…. 대신 내일 같이 가서 얘기를 들으면 모두 알게 될거야.”
“……응!”
그녀는 내 말에 금새 기운을 차린 듯, 힘차게 대답하곤 내 볼에 뽀뽀했다.
쪽!
“헤헤. 카엘군. 그럼 내일 봐”
“어…. 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애교에 나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나간 지 한참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어제 엘레노아에게 얘기한 걸 그대로 루크레치아에게도 얘기했다.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카엘. 그리고 미안해요.”
“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
“카엘이 이렇게 힘겹게 얘기한다는 건, 그간 많은 고민을 했다는거겠죠? 우리는 그런 걸 아예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연인인데 부담을 덜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루크레치아….”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어제의 엘레노아와 오늘의 루크레치아, 서로 다른 느낌의 감동이 내 가슴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어떤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아직 예상은 안되지만…. 항상 믿고 있어요. 카엘.”
“……고마워.”
“자, 잠깐! 둘만 너무 그런 애절한 분위기는 안된다고!”
우리 둘이 서로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나타난 엘레노아가 훼방을 놓으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두 사람과 함께 루멘시아의 집에 방문했다.
그녀의 집은 그때처럼 여전히 쓰레기장이었다.
“이,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거야?”
엘레노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 안을 바라봤다.
창문은 반쯤 깨져 있었고, 벽에는 금이 가 있었으며, 쓰레기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루크레치아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사람 집보다는 짐승 우리에 가깝군.”
“남의 집 앞에서 참 예의 바른 평가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2층으로 가는 층계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루멘시아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손에는 먹다 만 과일 하나를 들고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인지 미소인지 모를 표정이 걸려 있었다.
“기사님들은 원래 남의 집에 찾아오면 외관 품평부터 하나?”
“루멘시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루멘시아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이번엔 혼자가 아니고?”
그 말에 엘레노아와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전에 말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야?”
엘레노아는 루멘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녹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녹색 눈동자.
나른하게 풀린 표정과 달리 묘하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거기다 허름한 집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는 미모까지.
엘레노아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사람이랑 단둘이 만났다고……?”
“엘레노아?”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었다.
루멘시아는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흐응.”
“왜 웃는 거야?”
“아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관계 같아서.”
그 말에 이번에는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따스하게 나를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아주 살짝 차가워져 있었다.
정말 아주 살짝.
“카엘.”
“응?”
“단둘이 만났다고요?”
“그건…….”
딱히 이상한 일은 없었다.
정말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설명하려고 할수록 더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멘시아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키득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취향이 독특하긴 해도 남의 연인 뺏는 취미는 없어.”
“그 말은 더 이상하게 들리는데.”
엘레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쪽이 누군지 아직 제대로 소개도 안 받았거든?”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루멘시아는 가볍게 계단 난간을 후하고 불었다.
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이 쓰레기장 같은 집의 주인이고, 너희가 찾아온 사람이지.”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 쓰레기장에서 계속 얘기할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러더니 나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너.”
“나?”
“얼굴이 더 안 좋아졌네.”
방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아주 잠깐 낮아졌다.
“이번엔 또 뭘 만나고 온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