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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고백


31화. 고백 지하의 공방, 그리고 1층의 쓰레기장과 달리 2층은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응접실 같은 곳으로 안내해줬다. 휑한 공간에 탁자와 의자 몇개만 있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 “미안하지만 지금 좀 공방이 정리한다고 바뻐서 제대로 된 대접을 할 수가 없어. 양해 바랄게.” “괜찮습니다.” ​ 나는 손사레를 치며 의자에 앉았다. 내 양옆으로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그리고 맞은편에 루멘시아가 앉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앉아서 언제 얘기를 꺼내야할지 가늠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멘시아가 다리를 천천히 꼬기 시작했다. ​ 그녀의 짧은 치마는 당연하게도 순간적으로 벌어지면서 안에 흰색 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인 불가항력이었는데, 그녀의 속옷을 봐서 좋거나 혹은 당혹스럽다는 감정보다 양 옆에서 느껴지는 묘한 살기가 내 가슴을 조여왔다. ​ “흐흥~” ​ 루멘시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고 있는 검은색 표지의 책을 팔랑거리며 넘겼다. ​ “일단은……. 먼저 얘기를 들어볼까?” ​ 한동안 책만 쳐다보던 그녀는 곧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더 진해지는 살기를 느끼며 나는 재빨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나는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우리가 보고 겪은 일들을 순서대로 설명했다. 루멘시아는 중간중간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거나,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엘레노아와 루크레치아도 가끔 빠진 부분을 보충해주었다. 미궁 최하층에서 발견한 기괴한 마물들과 고대의 석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단 위에 떠 있던 보석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내 몸 안으로 들어온 일까지……. ​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책장을 넘기던 루멘시아의 손도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 있었다. 그녀는 책을 덮은 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은 사라져 있었다. ​ “흐음…….” ​ 루멘시아가 천천히 턱을 괴었다. ​ “생각보다 귀찮은 걸 주워왔네. 그보다 다른 두 사람한테는 얘기한거야?” “아직…….” “그럼 그 부분부터 설명해야겠네? 미안하지만 이제 장황하게 설명해야하는 내 입장에선 입이 아파서 말이야. 직접 본인 입으로 설명해주겠어?” “알겠습니다.” ​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들에게 말했다. ​ 심연의 사도, 변질된 미래시, 내 눈앞에 나타났던 환상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까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얘기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말을 이어갈수록 엘레노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루크레치아 역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건 내가 숨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그리고…….” ​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 “그 영향 때문인지, 내 안에 이상한 욕망이 생겼어.” ​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 “그게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감정인지, 아니면 심연의 사도가 억지로 심어놓은 건지 모르겠어.” ​ 나는 이를 악물었다. ​ “하지만 분명히… 가지고 있어.” ​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과, 동시에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 자신. ​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하고….” ​ 나는 간신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 “너희가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에 흥분하는 욕망.” “흔히 네토라레라고 불러.” ​ 말하고 나서야 숨이 막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차마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 하지만 결국 보게 되었다. 엘레노아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침착하던 푸른 눈동자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얽혀 있었다. ​ 걱정과 슬픔.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내가 혼자 무너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한 아픔. 그 표정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했다. 실망했다고 말해줬으면 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역겹다고 밀어냈다면 오히려 덜 아팠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 “미안해.” ​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 “계속 숨겨서 미안해.” ​ 방 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가장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그녀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 같았다. ​ “그…, 그러면 카엘군을 고치거나 나아질 방법은……?” “그건…….” ​ 나는 루멘시아를 바라봤다. 처음 그녀를 만난 뒤 반년이 흘렀다. 무언가 진척이 있다면……. ​ “일단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충동을 어느정도 채워주면 돼. 완벽한 해결법은 아니지만 상당히 괜찮을거야.” “그 말은…….” ​ 그녀들이 나를 위해 관음할 짓을 하거나 혹은 다른 남자의 손에……. ​ “으으!” ​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추악한 망상이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 “굳이 그렇게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필요는 없어. 단순한 터치, 혹은 대화, 혹은 간단히 다른 누군가와 식사하는 것. 그정도도 영향이 있을거야.” “그렇게 간단히 가능한가요?” ​ 루크레치아는 루멘시아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 ​ “지금은.” ​ 그녀는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 “일단 심연의 사도는 계속해서 카엘, 너의 정신을 뒤틀 거야. 아무리 네가 그 충동을 만족시키더라도 그것도 점차 무뎌지겠지.” “…….” “처음에는 단순한 환상으로 끝날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선명해지고, 더 자극적인 걸 원하게 될 거야. 결국 네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까지 침식하려 들겠지.” ​ 그 말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전에 그녀가 가져갔던 것이 떠올랐다. ​ “그때 정…….” ​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바로 양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 정액. 그 단어를 이 자리에서 그대로 꺼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급히 말을 고쳤다. ​ “아니, 그때 채취해간 건 어떻게 됐습니까?” “…….” ​ 루멘시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 여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 삼켰는지 정확히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정도까지 나를 골려먹을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 “음. 나쁘지 않은 성과였어. 곧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채취하고 싶은데? 특히 이번에는 그 검은 기운을 흡수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거든.” “그……. 여기서요?” “아니. 걱정마. 네 연인들이 화낼 만한 짓은 하진 않으니까.” ​ 그녀의 말에 오히려 두 사람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를 돌아봤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말해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 “그리고 네가 가진 성도착증에 대해 조금은 더 친밀해질 필요가 있어. 만약 네가 너무나도 겁을 먹고 네 의지가 아닌 타의로 그걸 느끼다보면 언젠간 폭주해버릴거야. 그전에 네가 그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해.” “…….” ​ 일견 일리가 있어보이는 말이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친밀해지라는거죠?” “뭐 간단해.” ​ 그 뒤에 나온 루멘시아의 말에 우리 셋 모두 얼굴을 붉혔다. ​ “관음증이야 간단하지. 둘다 알몸으로 거리를 나돌게 하고 그걸 지켜보거나 아니면 술집에서 대놓고 만지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게 하거나……. 내가 아는 관음증을 가진 사람은 일부러 야한 옷을 입힌다던데?” “그, 그만….” “네토라레는 다른 남자가 연인들과 데이트하거나 아니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 물론 이건 네가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수위를 낮춰서 말해준거야. 관음증과 비슷한 정도로 해소시키려면 다른 남자 손에 만져지거나 혹은 연인이 다른 남자를 애무해주거나…. 뭐 이런것들?” “그만하라고요….” “왜, 듣기 싫어?” “…….” “하지만 카엘. 넌 이제부터 그걸 직접 마주해야 해.” ​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 “안 그러면 네 머리는 펑. 뭐, 실제로 터진다는 뜻은 아니지만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겠지.” “…….” “그리고 문제는 너 하나로 끝나지 않아.” ​ 나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루멘시아의 시선은 내 양옆에 앉은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를 향하고 있었다. ​ “미궁에서 보석의 검은 기운이 네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지?” “……예.” “그리고 그 직후, 네 몸을 통해 이 두 사람에게도 흘러들어갔다고 했고.” ​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나 역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 “그게…… 영향을 준다는 겁니까?” ​ 루크레치아가 조용히 물었다. 루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하지.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잖아.” “…….” ​ 엘레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 하나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 혼자 망가지는 거라면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 “만약 카엘이 그 충동을 계속 억누르면 어떻게 되죠?” ​ 루크레치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희미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루멘시아는 잠시 우리 셋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역류하겠지.” “역류…….” “카엘 안에서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가장 가까운 연결고리를 타고 너희에게 흘러갈 거야.” ​ 나는 숨을 삼켰다. 루멘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 “처음에는 별것 아닐 거야. 평소보다 조금 더 시선이 신경 쓰인다거나, 이상하게 부끄러운 상상을 한다거나, 카엘의 반응을 시험해보고 싶어진다거나.” ​ 그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 네가 두려워하는 것들. 네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런데 동시에 네 안의 저주가 갈구하는 것들.” ​ 루멘시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 “그걸 그녀들이 원하게 될 수도 있어.” “……말도 안 돼.” ​ 간신히 나온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 엘레노아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 “카엘군…….” ​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지 못했다. 내가 잡으면 정말로 무언가가 다시 흘러들어갈 것 같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엘레노아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 “그러니까.” ​ 루멘시아가 낮게 말했다. ​ “네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참는 게 아니야. 안전한 방식으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서, 이 저주가 요구하는 충동을 조금씩 빼내야 해.” “그걸…… 그녀들에게 시키라는 겁니까?” “강요하라는 말이 아니야.” ​ 루멘시아는 날카롭게 잘라 말했다. ​ “착각하지 마. 너는 심연의 사도보다 못한 쓰레기가 되는 거니까.” “…….” “하지만 숨기고 도망치는 것도 답이 아니야. 네 연인들이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면, 이건 셋이 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 ​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 “자. 이걸 받아.” ​ 그녀는 내게 자그마한 편지를 건네주었다. ​ “이걸 들고 아르세인 북쪽 지구에 있는 한 가게를 찾아가. 아마 비누가 새겨진 간판을 달고 있을거야.” “거…, 거기가 뭐하는 곳이죠?” “마사지 가게. 꽤나 인기있는 곳이야. 거기 편지에 네게 필요한 상황을 적어놨으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거야. 물론 거절해도 돼. 그리고 가더라도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멈춰도 돼. 옆에 있는 다른 두사람도 마찬가지고. 강요는 하지 않아. 그러나 익숙해지려면 자기들끼리 하다가 실수하는 것보단 여기가 편할거야.” “그런…….” ​ 환락가라니……. 그녀들과 함께 그런 곳으로 가라고? 나는 루멘시아가 내민 편지를 바라본 채 굳어버렸다. 고작 종이 한 장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는 순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발을 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 “카엘.” ​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크레치아였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받지 못하고 있던 편지를 대신 집어 들었다. ​ “루크레치아…….” “필요한 일이라면 해야해요.” ​ 그녀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편지를 쥔 손끝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루크레치아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편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마주해야 하는지. ​ “카엘 혼자 받을 물건은 아니잖아요.” ​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엘레노아도 잠시 편지를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 “맞아. 이미 우리도 같이 엮인 일이니까.” ​ 두 사람의 말은 담담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루멘시아는 그런 우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쪽에 도착하면 편지를 보여줘.” “그리고 채취는…….” ​ 나는 말끝을 흐렸다. 루멘시아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 “거기서 할 거야.” “…….” “여기서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는 낫거든. 환경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쪽이 이런 일에는 훨씬 익숙해.”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검은 표지의 책을 탁 덮었다. ​ “물론 싫으면 안 해도 돼. 방금도 말했지만 강요는 아니야. 대신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기만 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 ​ 루멘시아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 “특히 네 경우에는.”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멘시아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충분히 들었다. 더 듣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질 리도 없었다. ​ “자,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 루멘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공방도 정리해야 하고, 나도 확인할 게 많아졌거든. 손님을 오래 붙잡아둘 상황이 아니야.” “축객령이네요?” ​ 엘레노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정확해.” ​ 루멘시아는 뻔뻔하게 웃었다. ​ “그래도 차도 못 내온 것치고는 꽤 유익한 상담이었잖아?” “그건…….” ​ 엘레노아는 무어라 대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편지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 “알겠어요. 일단 가보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야.” ​ 루멘시아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 딸깍. ​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저절로 열렸다. 복도 너머로 낡은 계단이 보였다. ​ “그리고 카엘.” ​ 문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루멘시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 “도망치지 마.” “…….” “너 자신에게서든, 네 연인들에게서든.” ​ 그 말에 목이 막혔다. 루멘시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그럼 다음에 올 때는 내 집을 짐승 우리라고 부르기 전에, 집주인이 근처에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 엘레노아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루크레치아도 아주 잠깐 멈칫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희미하게 웃으려 했지만, 제대로 웃을 수 없었다. ​ 루멘시아의 집에서 나온 우리는 평소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아르세인의 이름난 가게에 들러 음식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오랜만에 루크레치아와 대련도 했다. 서로 검을 부딪치고,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는 동안만큼은 복잡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 그리고 저녁이 찾아왔다. 우리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범한 외출복을 고르고 그 위에 후드가 달린 로브를 입었다. 루크레치아는 편지를 품 안에 넣었고, 엘레노아는 평소보다 조금 조용한 얼굴로 머리를 정리했다. ​ “가자.” ​ 내 말에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밖으로 나서자 아르세인의 밤거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낮의 아르세인은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는 말에 어울리게 품위 있고 차분했다. 거리에는 화가들이 그림을 팔고,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유리창 너머로는 책과 악보, 마도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도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 가로등마다 푸른빛을 머금은 마석등이 켜졌고, 그 아래로 술에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낮에는 조용히 닫혀 있던 문들이 하나둘 열리고, 골목마다 붉고 보랏빛이 섞인 등불들이 걸렸다. 특히 북쪽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노골적으로 달라졌다. 거리의 향부터 달랐다. 짙은 향수 냄새와 달짝찌근한 향기들이 코를 자극했다. ​ “이쪽이 맞아?” ​ 엘레노아가 낮게 물었다. ​ “루멘시아가 말한 건 북쪽 지구였어.” ​ 나는 손에 쥔 쪽지를 다시 확인했다. 비누가 새겨진 간판.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가게의 표식이었다. ​ “거기 멋진 신사분~ 이쪽으로 오세요!” ​ 온갖 호객행위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길가에서 반쯤 나체나 다름 없는 여자들이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몸을 흔들며 유혹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녀들은 같은 여자인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에게도 유혹하는 몸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둘 다 로브 후드를 깊숙히 눌러 쓰고 있어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루크레치아는 거리의 사람들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고, 엘레노아는 내 팔을 살짝 붙잡았다. ​ “카엘군.” “응?” “너무 두리번거리진 마.” “내가 언제.” “지금!” ​ 엘레노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단지……. ​ 저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을 그녀들이 입으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마른 몸매였는데, 만약 루크레치아나 엘레노아의 몸에 저들이 입고 있는 옷을 입는다면 남는 부분 하나 없이 조금만 움직여도 중요부위가 다 노출될 것 같았다. 거기다가 방금 저 여자처럼 몸을 흔들거나 아니면 저 뒤쪽의 여자처럼 유혹하는 몸짓을 나에게 보여준다면……. ​ “카엘군.” “으응?” “정신 차리고 저길 좀 봐바.” ​ 한참 걷던 엘레노아가 앞쪽을 가리켰다. 골목 끝에 다른 가게들보다 조금 조용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목조 건물이었다. 다만 입구 위에 매달린 작은 간판에는 하얀 비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나는 잠시 그 간판을 바라봤다. 이제 정말 여기까지 왔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비누가 새겨진 간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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