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토벌 작전 1
45화. 토벌 작전 1
“흐아아암…. 아침에 움직이는 건 너무 힘들어….”
이틀 연속 아침 일찍 움직이느라 엘레노아는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걸을 때마다 몸이 옆으로 휘청이는 걸 보니 조만간 어딘가에 부딪혀 넘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그녀의 팔짱을 끼고 반쯤 연행하듯 데려갔다.
“카엘구운…. 고마워.”
그녀의 감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려 할 때마다 반대편에서 차가운 시선이 느껴져 애써 표정을 굳혀야 했다.
루크레치아가 중앙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
“카엘. 의외로 우리가 늦은 것 같아요.”
“의외인데….”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부 중앙 홀은 이미 제국 기사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브리핑에 참석했던 기사들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도 상당히 많았다.
밤사이 인근 지역에서 지원 인원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기사가 이쪽을 힐끗 바라봤지만 금세 관심을 거두고 자기 동료들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앙 홀에는 어제와 비슷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제국 기사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듯 주변을 살피는 시선도 자주 느껴졌다.
어제 지부장이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접수대로 향했다.
“파티 구성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내가 말하자 지부원은 앞에 놓인 명부를 펼쳤다.
나는 내 이름과 함께 루크레치아, 엘레노아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
지부원은 기사패와 명부를 대조한 뒤 세 사람의 이름 옆에 같은 조를 뜻하는 표시를 남겼다.
“확인됐습니다. 중앙 홀에서 잠시 대기해주십시오.”
우리는 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대기했다.
엘레노아는 아직 졸음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았는지 내 팔에 살짝 기대었고 루크레치아는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엘레노아. 이제 일어나.”
“일어나 있어요…….”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을 감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게 향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엘레노아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결국 엘레노아는 하품 한번하고 눈을 비비며 잠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문이 열렸다.
지부장이 지부원들을 거느리고 중앙 홀로 들어왔다.
어제의 무거운 표정과 달리 오늘은 얼굴이 제법 밝았다.
홀에 모여 있던 기사들도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하나둘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군.”
홀 안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우선 좋은 소식부터 전하겠다. 본부와 인근 지부에 요청했던 지원이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그의 말에 기사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지부장은 홀 뒤편에 모여 있던 낯선 기사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오늘 새벽 도착한 지원 인원이다. 덕분에 처음 계획했던 선발대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적어도 부족한 인원으로 남부 경계 구역에 들어갈 일은 없어진 모양이었다.
홀 안에 남아 있던 긴장감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지부장은 곧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안쪽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밝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리고 이번 지원에는 본부에서 파견된 지휘관도 포함되어 있다.”
지휘관이라는 말에 주변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토벌 작전이라면 지부장이 지휘를 맡아도 충분했다.
본부에서 따로 사람을 보냈다는 건 이번 사태를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부장은 제복의 옷깃을 바로잡고 몸을 돌렸다.
“전원 정숙.”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곧 귀빈께서 입장하신다. 모두 흐트러짐 없이 예를 갖추도록.”
귀빈?
나는 의아한 얼굴로 안쪽 문을 바라봤다.
주변의 기사들은 이미 무언가 알고 있었던 듯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지부장이 먼저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홀에 모인 기사들도 일제히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 직후 안쪽 문이 열렸다.
금빛 문양이 새겨진 제복과 화려한 장비만으로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실 제국 기사.
그들은 곧장 나와 양 옆으로 갈라져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은빛에 가까운 흰 머리카락과 선명한 붉은 눈동자.
레오폴트 황태자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 안쪽이 굳었다.
티몽 백작의 의뢰 당시 콘라트라는 가명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던 레오폴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레오폴트는 그 날 루크레치아의 가슴과 입술을 내 눈앞에서 빼앗고 개처럼 목줄을 달아 기어다니게 하는 치욕을 줬다.
물론 그날 우리를 저택에서 빠져나오게 도운 것도 레오폴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루크레치아에게 했던 행동까지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루크레치아의 어깨에도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엘레노아 역시 졸음이 완전히 달아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근위기사들이 만든 길을 따라 홀 중앙까지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에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익숙했던 느긋한 여유가 남아 있었고 수십 명의 기사에게 둘러싸인 지금도 조금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지부장이 몸을 돌려 크게 외쳤다.
“황태자 전하께 경례!”
홀에 모인 기사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께 영광을.”
나도 두 사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레오폴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예를 거두도록.”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기사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레오폴트는 홀을 채운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우리 쪽에 시선이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은 먼저 엘레노아를 지나 루크레치아에게 머물렀고 마지막으로 나를 향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황태자가 곧 다른 기사들을 바라봤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모여준 것에 감사한다.”
레오폴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중앙 홀에 울렸다.
“그대들은 이미 이번 사태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을 것이다. 제국의 이름을 짊어진 기사들이 백성을 살해하고, 다른 기사들마저 같은 방향으로 행방이 끊기고 있다. 황실에서도 이를 단순한 변절이나 도적 행위로만 보지 않고 있다.”
홀 안에는 작은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레오폴트는 벽에 걸린 두 초상화와 남부 경계 구역이 표시된 지도를 차례로 바라봤다.
“그대들 가운데에는 서로를 의심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무엇을 상대하게 될지 몰라 두려움을 느끼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방심하는 자보다 경계하는 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 법이니까.”
그의 말투는 높지도,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홀에 모인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레오폴트가 지부장에게 시선을 보내자 지부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지도 앞으로 이동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지휘를 맡으시는 만큼 어제 공지한 작전에도 변경이 생겼다.”
그의 손가락이 아르세인에서 남부 경계 구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짚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전원은 본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전방과 좌우에 정찰조를 배치하되, 언제든 본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리 이상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손가락이 지도 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 기사가 손을 들었다.
“곧장 본거지를 찾고 공격하는 겁니까?”
“아니다.”
지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이동 경로를 따라 흔적과 생존자를 확인한다. 본거지에 찾더라도 적의 규모와 배후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무리하게 진입하지 않는다. 적이 일부러 흔적을 남기며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굳어졌다.
“각 파티는 특이 사항을 발견하는 즉시 본대에 보고하도록. 변절 기사와 도적단의 흔적은 물론이고, 실종된 기사나 납치된 주민, 이종족의 움직임, 평소와 다른 마물의 출현도 모두 포함된다.”
지부장은 홀 한쪽에 준비된 신호탄과 연락용 장비를 가리켰다.
그리고 지부원들이 벽면마다 실종된 기사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저들 전부가 남쪽으로 향해 사라진 제국 기사였다.
배신자인가 단순한 희생자인가, 그건 가봐야 알 수 있겠지.
“예상하지 못한 교전이나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독단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라. 신호탄을 사용하거나 전령을 보내 즉시 본대에 알리고,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생존과 현 위치 유지를 우선한다.”
이번에는 레오폴트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같은 제국 기사다. 당연히 제국 기사들의 전투 방식과 지휘 체계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대들이 어떤 상황에서 추격하고, 어떤 신호에 반응하는지까지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기사들을 한 명씩 확인하듯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눈앞에 보이는 흔적을 무조건 믿지 마라. 생존자를 발견하더라도 주변을 먼저 살피고, 동료가 사라졌더라도 혼자 뒤쫓지 않도록.”
레오폴트의 시선이 다시 우리 쪽에 닿았다.
“손에 들어온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택에서 했던 그의 말을 여기서 다시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 내 속마음과 달리 레오폴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제국의 백성을 구하고 기사단의 이름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대들을 믿겠다. 모두 임무를 마치고 살아서 돌아오도록.”
지부장이 다시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허리를 숙였다.
홀에 모인 기사들도 일제히 같은 자세를 취했다.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중앙 홀을 울렸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외쳤지만 시선은 레오폴트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만남이 단순한 우연인지 그가 일부러 이 작전에 참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작전 내내 우리는 그의 지휘 아래 움직여야 했다.
* * *
털썩
“하아…. 아침부터 움직이는 건 너무 힘들어.”
엘레노아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내 방의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지며 누웠다.
그녀의 게으름에 루크레치아가 살짝 흘겨보며 그녀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엘레노아. 또 잘거야?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
“으응…. 아침에 너무 못자서 피곤해…. 푸우…….”
정말 믿기진 않았지만,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고르게 숨을 내쉬며 깊게 잠이 들어버렸다.
원래라면 내일부터 시작할 토벌 작전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아가 이렇게 잠들어버리자 굳이 깨워가며 말을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기사단 지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감도 숙소로 돌아오니 조금씩 가라앉았고…….
나는 침대 한쪽을 차지한 엘레노아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근처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작전은 처음 들었을 때보다 훨씬 안전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소수의 선발대로 남부 경계 구역에 들어가야 했지만 이제는 황태자를 중심으로 본대가 움직인다.
거기다 그를 호위하는 황실 직속 기사들까지 있었다.
오늘 지부에서 본 인원만으로도 평범한 도적단 하나를 토벌하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변절한 제국 기사들이 섞여 있다고 해도 본대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적의 정확한 규모도, 배후가 누구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앞장서서 모든 위험을 감당해야 했던 어제와는 달랐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토벌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끝날지도 모른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레오폴트 황태자.
눈을 감자 중앙 홀에서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건 티몽 백작의 의뢰.
지금과 그때의 우리는 정말 달라졌다.
만약에 지금의 우리가 그때 레오폴트와 만났다면…….
나는 루크레치아를 레오폴트에게…….
“읏….”
갑자기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루크레치아?”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운 엘레노아 옆에 앉아 있던 루크레치아가 내게 다가와 손으로 내 바지를 잡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지 아래에 발기된 내 자지를 잡고 있었다.
“……카엘. 왜 흥분했나요?”
“그건….”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왜 흥분했지?
그야…….
레오폴트가 루크레치아를…….
아니, 아니야.
‘레오폴트가 루크레치아를’ 이 아니라 ‘루크레치아를 레오폴트에게’ 안기게 하는 상상을 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건 그냥 상상일 뿐이다.
내 욕망은 아직 그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었다.
“그냥 별다른 이유 없어. 남자들은 가끔 피가 쏠려서 서는 경우도 있거든…. 그러니까 루크레치아. 이제 좀 놓아줄…. 읏…!”
“카엘. 거짓말이네요. 엘레노아가 자고 있으니까 제 방으로 갈까요? 아니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동자에 못 이겨서 결국 그녀를 따라 루크레치아의 방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왠지 가지 않는다면 더 추궁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벽 너머에 엘레노아를 두고 루크레치아와 뜨거운 오후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