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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EP0063-0059화-승전 연회 1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날에도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를 위해 황실 연회장에서 작은 연회를 열어 주셨다. 그 자리에서 황제 폐하께서는 수석 졸업생들에게 직접 훈장을 내려 주셨고 나는 단상 아래에서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가 그 영광을 받는 모습을 지켜봤다. ​ 하지만 그때 연회가 열렸던 곳은 황궁 외곽의 별궁 중 하나였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황궁 본궁의 대연회장이었다. ​ 제국의 중요한 국빈과 대귀족을 맞이할 때나 열리는 장소답게, 높게 솟은 천장에는 황금빛 장식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벽을 따라 늘어선 기둥마다 제국의 독수리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아카데미 졸업 연회에서는 졸업생들 모두 제국 기사 정복 차림이라 어딘가 약간 딱딱한 느낌이었는데, 이번은 승전 기념 연회였다. ​ 제국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지와 가문을 드러내는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있었다. 북부 귀족들은 두터운 모피와 은실 장식을 두른 망토를 걸쳤고 남부에서 올라온 이들은 얇고 화려한 비단옷에 보석 장식을 아낌없이 달고 있었다. 과거에는 서로 다른 국가, 다른 혈통, 다른 사상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자들이 이제는 제국의 깃발 아래 한 연회장에 모여 있었다. ​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그리 곱지는 않았지만……. ​ 그리고 귀족들 사이로 황실 제국 기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싸며 지키고 있었다. 단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곧게 서 있는데 이따금 그들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같은 제국 기사지만누군가는 하염없이 가만히 서 있고, 누군가는 연회를 즐기고 있으니 괜히 마음 한켠이 불편해진다. 거기다가 주위에 있는 연회 참석자들은 모두 화려한 연회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우리는 제국 기사로서 초대받은 탓에 정복을 입고 있었으니 더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기사 정복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편하게 있을 수 있었을 텐데…. ​ “카엘군! 이거 맛있어!!” ​ 옆에 선 엘레노아는 살짝 불편해진 나와 달리 어느새 볼을 빵빵하게 불린 채 음식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따금 우리를 날카롭게 훑어보는 황실 기사들의 시선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 “우물우물!” ​ 엘레노아는 접시에 올려 둔 고기 요리를 한입 베어 물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카엘군도 먹어 봐. 제도의 풍미를 느낄 수 있어!” “…엘레노아. 연회 시작 전부터 너무 많이 먹는 것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걸…!” ​ 그 말과 함께 엘레노아는 또 다른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보통 이때쯤이면 루크레치아가 서슬퍼런 눈으로 엘레노아를 쏘아보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을텐데…. ​ 그녀는 현재 이 연회장에 없었다. 이번 토벌전에서 나와 엘레노아 역시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루크레치아는 그보다 더 큰 자리에 불려 갔다. 레오폴트의 추천으로 이번 토벌전의 최고 공신 중 하나로 이름이 올랐고, 그 공적을 근거로 로엔하임 가문의 복권과 별도의 포상이 준비되고 있다고 했다. ​ 훈장 하나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 오늘 이 연회는 루크레치아 폰 로엔하임이라는 이름이, 다시 제국의 귀족들 앞에 공식적으로 돌아오는 자리였다. 그 준비 때문에 루크레치아는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언제 오려나….” “아마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가 등장하기 직전에 나올 거야.” “……그래.” ​ 레오폴트…. 머릿속에서 그 날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되뇌여도 그 날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 “카엘군?” ​ 엘레노아의 두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이상한데.” “아니야.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정신이 없네.” ​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엘레노아는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녹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무언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 “카엘군. 혹시…….” ​ 그때였다. ​ 빠아아앙! ​ 연회장 전체를 울리는 우렁찬 트럼펫 소리가 엘레노아의 말을 끊었다. 음식과 술을 즐기던 귀족들이 일제히 대연회장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저기서 낮은 대화 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연회장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 곧 정문 앞에 선 궁정 시종장이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 쿵! ​ “귀빈과 내빈 여러분께 알립니다! 잠시 하시던 담소를 멈추고,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마련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쿵! 쿵! ​ “한때 북부의 대영주이자 맹주로서 오랜 세월 제국 북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위대한 가문! 로엔하임. 그리고…….” ​ 시종장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 “오랜 시련 끝에 다시 제국의 깃발 아래 돌아온, 남부 토벌전에서 제국을 사악한 자들에게서 구해 낸 영웅!” ​ 그가 한 박자 쉬었다. ​ “루크레치아 폰 로엔하임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소의 정복 대신 정교한 금빛 장식이 수놓아진 흰 드레스를 입은 루크레치아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위아래로 살짝 흔들리며 하얀 구두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금발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목에는 하얀 레이스로 된 목 띠가 둘러져 있었다. ​ 평소 검을 쥔 모습에 익숙했던 탓인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물론 그녀가 입은 드레스 자체는 다른 귀족들의 옷보다 한결 수수하긴 했다. 대신 그 수수함을 돋보이게 해줄 가슴께에 달린 금장식이 은은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떠한 드레스보다 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옷같았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둔 것 같이…. ​ “저게 로엔하임의 후계자….” “생각한 것보다 더 비범한데요?” “귀족은 망해도 삼 대는 간다더니 아직도 고풍스러운 자세가 남아 있군요.” ​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귀족들 사이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곧 루크레치아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귀족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왔다. ​ 짝…. 짝짝짝 ​ 처음에는 듬성듬성 시작된 박수가 이내 연회장 전체를 채울 만큼 커졌다. 그 시끄러운 박수 소리 사이로 듣기 거북한 말들도 들려왔다. “여자 제국 기사라더니 역시나 저 몸매 좀 봐.” “하아…. 미치겠군. 저정도 젖이라니…. 수도의 창관을 다 뒤져도 보기 힘들거야.” “저런 젖을 달고 있으면 싸울때마다 장관이겠는데?” 그쪽을 쳐다보니 몇몇 젊은 남자 귀족들이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며 조용히 희롱하며 즐기고 있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 사이로 어딘가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시선을 옮기자 북부 출신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귀족들이 보였다. 두터운 모피 망토와 짙은 색 계열의 예복. 그들은 겉으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루크레치아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다시 나타난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듯이…. ​ 엘레노아도 내 시선을 따라 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카엘. 로엔하임의 복권은 단순히 없어진 가문 하나가 다시 이름을 되찾는 문제가 아니야.” ​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북부 귀족들을 향해 있었다. ​ “가문이 사라진 뒤 다른 자들이 차지했던 옛 영지에 대한 권리도 다시 주장할 수 있게 될테니까. 남의 유산을 탐하던 자들이 이제 역으로 식탁 위에 올라간 셈이지.” ​ 엘레노아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 “저 사람들은 아마 지금 각자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겠지. 로엔하임이 다시 돌아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빼앗기게 되는지….” ​ 그녀는 잠시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 “하지만 오히려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도 있을거야. 루크레치아는 로엔하임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잖아. 루크레치아에게 달콤한 말을 건네며, 그 이름에 엮인 광활한 북부 땅에 대한 권리를 손에 넣으려는 자도 분명 생길 거야. 수많은 아귀 떼들이 달려들겠지…. 아마…… 발테른 또한 복권된다면 같은 처지일거야….” ​ 그녀는 처연한 미소로 나를 올려다봤다. 평민인 나는 그녀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손을 살짝 잡고 있던 엘레노아의 손등을 조용히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 짝짝짝짝! ​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루크레치아는 화려한 조명과 수많은 귀족들의 박수 속을 걷고 있었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 모습이 나에겐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 “그러니까 알겠지…?” “응? 뭘… 윽!” ​ 엘레노아는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나를 노려봤다. ​ “루크레치아를 빼앗기지 않게 잘 하라구!” “그야 당연…….” ​ 당연하다….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이미…. ​ “하아….” “…?! 카엘군!! 한숨은 뭐야! 어째서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건데!!” ​ 흔들흔들 ​ 엘레노아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대답해! 대답하라구!” “억…. 엘레… 노아… 머리 어지러워…!” “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씨익! 씨익!” ​ 퍽! 퍽! ​ 엘레노아는 내 가슴을 세게 한 대 치고는 콧김을 뿜어내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한없이 연약한 주먹에 맞은 터라 아플 리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 눈앞에서 루크레치아가 레오폴트에게 안기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보며 흥분했다. 그녀가 천박한 신음을 흘리며 거칠게 가슴을 흔들며 박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내 자지를 흔들며 자위해버렸다. ​ 그리고는 레오폴트가 의도한 대로 내가 잘못 본 것이라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럴 리 없다고…. 루크레치아가 그의 자지를 받아들일리 없다고, 그저 그녀를 닮은 광신도의 접대라고 말했다. ​ 그러면서 오히려 그녀와 섹스했다.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받아들이는 그녀에게 그저 내 욕망을 해소했다. 오히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또 루크레치아가 다른 이에게 안기길 바랬지…. 그때는 상황에 휩쓸렸고, 그녀가 나를 자극하는 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흥분이 가라앉은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런 내가 정말 루크레치아의 연인일 자격이 있는 걸까….. ​ 물론 그 원인은 내 몸 안에 있는 이 옛 신의 저주 때문이었다. 그 저주가 그녀를 진흙탕에 뒹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들을 옛 신의 저주 탓으로만 돌리기엔 너무나도 스스로 한심했다. ​ “루크레치아….” ​ 수많은 귀족의 박수 속을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았다. 평소라면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이상할 만큼 심장이 저릿했다. ​ 루크레치아에게 건넸던 사랑의 말. 함께 웃었던 순간들.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를 약속했던 시간들까지. 전부 빛을 잃은 그림처럼 멀고 희미한 기억으로 변해 버린 것만 같았다. ​ ‘어쩌면…….’ ​ 루크레치아는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그 두려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 그때 연회장 정문 앞에 궁정 시종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쿵! ​ 그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자, 막 연회장 중앙을 지나던 루크레치아의 걸음도 자연스레 멈췄다. ​ 쿵! 쿵! ​ 이미 한 차례 잦아들었던 연회장 안이 다시 술렁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 “귀빈과 내빈 여러분께 알립니다!” ​ 시종장의 목소리가 대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 “황금빛 산실이 낳은 황실의 고귀한 혈손. 황금빛 제국의 내일을 이끌 샛별, 레오폴트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오폴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황실 예복, 어깨에서 길게 늘어진 망토, 그 위에 수놓아진 황금빛 독수리 문장까지…. ​ 누가 봐도 제국의 황태자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느긋한 걸음은 연회장 한가운데 서있는 루크레치아를 발견한 순간 멈췄다. 평소라면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을 레오폴트의 표정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 곧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 “이런. 제가 너무 빨랐군요. 영웅을 만난다는 마음에 어린 소년처럼 들뜬 바람에….” ​ 그 말에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런 표정을 지으실 때가 있군요.” “아름다운 영웅 앞에서는 황태자 전하도 침착함을 잃으시는 모양입니다.” “오늘 연회는 제법 흥미로워지겠어요.” ​ 가볍고 짓궂은 놀림이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레오폴트는 그런 말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처한 듯 웃으며 루크레치아를 향해 다가갔다. ​ “로엔하임의 영애께서 이미 입장하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 그는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한 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 “괜찮으시다면, 이번 토벌전의 영웅과 함께 걸어갈 영광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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