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EP0065-0061화-승전 연회 3
그날 연회가 막을 내릴 때까지 레오폴트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당장은 눈앞에 있는 루크레치아에게 집중해야 했으니까.
“앗…. 미안. 루크레치아.”
“괜찮아요. 한번만 더 밟으면 10번 채운다는 것만 빼면요.”
그녀의 리드에 따라 함께 춤을 췄지만 엉성한 실력 탓에 그녀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아버렸다.
그럴때마다 루크레치아가 몇번 쿡쿡 웃으니 괜히 부끄러워 졌다.
한동안 그렇게 연회를 즐기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으니 우리 곁으로 몇몇 귀족들이 다가왔다.
돌아온 북부의 맹주와 아주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 자들이 많아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지운 루크레치아는 잠시 내 품에서 벗어나 그들을 응대했다.
품에 안긴 그녀를 내주긴 아쉬웠으나, 나는 애써 마음을 달래며 그녀를 놓아줘야만 했다.
평소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친근하게 다가가는 건 대부분 나와 엘레노아의 몫이었고 루크레치아는 의뢰와 관련된 대화만 나누며 괜한 친분을 쌓으려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매끄럽게 대하는데엔 조금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로엔하임의 후계자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귀족들을 차분하게 맞이했다.
지나치게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냉담하게 밀어내지도 않았다.
필요한 만큼 예를 갖춰 답하며 때로는 짧은 한마디로 대화의 흐름을 정리했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이 귀족으로서의 루크레치아….
아카데미에서 검을 들고 내 곁에 서 있던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낯설었지만 그 낯섦이 이상할 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동안 귀족들을 응대하던 그녀가 내게 다가와 살짝 몸을 기댔다.
“피곤하네요.”
“그런 것치고 조금 즐거워 보이던데…?”
“카엘이 뒤에 있어 줬으니깐요. 언제든 기댈 수 있게…. 게다가…….”
루크레치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났어요. 그보다 카엘. 엘레노아는 어딨나요?”
엘레노아…?
그러고보니 아까 그렇게 내 가슴을 두드리고 가버린 다음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연회장 어딘가에서 볼이 부풀 정도로 음식을 잔뜩 넣으며 기분을 풀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루크레치아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카엘. 저에게만 집중해주는건 좋지만 엘레노아도 어느정도 신경 써주세요. 저보다 여린 아이니까….”
“으응…. 항상 두 사람한테 공평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꼭 ……않아도 돼요.”
“뭐라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를 바짝 가져가며 다시 물어봤는데, 루크레치아는 아까보다 더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난생 처음보는 장난기가 섞여 있는 미소였다.
엘레노아가 지을 법한 그런 미소….
“카엘…. 얼굴이 빨개졌어요.”
“아…. 아니…. 하하….”
나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그때 북부 출신으로 보이는 귀족들이 다가오는게 눈에 들어왔다.
웃음기 가득한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치 혹한의 북풍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장난끼 가득하게 웃고 있던 루크레치아는 더 이상 없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로엔하임의 후계자였다.
“…….”
루크레치아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마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카엘. 얼른 엘레노아를 찾으러 가봐요. 여긴 혼자 상대할게요.’
그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금방 돌아올게.’
그렇게 눈빛으로 대답한 뒤 뒤로 물러났다.
루크레치아도 내게 시선을 거둔 뒤 다가오는 북부 귀족들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엘레노아는 어디로 갔을까….
일단 연회장 내부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하고 음식을 들고 돌아다니는 시종들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연회장 밖으로 나가봐야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티몽 백작의 의뢰 당시 이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었다.
그때도 엘레노아를 찾으러 연회장에 돌아왔을때 그녀는 연회장에 없었다.
그녀를 찾으려고 정원까지 나갔었고 거기서 그녀가 낯선 남자들한테 윤간 당할뻔한 걸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다.
만약 지금처럼 옛 신의 저주가 심해진 상태라면….
아마도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고 낯선 남자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짓과 자지에 더럽혀져가는 그녀를 보며 자위했을지도 몰랐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흐트러뜨리려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때의 일은 이미 지나갔고 엘레노아는 무사했다.
무엇보다 여기는 황궁이었다.
제국의 심장부이자 수많은 귀족과 황실 기사들이 오가는 장소.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리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불안과 흥분이 뒤섞인 감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왔다.
혐오스러울 만큼 익숙한 감각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이 급해지자 다급히 연회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연회장 밖에도 귀족들은 가득했다.
대연회장 안쪽보다 덜 붐빌 뿐, 복도와 휴게 공간 곳곳에는 술잔을 든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몇몇 시선이 내게 향했지만 내가 제국 기사 정복을 입고 있는 걸 확인하자 곧 흥미를 잃은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엘레노아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까 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고 정말로 크게 충격을 받은 걸까?
평소라면 이쯤에서 어디선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나서 “카엘군!”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팔짱을 껴 왔을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옆에 달라붙어 방금 먹은 음식이 어땠는지 떠들어 댔겠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가슴을 비비고 부끄러워 하는 나를 골려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텐데….
나는 연회장 밖의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엘레노아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사람의 기척이 드문 곳까지 와 있었다.
다행히 본궁의 대연회장은 외부 동선과 분리되어 있었다.
출입 금지 구역까지 흘러들어 갈 걱정은 없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한참을 적막한 복도를 따라 조금 더 걷던 중 저편 모퉁이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익숙한 목소리! 엘레노아였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것은 그녀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버렸다.
순간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또다시….
또다시 질리지도 않고 내 안쪽 깊은 곳에서 불쾌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 죽인 채 조심스럽게 모퉁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투시 능력을 발동하자 벽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복도 한쪽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방 안에 엘레노아가 서 있었다.
아마 연회에 쓰일 물건이나 잡동사니를 임시로 쌓아 두는 창고인 듯했다.
하지만 내 안쪽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던 뒤틀린 욕망이 기대하던 광경은 아니었다.
엘레노아는 흐트러진 기색 하나 없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다만 표정은 평소처럼 장난스럽지도 않았고 오히려 차갑고 신중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낯선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지……?’
내가 생각했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당장 들어가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봤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엘레노아에게 무어라 낮게 말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엘레노아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남자가 다시 무어라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레노아는 눈을 질끈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받아들고 품 안에 넣었다.
한참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 뒤, 엘레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슴 한쪽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분명 내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엘레노아가 나 모르게 누군가와 이런 장소에서 만나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졌다는 사실에 질투심이 들었다.
의문의 남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엘레노아에게 예를 갖춘 뒤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엘레노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채 방금 받은 물건을 손 안에서 굴리듯 바라봤다.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옷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손이 옷 안쪽에서 움직일 때마다 가슴께의 천이 살짝씩 흐트러졌다.
그러다가 곧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창고를 나왔다.
그녀는 잠시 서서 복도 양쪽을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채 내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모퉁이를 돌았다.
“엘레노아!”
“어…. 카, 카엘군!”
그녀는 나를 보며 밝게 웃었지만 어딘가 당황한 듯한 어색함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어디 갔었어? 걱정해서 한참을 찾으러 다녔다고.”
“정말…? 카엘군이…? 헤헤. 미안해! 하지만 카엘군이 그렇게 나를 찾으러 다녔다고 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은걸?”
엘레노아는 평소처럼 팔짱을 끼며 자신의 가슴을 내게 비볐다.
“읏….”
“카엘군! 얼굴 빨개졌어!”
“그…, 그야…!”
“변태!”
“엘레노아의 가슴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엘레노아는 내 말에 갑자기 팔짱을 풀고 살짝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진짜 변태였어!”
“크흠…. 그보다 어디 간거야? 루크레치아도 걱정하고 있어.”
“으음….”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잠깐 소화시킬 겸 걷고 있었어!”
“……정말?”
“응! 그 덕에 다시 들어가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가자! 가자!”
엘레노아는 땅을 박차듯 뛰어오르며 내 팔을 잡고 연회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녀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뒤에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불안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