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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EP0066-0062화-엘레노아의 변화 1


엘레노아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루크레치아의 주변에는 더 이상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 혼자 연회장 한편에 서서 잔에 담긴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때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남자 하나가 다가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루크레치아는 짧은 대답과 삭막한 표정만으로 그를 엉거주춤 물러나게 만들었다. ​ “루크레치아.” ​ 나와 엘레노아가 다가가자 루크레치아의 굳어 있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 “카엘. 빨리 돌아왔네요.” “다행히 도중에 만났거든.” “카엘군! 이쪽 이쪽!” ​ 엘레노아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이끌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연회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음에도 테이블 위에는 아직 온갖 음식들이 남아 있었고 그녀의 식탐을 채우기에는 아직 부족한 듯했다. ​ “이거 먹어 봐, 카엘군. 이건 진짜야.” “아까도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아까 건 진짜였고, 이건 더 진짜야.” ​ 대체 진짜에도 단계가 있는 건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엘레노아가 건네는 접시를 받아 들었다. 루크레치아도 그런 엘레노아를 바라보다가 결국 작게 웃으며 작은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연회를 즐겼다. 잠깐이지만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동안 엘레노아를 따라다니며 실컷 즐긴 우리는 연회가 끝난 뒤 연회장을 나와 시가지로 들어왔다. 이번 승전 연회에 초대되면서 루크레치아에게는 황실에서 준비한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나와 엘레노아는 수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탓에 겨우 외진 곳에 허름한 숙소를 잡아 둔 상태였다. ​ “으으…… 배불러.” ​ 엘레노아가 양손을 들어 자기 배를 톡톡 두드렸다. 평소보다 살짝 볼록하게 올라온 배가 어쩐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그렇게 먹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연회 음식은 기다려 주지 않는단 말이야.” ​ 엘레노아는 당당하게 말한 뒤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 카엘군은 루크레치아를 잘 데려다주고 와. 잘 가요. 루크레치아.” “혼자 괜찮겠어?” “응. 이제 배불러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어. 침대에 누워서 쉴거야.” ​ 엘레노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허름한 숙소로 올라갔다. 엘레노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 “루크레치아.” “네.” “나 때문에…… 레오폴트와…….” ​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루크레치아가 한 걸음 다가와 내 입술을 막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숨이 멎었다. ​ 부드러운 감촉이 닿고 희미한 향기가 가까이에서 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굳어 버렸다가 곧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입맞춤이었다. ​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오로지 그녀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예전에 이미 말했잖아요.” ​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 “저는, 아니 우리는 카엘 곁에 있는 걸 선택했어요.” “…….” “그러니까 그 선택으로 인해 따라오는 대가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 루크레치아의 손이 내 가슴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 “그러니 그렇게 혼자 자책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말아요.” ​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 “그건 우리가 사랑하던 카엘의 멋진 모습이 아니니까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막힌 것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 “저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세요.” ​ 그 말에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 “……알겠어.” ​ 완전히 괜찮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죄책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에스코트해 줄게.” ​ 루크레치아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올렸다. ​ “부탁할게요.” ​ 끝나버린 연회와 달리 밤의 제도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거리마다 등이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늦은 시간임에도 술잔을 들고 승전을 축하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남부의 작은 전투정도였지만 제국에게 최근에 이정도 규모의 토벌전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기에 이 승리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축제를 열었다. 그 덕에 제도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열리는 축제를 밤 늦게까지 즐기고 있었다. ​ 우린 최대한 보폭을 늦춰 천천히 그 축제의 현장을 지나쳤다. 그저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것뿐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 “도착… 했네요.” “응….” ​ 잠시 루크레치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 “내일도 또 여러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와 줄 거죠…?” “응…. 당연하지.” “그럼 내일 봐요. 카엘.” “잘자. 루크레치아….” ​ 나와 그녀는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떨어졌다. 숙소로 들어가는 루크레치아의 뒷모습을 한참을 보다가 나도 숙소로 돌아왔다. ​ “엘레노아?” ​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투시로 확인해 보니 이미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엘레노아가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침대 위 이불은 사람 하나를 감싼 모양으로 봉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불 끝자락이 아주 느리게 오르내리는 걸 보니 깊이 잠든 게 분명했다. ​ “……많이 피곤했나 보네.” ​ 나는 괜히 더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나는 가장 먼저 엘레노아의 방으로 향했다. ​ 똑똑 ​ “엘레노아. 일어났어?” ​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엘레노아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전날 연회에서 그렇게 많이 먹고 돌아왔으니 아직도 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아직 어둑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침대 위에는 이불이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 “엘레노아?” “으응…….” ​ 그때 이불 너머에서 엘레노아의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카엘군…….” “미안. 아직 자고 있었구나.” “응…… 엄청 졸려…….” ​ 엘레노아는 이불 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어제 루크레치아가 말하기를 오늘도 여러 귀족들을 만나야 한다고.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우리도 같이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루크레치아…….” ​ 이불 안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응. 카엘군이 가 줘…….” “혼자?” “응……. 나는 너무 졸려서 힘들어…….” ​ 엘레노아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 “카엘군이 루크레치아 잘 도와주고 와. 괜히 이상한 귀족들이 달라붙지 못하게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해…….”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지?” ​ 내가 묻자 이불 속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곧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아니야. 그냥 좀 많이 졸린 것뿐이야…….” “정말이지?” “응…… 정말.” ​ 나는 잠시 침대 위의 이불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그럼 더 자. 아마 저녁 늦게 돌아올 것 같은데 식사 챙겨 먹어.” “응…… 다녀와, 카엘군…….” ​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 찌이익 ​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딱히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잠시 찜찜한 기분을 느끼다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문을 닫았다. ​ 그날 오후 내내 나는 루크레치아의 일을 도왔다. 황실에서는 로엔하임의 복권 절차와 관련해 제도 안의 비어 있던 건물 하나를 임시 접견 장소로 내주었다. 루크레치아는 그곳에서 여러 귀족들을 맞이했다. ​ 북부 귀족들, 황실 관료들. 로엔하임의 복권 이후 자신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살피러 온 자들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나는 루크레치아의 곁에서 그들의 이름과 가문을 기억하려 애썼고 시종들이 차를 내오거나 문서를 정리할 때마다 옆에서 도왔다. 루크레치아는 겉으론 아무런 힘든 기색도 내비치지는 않았으나 가끔가다가 책상 아래의 손이 잘게 떨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말없이 그녀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섰다. ​ 루크레치아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저 아주 작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고생했어요. 카엘.” “아니야. 나는 뭐 딱히 도와준 게 없는 걸….” “아뇨….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걸요.” ​ 해가 살짝 저물어갈때쯤 그녀의 일이 끝났다. 나야 그저 평범한 평민이라 그들의 대화를 모두 이해한 건 아니었으나 로엔하임의 과거 영광을 되찾는 길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 아무리 황제 폐하가 로엔하임을 복권했다 해도 다른 귀족들에게 당장 로엔하임의 땅을 내놓으라고 강제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대화와 협상.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의지를 통해 천천히 일을 진행해 나가야 했다. ​ “내일은 안 와도 돼요.” ​ 한참 문서를 정리하던 루크레치아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갑자기?” “카엘은 엘레노아와 함께 제도에 온 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제 일만 도와주고 있으면 엘레노아가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 루크레치아는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 “내일은 저 혼자 괜찮으니까, 둘이서 제도를 좀 둘러보고 와요. 축제 분위기라 볼 것도 많을 거예요.” ​ 엘레노아……. 그제야 나는 뒤늦게 그녀를 떠올렸다. 제도에 올라온 뒤로 루크레치아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루크레치아의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엘레노아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은 건 변명이 되지 않았다. ​ 게다가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 창고 같은 곳에서 있었던 일…. 도대체 무슨 일이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 ‘내가 너무 한쪽만 보고 있었구나.’ ​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알겠어. 내일은 엘레노아랑 같이 있어 볼게.” “네. 그렇게 해 주세요.” ​ 루크레치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고마우면서도 괜히 미안했다. 나는 그녀와 인사를 나눈 뒤 숙소로 돌아왔다. ​ 엘레노아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려던 순간,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순간적으로 문을 두드리려던 내 손이 멈췄다.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왜 그래야하는지 이해할 순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주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바짝 붙어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 ​ “하앗…. 흣….” ​ 벽 너머로 희미하게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오늘 아침에도 들었던 이상한 소리도 또다시 들렸다. ​ 찌이익! 찍! ​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엘레노아가 머무르고 있는 바로 옆방을 향해 투시를 사용했다. 벽면이 투명해지고 그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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