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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EP0074-0069화-습격


“엘레노아!” ​ 생각할 틈도 없이 능력을 사용했다. 미래시를 통해 충격에 튕겨 나온 짐들이 엘레노아의 머리를 세게 덮치는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 잔상이 사라지자 나는 맞은편에 있던 엘레노아를 끌어안고 무너지는 차체 안에서 미래시가 보여 준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쿵! ​ 등이 마차 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곧이어 사방에서 나무가 부서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차가 옆으로 넘어가며 바닥과 천장이 뒤집혔고, 쌓아두었던 짐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한동안 요란한 소리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 “윽….” ​ 나는 엘레노아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옆으로 완전히 전복된 마차 안은 엉망이었다. ​ “엘레노아, 괜찮아?” ​ 내 품에 안겨 있던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 “응…. 카엘군은?” “나도 괜찮아.” ​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부서진 마차 문 너머로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후두둑! 후두둑! ​ 쏟아지는 소리부터 살벌했다. 보통 폭우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간 홀딱 젖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비를 막는 것보다 전복된 마차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 “괜찮습니까?!” ​ 마부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크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직 들리는 건 거센 빗소리뿐이었고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쏟아지는 빗방울뿐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 “…….” ​ 조심스레 검을 빼 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엘레노아 곁에 붙었다. ​ “엘레노아! 단순히 전복된 것 같진 않아!” “응! 카엘군! 경계하고 있을게!” ​ 빗소리 때문에 목소리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목이 터져라 크게 외쳐야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를 경계하던 도중, 뒤에서 엘레노아의 목소리와 함께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 “카엘군!” ​ 뒤를 돌아보니 엘레노아의 손에서 갈색의 마력 구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구체는 마치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박동하며 희미한 빛을 주변에 흩뿌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바라보고 있자, 엘레노아가 거센 빗소리를 뚫으려는 듯 목청껏 외쳤다. ​ “지난번 미궁 임무를 끝내고 생각해 둔 거야! 마력을 이용해서 광원을 만들었어!” ​ 엘레노아가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갈색 구체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빠르게 솟구쳤다. 점점 작아지던 구체가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박동이 한순간 멎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구체가 폭발하듯 강렬한 빛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그 빛을 받아 반짝이며, 주위의 어둠을 일거에 걷어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게 무슨.” ​ 광범위한 영역을 비추던 갈색 구체는 잠시 더 허공에서 빛을 흩뿌리다가, 이내 힘을 다한 듯 서서히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환하게 드러났던 들판이 다시 어둠과 폭우 속으로 잠기려던 순간…. ​ 콰아아앙! ​ 하늘을 찢는 듯한 천둥과 함께 새하얀 번개가 먹구름 사이를 가로질렀다. 찰나에 불과한 번쩍임이었지만, 그 강렬한 빛은 어둠에 잠긴 세상을 다시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 전복된 마차를 둘러싼 나무와 수풀 사이로 드러난 수많은 형체들…. 번들거리는 비늘. 세로로 찢어진 노란 동공. 굽은 칼과 창을 움켜쥔 이형의 그림자들. ​ 리자드맨. 두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숫자였다. ​ “……!” ​ 찰나가 지나자 빛이 다시 사라졌다. 새하얗게 밝혀졌던 세상에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 왔고, 빗줄기 사이에서 번뜩이던 비늘과 눈동자도 그 속으로 흔적 없이 잠겨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거센 빗소리 너머로 진흙을 밟는 미세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어둠 속을 노려봤다. 어디서 공격해 올지 알 수 없었다. ​ 휘이익! ​ 그 순간 빗줄기 너머에서 무언가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 챙! ​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짧게 번진 빛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리자드맨의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 놈은 나보다 머리 두세 개는 더 컸고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침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 “엘레노아! 수가 너무 많아! 혼자 막기엔 버거워!” “카엘군! 내게로 와!” ​ 나는 검을 휘둘러 눈앞의 놈을 밀어낸 뒤 곧바로 엘레노아 쪽으로 물러나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엘레노아가 양손을 좌우로 펼치며 마력을 뿜어냈다. ​ 우웅! ​ 거대한 갈색 마력이 우리 둘을 감싸는 얇은 반구 형태의 보호막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은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 콰앙! ​ 보호막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달려들던 리자드맨들이 단단한 벽에 얻어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반구의 마력 보호막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갈색 빛이 주변을 밝혀 주었다. ​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리자드맨들이 보호막에 밀려 뒤엉키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마부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했다. ​ “젠장…!” ​ 하지만 예상대로 이미 늦었다. 전복된 마차 앞쪽에는 말들이 쓰러져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마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과 뒤섞여 진흙 위로 퍼지고 있었다. ​ 쩌적! ​ 낯선 파열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엘레노아의 보호막 한쪽에 커다란 금이 번져 있었다. ​ 두두두두두둥!! ​ “카엘군! 비가 보호막을 두드리고 있어!” ​ 보호막에 금을 만든 건 쏟아지는 빗방울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 마치 화살처럼 보호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리 폭우라고 해도 고작 빗방울이 마력으로 만든 보호막을 깨뜨릴 리는 없었다. ​ 번쩍! ​ 그때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발광하던 푸른빛을 들춰냈다. 그곳에는 뼈와 깃털로 만든 장신구를 온몸에 두른 리자드맨 하나가 푸른빛이 맺힌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 “주술사가 있어!” ​ 주술사. 굳이 비교하자면 리자드맨 마법사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웠다. 주술사가 있다는 건…. ​ 이 폭우도 놈들의 주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자드맨은 물과 밀접한 종족이었고, 놈들이 사용하는 주술도 대부분 물과 관련돼 있었으니까. ​ 젠장…! 만약 루크레치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의 빙결 능력이 아주 유용했을 것이다. 리자드맨들의 능력과는 극상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 “카엘군!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 쩌저저적! ​ 금이 간 부분이 점차 커지면서 보호막의 외곽에 균열이 생기자 보호막에 밀려났던 놈들이 균열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 “카엘군! 더 몰려오기 전에 도망쳐야 해!” “어디로?!” “일단은 벗어나고 생각하자!! 단순한 습격이 아니야!” ​ 당장 뾰족한 수도 없었고 그녀의 판단력이 나보다 뛰어났으니 믿고 따르기로 했다. ​ “알겠어!” “응! 그럼 길을 열게! 이리 와!” ​ 엘레노아의 몸에서 폭포수처럼 마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마력은 가느다란 실처럼 변하며 그녀의 몸 주위를 빙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 마력의 파동이 워낙 강해 리자드맨들의 움직임마저 잠시 멈췄다. 그때 어둠 속에서 거친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술사가 푸른빛을 내뿜는 지팡이를 엘레노아에게 겨누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 “Khrâg! Zarkhâsh-nar! Sserakh!” ​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명령이라도 내린 것인지 놈의 외침과 동시에 리자드맨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보호막에 생긴 균열은 빠르게 벌어졌고 몇몇 리자드맨이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검을 움켜쥐고 놈들을 향해 달려들며 미래시를 발동했다. 수많은 리자드맨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미래가 잔상처럼 겹쳐 보였다. ​ 복잡하게 뒤엉킨 움직임 속에서도 가장 선명한 궤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가장 먼저 틈을 비집고 들어온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서걱! ​ 리자드맨의 머리가 비스듬히 잘려 나가 진흙탕 위로 떨어졌다. ​ 콰직! ​ 바로 뒤따르던 놈이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짓밟아 으깨며 달려들었다. 동족의 죽음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 깡! ​ 놈이 내리친 칼날을 검으로 받아내자 손목을 타고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 깡! ​ 다시 한번 검을 맞부딪쳤다. 마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 덕분에 이번에는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의 반동으로 서로의 자세가 흐트러진 찰나, 강화된 육체로 반동을 억지로 눌러낸 뒤 드러난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 푹! ​ 놈의 아래턱을 뚫고 머리를 관통했다. ​ 쿵! ​ 검이 깊숙이 박히자 리자드맨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놈이 힘없이 쓰러지자 머리에 박힌 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그 너머에서 달려들던 놈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춤하며 진격을 멈췄다. ​ 쿵! 쿵! ​ 그때 놈들 사이가 갈라지더니, 다른 리자드맨들보다 몸집이 절반은 더 큰 녀석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놈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리는 듯했다. 거기다가 사람의 몸통만 한 거대한 칼을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놈은 잠시 멈춰 서서 세로로 찢어진 노란 동공을 번뜩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거칠게 내질렀다. ​ “Krâgh! Zhar’kash var!” ​ 마치 자신이 우리를 끝장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리자드맨들도 놈의 외침에 환호하듯 검을 들어 올렸다. 곧 덩치 큰 놈이 지축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 후우웅!! ​ 거대한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대로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 스으으윽…. 쿵! ​ 놈은 달려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몇 걸음을 더 내디뎠다. 그제야 상체가 비스듬히 갈라지며 거대한 몸이 빗물 고인 진흙 위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몸이 빗물 고인 진흙 위로 무너져 내렸다. 1 대 다수라면 조금 불리했지만, 이런 1 대 1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 “와라!” ​ 검 끝을 놈들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 리자드맨들의 전의가 한풀 꺾이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전의를 불태우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 “카엘군. 엎드려!” ​ 그때 엘레노아의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몸을 낮췄다. ​ 그 순간 엘레노아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마력의 실들이 움직였다. 그녀의 허리 높이에서 여러 개의 고리를 이루던 마력의 실들이 순식간에 고리의 지름을 넓히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 “Vhârk?!” ​ 뒤늦게 위험을 알아챈 리자드맨들이 황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수백 마리가 한곳에 빽빽하게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놈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뒤엉켰고 그 사이를 마력의 실이 가로질렀다. ​ 서걱! ​ 가장 앞줄에 서 있던 리자드맨들의 목과 허리가 일제히 갈라졌다. 잘려 나간 머리와 팔다리가 진흙으로 떨어졌고, 뒤늦게 터져 나온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쏟아지는 폭우가 피와 섞여 주위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 엘레노아가 만들어 낸 마력의 실은 멈추지 않고, 금이 간 채 남아 있던 보호막마저 갈라 버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고작해야 몇 번의 호흡 만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리자드맨 무리는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무너져 내렸다. ​ 빗물과 피가 뒤섞인 진흙 위로 수백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 멀리 마력의 실이 닿지 않은 곳에 있던 놈들만 살아남았다. 그들마저도 눈앞에서 벌어진 학살에 전의를 잃은 듯 무기를 늘어뜨린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 “지금이야, 카엘군!” ​ 엘레노아가 비틀거리며 외쳤고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엘레노아의 허리 뒤와 무릎 아래로 각각 팔을 넣어 들어 올린 뒤, 리자드맨들의 포위가 무너진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 “Kharssak! Vezh’nar! Ssa’kor!” ​ 저 멀리서 주술사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전의를 상실했던 리자드맨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고,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엘레노아가 내 목을 한 팔로 감싼 채 다른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자그마한 마력 구체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곤 리자드맨들을 향해 쏘아졌다. ​ 퍽! ​ 왼쪽에서 달려들던 리자드맨의 머리가 구체에 맞아 그대로 터져 버렸다. 곧이어 다른 구체가 뒤쪽에서 뛰어오른 놈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나무에 처박혔다. ​ “카엘군! 멈추지 마!!” ​ 엘레노아는 내 품에 안긴 채 계속해서 마력 구체를 만들어 우리 주위를 공전시켰다. 구체들은 떠오르는 족족 엘레노아의 별도 지시 없이 리자드맨들의 머리통을 꿰뚫으며 우리를 지켜 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엘레노아를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을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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