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EP0075-0070화-도착
“로엔하임 영애.”
루크레치아는 자신을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또 누가 왔나요?”
관자놀이가 지끈거렸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이어진 면담과 서류 검토 탓에 머릿속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에 잠시나마 쉬고 싶었다.
서류 검토보다 검을 휘두르는 게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다고 가문의 재건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손을 놓으면 이제 막 되찾기 시작한 것들을 다시 잃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다가…….
‘카엘.’
만약 여기서 이 모든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카엘의 곁을 떠나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선택마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루크레치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며 물었다.
“이번엔 누구죠?”
“디트리히 폰 로엔하임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로엔하임의 먼 방계에 속한 남자였다.
가문이 몰락한 뒤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복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친족임을 내세우며 접근해 온 자이기도 했다.
원래는 들어 본 기억도 없는 성을 쓰던 작자였으나, 로엔하임이 복권되자 그새 성을 바꿨다지….
루크레치아는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소문으로 듣건대, 그가 내뱉은 말은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망언이었다.
그런 자를 지금 이곳에서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만나기 어렵다고 전해 주세요.”
루크레치아가 거절의 뜻을 밝히려던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먼저 열렸다.
“섭섭하군. 오랜만에 찾아온 사촌을 문전박대하려는 건가?”
시종이 당황해 뒤를 돌아봤지만, 남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루크레치아는 손짓으로 시종을 내보내야만 했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루크레치아에게 다가왔다.
“언제 봐도 아름다워. 사촌.”
자신과 똑같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러나 카엘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달리 능글맞게 웃는 얼굴은 보기만 해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더욱 가관인 것은 옷차림이었다.
북부 출신임을 과시하려는 듯 두꺼운 털가죽을 덕지덕지 두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정작 북부도 아닌 제도 한복판에서 그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여긴 무슨 일이죠. 라벤하임 경?”
로엔하임을 버리고 스스로 택했던 성을 다시 입에 올리자 디트리히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금세 능글맞은 미소를 되찾으며 루크레치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성은 이제 버렸어. 나는 다시 로엔하임이야.”
“참 쉽게 성을 바꾸는군요.”
“내 혈통이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 사촌.”
디트리히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양팔을 벌렸다.
“로엔하임이 다시 일어서려는 이때, 나 역시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 사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곧이어 루크레치아의 손을 제멋대로 붙잡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루크레치아는 단칼에 손을 빼냈다.
“함부로 만지지 마.”
서늘한 경고에도 디트리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고작 이런 예법에도 그렇게 민감하게 굴 필요가 있나?”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혹시 소문으로만 듣던 그 평민 연인 때문이야?”
디트리히가 다시 한 걸음 가까워졌다.
털가죽에 잔뜩 밴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미 피로로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욱 무겁게 울렸다.
“나는 얼마든지 이해해.”
그는 너그러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젊을 때 그런 애인 하나쯤 두는 건 귀족이라면 흔한 일이니까. 잠시 즐기는 상대가 평민이라고 해서 누가 나무라겠어?”
“그게 무슨…….”
루크레치아가 반박하려 했지만,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에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디트리히가 그녀의 옆을 지나 뒤로 돌아갔다.
이윽고 두 손이 루크레치아의 어깨 위에 얹혔다.
“하지만 로엔하임이 다시 북부의 지배자가 되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손가락이 천천히 어깨를 주물렀다.
“가문을 지탱할 혈통이 튼튼해야 해. 그 피를 가장 온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 누구와 결합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야.”
루크레치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역겨운…. 흣…!”
말을 잇던 루크레치아의 몸이 순간 굳었다.
갑자기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몸의 변화에 루크레치아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어깨 위에 얹힌 디트리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손끝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디트리히의 손은 어깨를 넘어 셔츠 안쪽으로 뻗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너무 오랫동안 앉아만 있으니까 잔뜩 뭉쳤는걸…?”
“그마안…. 그으흣….”
어느새 그는 루크레치아의 셔츠를 벗겨 가슴을 밖으로 꺼내 버렸다.
땀과 체온으로 달아오른 유두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자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사촌의 여기가 이렇게 커진 걸 보니….”
꽈아아악!
“흐오옥❤️! 그망…❤️! 학❤️!”
“사촌의 이 딱딱해진 유두는 나를 원하는 것 같은데?”
거칠게 유두와 가슴을 쥐어짜자, 루크레치아는 전신을 강타하는 강렬한 쾌락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사촌?”
“하아…. 하아….”
“사촌?”
“아…?”
루크레치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디트리히가 자신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방금 전의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네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평소처럼 단호하게 나오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죠.”
디트리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는 조금 더 편안한 자리에서 이야기하자고, 사촌.”
그는 끝까지 친근한 척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나갔다.
시종들까지 문밖으로 물러나고, 방 안에는 루크레치아 혼자 남았다.
“…….”
루크레치아는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엘….”
루크레치아는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연인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엔 묘한 행복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하복부를 자극하는 열기 또한 피어올랐다.
“이게 그 저주…….”
그 녹색 머리의 마법사가 이야기했던 옛 신의 저주….
그것이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태자와의 관계부터, 지금의 상황까지….
“카엘……. 빨리 돌아와줘요.”
루크레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가고 있을 자신의 연인을 떠올리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찌…걱! 찌…걱!
고요했던 방에 질척이는 물소리가 한동안 희미하게 들려왔다.
* * *
“하아…. 하아….”
“엘레노아. 괜찮아?”
“으응…. 아직은.”
엘레노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그녀를 기다렸다.
폭우 속에서 리자드맨들의 포위를 뚫고 한동안 도망쳤지만 쉽게 놈들을 떨쳐낼 순 없었다.
많은 수의 리자드맨이 엘레노아의 공격에 쓰러졌지만 어디선가 또 보충된 것인지, 악착같이 나타나 앞길을 막아섰다.
미래시를 상시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했을 만큼 은밀한 공격들이 이어졌다.
거센 비바람까지 정면에서 몰아쳐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데, 놈들은 아까 엘레노아에게 학살당한 걸 잊지 않았는지 소수만 차례로 내보냈다.
차라리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면 엘레노아가 처리했겠지만 적들이 영리하게 움직였다.
자연스레 육체 강화가 불가능한 엘레노아는 계속 위험에 노출됐고, 그만큼 정신력도 급속도로 깎여 나갔다..
피해는 빗물에 옷이 젖어들듯 조금씩 누적됐다.
언제 생긴 것인지 모를 상처가 팔과 어깨에 늘어났고, 입고 있던 제복은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깊은 상처 없이 살갗과 옷만 헤진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카엘군. 빗줄기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세상을 모두 쓸어 버릴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비가 잦아드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주술사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던 기척들이 사라진 걸 보면 조금 희망적이었다.
나는 조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엘레노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중반부터는 그녀를 안고 싸울 수가 없어서 도중에 내려놓고 함께 뛰었는데, 그녀의 몸으론 처절한 강행군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엘레노아가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고,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보였다.
“잠깐 쉬었다 가자.”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안 괜찮아 보여. 그리고 애초에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움직이고 있잖아.”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빗물이 덜 닿는 공간이 보였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뒤, 몸에 걸치고 있던 찢어진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여기 앉아.”
엘레노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 위에 몸을 내렸다.
“고마워, 카엘군.”
“발 줘.”
나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벗기고 작고 연약한 발을 주물렀다.
평소라면 부끄러워하거나 장난쳤겠지만 그런 기력조차 없는지 그녀는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빗소리가 잦아든 숲은 조금 전과 달리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스산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바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이 근방에 리자드맨이 이렇게 많았어?”
“…….”
엘레노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엘레노아. 우리가 죽인 리자드맨이 천 명은 넘을 거야. 이 정도면 리자드맨 부락 두어 개를 한꺼번에 처리한 수준이야.”
“……하아. 모르겠어.”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테른 공국은 제국과 달리 영토 내의 이종족들을 모두 학살하지 않았으니까. 마물이면 모를까 괜히 긁어 부스름을 만들 이유가 없거든.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이니까 그정도의 리자드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아. 다만….”
“다만?”
“일단은 왜 우리부터 습격했는지가 의문이야. 단순히 도적이라고 보기엔 말이 안 돼. 우린 고작 마차 한 대를 타고 가고 있었어. 그걸 습격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원이 있다는 건…….”
엘레노아는 최악의 가정을 했다.
“우리가, 정확히는 제국 기사들이 탄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제국 기사.
제국의 창과 방패.
단신으로 마을 하나, 부족 하나를 절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강자.
이종족들이 제국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든 힘….
제국 기사를 물리치기 위해 한 부락 전체가 나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었다.
“그것도 놈들이 그만한 규모로 몰려온 이유를 설명할 뿐, 제국 기사 둘이 탄 마차를 습격한 목적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해.”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개야. 이대로 모두 잊어버리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발테른으로 가서 마차를 준비해준 옛 가신들을 추궁하거나….”
그녀의 얼굴을 보건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지?”
엘레노아는 지친 얼굴로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 뭐가 됐든 발테른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 질긴 연을 끊고 싶으니까….”
“그럼 조금만 쉬었다가 계속 가자.”
나는 그녀의 신발을 다시 신겨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비와 진흙에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옛 발테른 공국의 수도 발테리아를 둘러싼 성벽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