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P0073-0068화-옛 발테른으로
이른 아침부터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따악! 따악!
눈을 부릅뜨고 검의 궤적을 최대한 따라갔다.
미래시 한 번이면 저 궤적을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대련’ 시간이었기에 오롯이 내 눈과 감각만으로 루크레치아의 검을 따라가야 했다.
후웅!
나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검을 비껴내며 루크레치아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곧바로 허리를 노려 목검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을 틀어 공격을 흘려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손목을 때렸다.
손아귀에서 목검이 튕겨 나갔다.
바닥을 구른 목검이 몇 차례 회전하다가 멈췄고 루크레치아의 검 끝은 어느새 내 목 앞에 닿아 있었다.
“제가 이겼네요.”
“……그러네.”
루크레치아가 목검을 거두었다.
나는 얼얼한 손목을 문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나름대로 기습할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처음부터 전부 읽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많이 늘었어요.”
“그래 봐야 루크레치아한테는 상대도 안 되잖아.”
“전보다 훨씬 오래 버텼잖아요.”
“결국 진 건 똑같지.”
나도 모르게 자책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루크레치아와 검을 맞대면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실전이라면 미래시나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능력을 쓰지 않고 대련하는 건 지난번 광신도와의 전투에서 잠시나마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던 일을 겪고 난 뒤 그녀가 제안한 훈련이었다.
혹시라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무기력하게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어릴 땐 평범한 농가의 자식이었고, 검술이라곤 아카데미에 들어가 배운 게 전부였다.
그마저 대부분 마력을 활용한 것이었기에 순수하게 검을 다루는 방법은 잘 몰랐다.
그에 비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옛 기사들에게 직접 검을 배웠기에 기본기부터 차이가 느껴졌다.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졌다는 사실에 한동안 시무룩하고 있으니 루크레치아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카엘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제게 큰 힘이 돼요.”
“…….”
그건 위로가 맞는 걸까….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처럼 곁에만 있으면 된다는 취급은 사양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녀의 옆에 설 때는 보호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히…….
그녀에게 힘도, 권력도, 가문의 재건도 모두 안겨 줄 수 있는 다른 ‘남자’와 비교하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우는 것뿐이다.
그래도 지금 루크레치아의 말을 반박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연무장 한쪽에 놓인 의자로 향했다.
루크레치아는 미리 준비해 둔 천으로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아직 아침인데도 금발 사이와 이마에는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나 역시 옆에 앉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로엔하임의 재건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루크레치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직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잘 진행되는 것 같아?”
“그게…….”
그녀가 말을 흐렸다.
나도 가끔 루크레치아를 따라 귀족들과 만나는 자리에 참석했다.
하지만 평민으로 살아온 내가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표면적으로는 웃으며 도움을 약속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대가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자가 며칠 뒤에는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옆에서 듣고 있어도 일이 잘 풀리는 건지, 오히려 더욱 꼬이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루크레치아는 손에 든 천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제가 어렸을 때 알던 북부와는 너무 많이 달라졌거든요. 로엔하임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편해요. 적어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호의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더 불편해?”
“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다가오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네요.”
그녀의 시선이 연무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일은 검으로 적을 베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루크레치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싸움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잘할 거야.”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셋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게 루크레치아잖아. 내가 없어도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을 것 같고.”
말을 끝낸 뒤에야 마지막 부분이 조금 이상했다는 걸 깨달았다.
루크레치아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카엘.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역시 눈치가 빨랐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엘레노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연회장에서 발테른의 옛 가신 중 한 사람이 엘레노아에게 접근했던 일과 로엔덤의 폭거, 엘렌브룩의 주민들이 탄압받고 있다는 소식까지 차례로 설명했다.
그리고 엘레노아가 공국 부활 제안을 거절했지만, 적어도 다른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옛 발테른의 땅으로 가서 직접 그들과 대화하려 한다는 것도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로엔덤 후작가는 황제의 몇 안 되는 확실한 충성파예요.”
“알고 있어.”
발테른을 배신하고 제국에 붙은 대가로 지금의 지위를 얻은 가문이었다.
황제가 그런 로엔덤을 쉽게 내칠 리 없었다.
“엘레노아도 굳이 그들과 싸우려는 건 아니야. 일단 옛 가신들을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두 분이서 가실 생각인가요?”
“응.”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을 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수도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그토록 기다렸던 가문의 복권이잖아. 되찾을 수 있는 게 있다면 하나라도 더 되찾아야지.”
발테른의 영토는 수도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그곳까지 내려가 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동안 루크레치아가 자리를 비우면 이제 막 시작된 로엔하임의 재건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상황만 살펴보고 올 테니까.”
루크레치아는 아무 말 없이 무릎 위에 놓인 천을 다시 움켜쥐었다.
땀에 젖은 천이 그녀의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대신 두 사람 모두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걱정하지 마.”
나는 손을 뻗어 루크레치아의 뺨에 얹었다.
대련으로 달아오른 피부에서 따스한 열기가 느껴졌다.
“금방 다녀올게. 루크레치아가 외로울 틈도 없도록.”
“카엘…….”
루크레치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뺨에 닿은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한동안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내 손을 힘껏 끌어당겼다.
몸이 앞으로 기울며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겼다.
루크레치아의 팔이 내 등을 단단히 감쌌다.
대련을 끝낸 직후라 몸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가까이에서 전해졌다.
“그냥 다 포기할까요?”
“……루크레치아?”
“카엘이 원한다면 그저 한 남자의…….”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로엔하임의 이름도, 북부의 땅도, 가문의 복권도 모두 내려놓겠다는 말이 진심인지 순간적인 흔들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루크레치아가 나 때문에 포기하는 걸 원하지 않아.”
내가 등을 천천히 쓸어 주자 그녀의 팔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루크레치아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잖아. 나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네.”
루크레치아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안고 있었다.
먼저 팔을 풀어낸 것은 나였다.
“오후에는 엘레노아와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루크레치아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후에는 약속이…… 있네요.”
“약속?”
루크레치아는 대답 대신 손에 쥔 천을 다시 접었다.
“다녀오시면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챙겼다.
나 역시 바닥에 놓아 둔 검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연무장을 빠져나와 마주친 갈림길에서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각자 가야 할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길을 걷다가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황제 폐하가 로엔하임을 위해 마련해 준 건물답게 목욕 시설도 딸려 있었다.
땀을 잔뜩 흘린 그녀라면 먼저 씻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욕실의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며 루크레치아를 불렀다.
“루크레치아! 루크레……치아?”
“하아. 하으읏. 카엘…. 벌써 왔나요?”
“…….”
철퍽! 철퍽!
“하윽….”
욕실 안에는 분명히 루크레치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 혼자는 아니었다.
알몸으로 다리를 벌린 채 다른 사람 위에 앉아 있는 루크레치아는 굵은 자지를 연신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악…! 카엘…. 당신이 없는 동안 내 옆을 지켜줄 사람이에요. 훨씬 강하고 저를 지켜줄 수 있고 제 가문을 재건 해줄 수 있는 남자랍니다.”
“우웁….”
속이 메슥거렸다.
“그리고…. 당신의 자지보다 더 커요…. 제 안에서…. 당신이 닿지 못했던 곳까지 닿아요.”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힘없이 열리던 그녀의 음부가….
내 체온과는 다른…, 무언가에 뜨겁게 달궈졌던 그녀의 음부….
“하읍….”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 사이로 분홍빛 혀가 얽혔다.
“츄읍! 카엘. 저는 혼자서도 괜찮…. 하윽…! 괜찮으니 엘레노아와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앙!”
찰싹!
남자가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세차게 때리자 살덩이가 출렁이며 흔들렸다.
그 모습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잔뜩 흥분한 탓인지 유두는 이미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끼이이익! 쿵!
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러나 얇은 나무 문 너머의 욕실에서의 소음은 문을 뚫고 울려 퍼진다.
철퍽! 철퍽!
“더! 더 박아주세요! 전하! 음란한 북부 창녀의 보지를 쑤셔주세요호오옥! 으오옥!”
천박하게 가버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하응! 죠오아! 젖꼭지도! 젖꼭지도 짓눌러주세효오오옥❤️! 흐윽❤️! 하윽❤️!! 하으응❤️!”
귓가에…….
“온다…❤️! 온다아앗…❤️! 하으으읏❤️…. 하으으윽❤️!! 하으…❤️! 흣❤️?! 호오오옥❤️!”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카엘군?!”
“……어?”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문은 사라지고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엘레노아가 보였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자는데 땀을 잔뜩 흘렸어. 마차가 불편해서 그런 거야?”
“아…. 아니야. 그냥 잠깐…….”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댔다.
엘레노아는 약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둘 다 말이 없어지자 마차 안은 고요해졌다.
들리는 것은 지붕과 창문을 연신 두드리는 빗소리뿐이었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잿빛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굵은 빗방울이 유리를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나는 엘레노아와 옛 발테른의 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발테른의 옛 가신들이 마련해 준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마차에 오른 뒤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엘레노아와 마주 앉아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
루크레치아….
그녀를 떠올리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제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몇 번이고 서로의 마음을 재확인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마음을 뒤흔든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리 없다.
……믿는다.
지금은 제도에서 자신의 일을 잘 해결해 나가고 있을 루크레치아보다 엘레노아와 함께 앞으로 닥칠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만 마차에 탄 뒤 조용해진 그녀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한동안 창밖만 바라보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발테른 서부는 원래 비가 많이 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며칠씩 그치지 않을 때도 있거든.”
엘레노아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의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
“그래서 수도는 늘 우중충했어. 하늘은 어둡고 길은 금방 질척해지고 흙탕물이 됐지.”
그녀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듯 작게 웃었다.
“특히 골목은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데 비까지 오면 더 어둡고 위험했어. 그래서 쉽게 왕성 밖으로 나가 놀 수 없었어. 비보다는 그게 더 싫었어.”
엘레노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꼬며 말을 이어갔다.
“하루 종일 창문 너머만 보고 있었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멀리 이어진 길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런지 동부에 있는 엘렌브룩에 가는 걸 좋아했어.”
“거긴 어땠는데?”
“수도보다 훨씬 따뜻하고 맑았어. 밖에 나가면 흙길도 숲도 전부 밝았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었지.”
엘레노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도에서는 비가 그치기만 기다렸는데, 엘렌브룩에서는 비조차 즐거웠어.”
“…….”
문득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고향이 떠올랐다.
끝없이 이어진 언덕과 들판, 그 위에서 양 떼를 몰던 양치기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황금빛으로 물들던 밀밭.
풍경만 놓고 본다면 엘레노아가 말한 엘렌브룩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목가적인 마을이겠지.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보낸 삶은 그녀의 추억과는 전혀 달랐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야 했고 비가 내려도 밭으로 나가야 했다.
수확이 좋으면 겨우 겨울을 버틸 수 있었고 흉년이 들면 가족 중 누가 끼니를 줄여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엘레노아에게 시골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었지만 내게는 살아남기 위해 하루를 견뎌야 했던 곳이었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서 있던 자리가 달랐기 때문이겠지.
같은 풍경을 보고도 전혀 다른 기억을 떠올리는 만큼, 어쩌면 우리는 평생 완전히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추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푸르륵!
덜컹거리며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말이 거칠게 울어 대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진흙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기사님들!”
굵은 빗소리 사이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비바람이 예상보다 훨씬 거셉니다! 제국대로를 벗어난 뒤로 길도 험해서 이대로는 더 나아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아까보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는지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밖의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근방에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습니까?”
“조금 돌아가면 작은 역참이 하나 있습니다! 기사님들이 머무르기엔 조금 부족한 곳이긴 하지만….”
마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비바람이 잦아들 때까지만 그곳에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상태로 무리해서 길을 나아갔다가는 마차가 진흙에 완전히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제국 기사가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허허벌판을 걸어서 가로지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하죠.”
“알겠습니다.”
마부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 잠시 멈춰 있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역참으로 가는 길은 이미 진흙탕이 돼 버린 모양인지, 마차는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심하게 덜컹거렸다.
“길이 많이 험한가 봐.”
한참을 그렇게 덜컹거리며 이동하다가 갑자기 마차가 이전보다 훨씬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체 전체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히이이잉!
그때 앞쪽에서 말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졌다.
“워어! 멈춰!”
마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마차가 크게 기울었다.
콰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 몸이 좌석에서 붕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