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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06화 - 훔쳐보기 구멍 [1]


오전 9시 23분. ‘앗! 또 늦잠...’ 내가 눈을 떴을 때, 4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 작은 방엔 아무도 없었다. “좀 깨워주지.” 내 이름은 윤대영. 경남 통영에서 상경한 H 미술대학의 신입생이다. 늦잠을 잔 나는 전날 벗어둔 셔츠와 바지를 입으며 시간 계산을 한다. ‘대충 씻으면 9시 28분, 교문에서 실기실까지는 8분 거리, 지름길을 이용하면 5분. 뛰어가면 9시 30분까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으면 출석 체크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허겁지겁 기숙사를 뛰쳐나와 여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열대 계단을 뛰어올랐다. 뻐근해진 다리를 끌고 ‘헉헉’거리며 학관에 다다랐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영아!” “엇, 누나.” “아침부터 왜 힘을 빼고있니?” 깜짝 놀랐다. 4학년 혜영 누나. “지각이예요. 늦잠을 자서...” “아이고오~ 인석아...” 선후배의 서열문화가 엄격한 우리 과에서 4학년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신입생 환영회 때 누나의 흑기사로 나선 덕분에 조금 친분이 있지만,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나는 약간의 두근거림과 묘한 설렘을 느꼈다. “학식 먹으려고 올라왔는데, 같이 먹을래?” “네? 저 늦었는데.” “따라와.” 하늘도 파랗고 선선한 바람까지... 기가 막힌 봄 날씨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누나를 따라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누나에게 식권을 받아 배식대에서 잔치국수를 기다렸다. 이내 뜨끈한 멸치육수에 담긴 국수가 나왔다. 800원짜리 식사치곤 근사한 냄새다.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누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의자를 끌며 자리에 앉았다. “아침인데 국수로 되겠어?” “저 국수 좋아해요.” “이것도 먹어.” 누나가 홍옥 한 개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대영인 인사성이 밝네. 집이 마산이라고?” 비슷하게나마 나란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뇨, 마산 근처. 충무.” “아~ 맞다 충무.... 오빠 고향이랑 헷갈렸네. 새내기 생활은 어때?” 오빠? 아마도 남자친구인가보다. “아직은 정신없어요.” “그런데 벌써 전공 수업 빼먹어? 교수님께 미운털 박혀.” “네. 죄송합니다.” 눈을 살짝 흘기는 선배의 표정이 귀여웠다. 4학년이라곤 하지만 나와는 겨우 3살 차이,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신입생이면 술 사주는 선배가 많을 거야. 그래도 항상 지나치지 않게.... 알지? 내 말뜻.” “네. 감사합니다.” “몸 챙기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러고 보니 화장기 없는 얼굴. 실기실에서 밤이라도 샌 건지, 눈가엔 잔주름이 보였고 부스스한 머리도 며칠은 못 감은 것 같다. 작업복 위로 대충 걸친 항공 점퍼 역시 흙과 기름때로 얼룩져있었다. 최소한 교내에선 외모에 신경 쓰는 타입의 여자는 아닌 것 같다. “하긴, 이제 막 대학교 들어왔는데, 실컷 놀아야지. 얼마나 그러고 싶었겠어. 안 그래?” “네. 맞습니다.” “지금 인체 드로잉 수업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그 교수님 출석 엄청나게 따져.” “아. 그런가요?” “들어가면 꼭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그리고 수업 들어오는 분들은 무조건 교수님이야. 호칭 조심하고.” “네, 감사합니다.” 연상녀에 대한 막연한 환상 때문일까? 신입생 환영회 이후 몇 번인가 혜영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가 상당한 미녀에 마른 글래머란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오버사이즈의 작업복도 그녀의 몸매를 감출 순 없어서 얇고 하얀 발목과 손목에서 몸 전체의 농염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지금도 테이블 주변에서, 선배를 힐끗거리는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윤대영?” “네?, 네!” 내가 잠시 넋을 잃고 있었나 보다. “너 왜 대답이 없어? 올 수 있냐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누나가 수상하다는 듯 흘기며 쳐다본다. 그러나 어린 남동생을 대하듯 귀여워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 실기실로 4시까지 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다른 일로 집합시키면 내 이름 대고 빠져나오면 돼. 내가 조교 언니한테 말해놓을게. 알지? 남희 언니.” “네. 알겠습니다. 4시까지.” * * * 실기실은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빼곡히 펼쳐진 이젤 사이로 누드모델들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가운을 걸친 채 총총걸음으로 나가는 걸 보면, 마침 쉬는 시간인가보다. “교수님,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름은?” “윤대영입니다.” “오케이~ 담부턴 지각 처리할 거니까, 늦지 마라.”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출석 처리되었다. 옆자리를 쓰는 세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늦었냐? 젤 가까이 사는 녀석이.” “어~ 늦잠.” “수업 끝나고 준열 형 작업실 갈래?” “왜?” “왜는 무슨, 일 도와달란 거지.” “난 혜영 선배 작업실 가야 하는데?” “혜영 누나?” “졸전 준비 돕기로 했어.” “진짜?” 잠깐이지만, 녀석의 표정에서 부러움이 스쳤다. “너희들 또 여자 얘기냐?” 옆자리에 있던 진영 누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둘은 엠티사건을 계기로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주고받는 눈빛을 보면 꽤 깊은 사이처럼 보인다. “크크, 누나 아니에요.” “아니긴 뻔하지.” “누나, 집착 좀 하지 마.” “흙으로 맞아볼래?” 둘 다 예전의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을 되찾았다. 어딘지 모르게 남매 같은 커플이었다. * * * “선배님, 저 왔습니다.” “그래 우리 대영이. 어서 와. 바쁜데 부른 건 아니지?” 우리 대영이. 참 듣기 좋은 말이다. “이것부터 입어. 내가 입던 건데 빨아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누나는 깨끗이 세탁된 앞치마를 건넨다. 희미하게나마 누나의 체취가 남아있는 것 같다. “선배 말고, 누나라고 불러 얘.” “네, 알겠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잖아.” “네. 누나.” 누나는 인체 군상을 만드는 흙 작업을 하고 있었다. 등신상 비율이라 누가 봐도 혼자 끝내기 어려운 대형 사이즈였다. 나는 흙이 굳지 않도록 가끔 물을 뿌려주거나, 공장에서 나온 찰흙을 바로 쓰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허드렛일을 맡았다. 이런 작업보조를 우리는 ‘시다’라고 불렀다. “대영~ 테이프 다 돌아갔다.” 테이프를 갈거나 음악 선곡도 내가 할 일이었다. 난 흙 묻은 손을 닦으며 카세트 플레이어로 다가갔다. “ 지겨우면 로 바꿔.” “네. 알겠습니다.” 누나는 심봉에 흙을 붙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경쾌하면서 조곤조곤한 누나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 반나절뿐이지만 나는 누나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석고 뜨는데, 그때도 도와줄 수 있니?” “네. 와야죠. 알바 끝나자마자 바로 올게요.” “알바 언제인데?” “수, 목이요.” “고마워~ 그런데 알바는 어디? 학교 근처?” “아뇨. E 여대 앞.” “거기 조소하는 학원이 있었나?” “아뇨, 전 수채화 가르쳐요.” “우와~ 대영이 재주가 많구나.” “새끼 강사라 딱히 할 일은 없어요, 입시반도 아니고.” 사실 통영 미술학원 선생님의 소개로 들어간 학원이다. 이제 막 지방에서 올라온 신입생에겐 감지덕지한 아르바이트였다. “석고 뜰 땐 다른 남자 선배도 와서 도와줄 테니, 너도 배울 게 많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혜영 누나의 실기실은 7~8명이 함께 쓰는 공간이지만, 오늘은 종일 누나와 나뿐이었다. 4학년쯤 되니 외부에 작업실을 가진 선배도 있었고, 철조실이나 석조실 등의 공간에서 작업하는 선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린 단둘이 식사를 했고, 쉬는 시간엔 내가 커피를 탔다. 누나에게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머, 벌써 10시네. 오늘은 이만 끝내자.” “네, 정리할게요.” 난 아쉬운 마음으로 흙통과 헤라를 정리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나는 기숙사 방향이 아닌 정문을 통해 교문 밖으로 나왔다. 다음날 사용할 수업준비물을 사기 위해 학교 앞 화방에 들렀고, 나온 김에 3명의 룸메와 나눠 먹을 맛탕과 만두를 조금 포장했다. 기숙사는 남문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교정을 관통해야 했고, 먼 거리지만 혜영 누나의 실기실이 보이는 도로를 지났다. 그런데 누나의 실기실 창가에 호박색 불빛이 일렁인다. 처음엔 주변에서 반사된 네온사인이라 생각했지만, 작게 출렁거리던 빛은 다가갈수록 밝아졌고, 각도를 달리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실내에서 나온 조명이 확실했다. ‘누나가 향초를 켜두고 퇴실했나?’ 실기실과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고 나도 모르게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려 애를 썼다. 학생들의 발길이 끊긴 시간이었고, 실기실은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있었다. ‘후아. 어쩌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분 나쁜 상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었고, 내가 느낀 인기척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실기실의 창문은 안이 보이지 않는 간유리. 나는 낮에 발견한 구멍이 갑자기 생각났다. 흙 통을 옮길 때 발견한 벽 뒤의 공간을 기억해낸 것이다. 가스통을 보관하는 창고와 연결된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실기실 뒤 풀숲으로 들어가자, 삐딱해진 힌지 때문에 반쯤 열린 창고의 철문이 보인다. [위험! 고압가스!] 짐을 싣고 드나들던 트럭이 낸 상처로 표지판은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 내부로 숨어든다. 빼곡한 가스통 사이로 보이는 작은 구멍에 눈을 가져갔다. 실기실 내부의 조명은 어두웠지만, 빛이 닿는 부분을 천천히 눈으로 짚어갔다. ‘쉬이익-’ 압축가스가 좁은 틈을 통과하며 기화되는 소리. 일렁이는 불빛의 정체는 가스등이었다. 시력은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져 간다. 시간이 지나자 희미한 실내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무릎이 아팠다. 산소통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몸을 숙인 구부정한 자세가 불편했다. 움직일 때마다 가스통이 조금씩 흔들린다.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 벽을 짚었던 손에 힘을 준다. ‘찾았다!’ 실기실 끝에 놓인 소파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소파와는 10미터 이상 제법 거리가 있었고,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위치였다. 소파의 등받이 위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기척의 주인공은 키가 큰 남자였다. 가스등은 어두웠고 불규칙한 패턴으로 일렁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또 한 명의 등장인물. 소파 밑에서 올라온 여자의 머리였다. 풀어헤친 뒷모습으론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뭔가 말을 하지만, 웅얼거리는 목소리 탓인지 들리지 않았다. 가스등의 소리가 너무 컸다. 여자가 팔을 뒤로 젖혀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자, 남자는 여자를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게 하더니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리고 여자의 다리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자는 머리를 흔들며 몸을 뒤로 젖히더니 흐느끼는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혜영 누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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