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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26. 라그놀 부락 (6)


일단 물러나자는 생각에 백구를 돌아보았다. 백구는 라그놀 무리가 부모의 원수인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짓지 않고 강호의 옆에 엎드리고 앉아 전방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백구가 기특해서 잠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라그놀의 동굴을 찾아 접근하기 전에 드론으로 주변의 지형을 살피면서 밤을 샐 곳 역시 미리 봐두었다. 조심스럽게 이동하여 미리 봐둔 장소로 이동한 강호가 재빨리 텐트를 펼치고는 재와 계피 그리고 생강을 섞어 만든 가루를 텐트 주변에 가득 뿌렸다. 인터넷을 통해 배운 조합인데 숲에서 벌레를 막는데도 효과가 있지만, 인위적인 냄새를 숨기기에도 꽤 효과가 있어 자주 애용하는 중이었다. 비상식량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 한 후 침낭을 펴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라그놀 무리의 부락이 있다고 생각하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숲에서의 밤이라는 것은 의외로 사람을 두려움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은데,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나 바람에 나뭇잎들이 스치면서 내는 ‘스스스’ 하는 소리는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야생의 정글이다 보니 베이스캠프인 공터를 조금만 벗어나도 정체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들여오기도 한다. 그동안 꽤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고, 그런 소리에 한번 꽂혀 버리면 밤새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오늘은 특히 긴장을 한 상황이고 보니 작은 소리에도 벌써 몇 번이나 잠이 깨고는 했다. 바람이 불어 바닥에 흩어진 나뭇잎들이 굴러다니며 스치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고는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무언가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리로 들리는 까닭이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스스스스스!] 이번에도 떨어진 마른 이파리가 바람에 휩쓸리며 바닥을 스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들려오자 강호는 본능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야.’ 마치 치맛자락이 바닥에 쓰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의 털이 바닥을 쓸고 가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면 어떤 동물이 땅을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하다. ‘마치 뱀 같은 동물이 기어 다니는 소리 같아.’ 분명한 것은 자연적인 소리가 아니라 인위적인 소리라는 점이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다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백구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백구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백구도 텐트 밖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듯 어둠 속에서 털이 바짝 곤두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스스스! 스르르륵!] 텐트의 한쪽 부분이 움푹 눌리며 덩치가 큰 무언가가 지나간다. [까라라라라락!] 순간 텐트의 입구 근처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드리우더니 더듬이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과 함께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것 만으로도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게 만드는 소리. 마른 침을 삼킨 강호가 조심스럽게 미스릴 장검을 쥐어갔다. 어두운 밤에 생사를 건 전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빌어먹을! 강시연씨랑 이제 시작인데.’ 위험한 전투를 벌여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가족의 얼굴도 아니고 강시연의 얼굴이었다. 아니, 강시연과 섹스를 벌이던 그 순간의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괜히 넘어 온 건가 싶었다. 차라리 며칠 더 지구에 머물면서 강시연과 좋은 시간을 보내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생겨났다. 하지만 게란트에 넘어 온 이상 언제라도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법이다. 단지, 그 상황이 오늘일 뿐이다. 인생에 만약은 없는 법이고, 지금은 그저 살아남는데 신경을 집중해야 할 때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해 잔뜩 경계를 하며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다행이 그림자가 텐트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스스스스스!]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듯한 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강호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끼잉! 끼이잉!] 백구도 잔뜩 긴장을 했던 모양인지 귀가 아래로 푹 늘어지며 우는 소리를 했다. 그것만 보아도 텐트 밖의 무언가가 상당히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뭐였지?’ 얼핏 느낌에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동물이라고 여겨졌는데, 텐트에 비친 그림자는 마치 곤충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그 울음소리는 미믹이라는 제목의 오래전 공포 영화에 나오는 곤충 괴물의 소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발. 잠 다 잤네.’ 시계를 보니 이제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정말로 길고도 긴 밤이 될 것만 같다. ****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뭔가 얼굴을 스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백구가 옆에서 혀로 얼굴을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살피자 텐트 너머로 빛이 스며들고 있다. 천막을 뚫고 이 정도로 빛이 비추이고 있다는 것은 해가 꽤 높이 떴다는 의미다. ‘젠장!’ 어제 그 사건 때문에 잠을 설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생각보다 숙면을 취한 모양이다. 몸이 개운한 걸 보니 라그놀이 엎어 가도 모를 정도로 아주 깊이 푹 잔 게 분명하다. ‘조심은 개뿔이.’ 서둘러 침낭과 텐트를 정리한 후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백구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소고기 육포만 던져 주면 그저 충성이다. 배를 채우고 라그놀의 부락이 있는 곳으로 다시 접근을 시작했다. ‘근데 어제 그 놈은 대체 뭐지?’ 텐트 주위에는 딱히 놈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텐트에 비친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놈이 밤에 접근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다 보니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은신 버프를 믿고 어제보다 좀 더 가까이 접근을 해서 놈들의 부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멀리서 라그놀들이 괴성을 내지르는 게 들려오고 우왕좌왕 하며 사방을 뛰어다니는 놈도 있다. 그때 동굴의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무언가 큰 동물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로 라그놀의 시체들이 흩어져 있는 것도 보이는데 아마도 큰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른 망원경을 꺼내어 살피다 강호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거대한 짐승은 지네를 닮은 곤충형 괴물이었는데, 둥글게 몸을 말고 죽은 형태라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림잡아 몸의 길이만 대략 2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놈이었다. 게다가 몸통에는 수십 개의 발이 나있고, 머리라고 연상되는 곳에는 거대한 더듬이와 날카로운 이빨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놈이 온 몸에 조악한 나무창이 박힌 채로 죽어 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무창에 꿰뚫린 것을 보니 거대한 덩치에 비해 외피는 딱히 특별한 방어력을 지니진 못한 모양이다. ‘아니야. 외피가 아니라 관절부에 창이 박혀 있어.’ 자세히 보니 라그놀의 조악한 창들이 몸통과 몸통을 연결하는 마디에 모두 박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아 라그놀들이 놈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그 정도의 지능은 있다는 소리였다. ‘잠깐! 지네처럼 생겼는데 어제 그 놈일까?’ 지네의 특성상 바닥을 쓸 듯이 움직이는데다가 거의 소리조차 없는 놈들이다. 게다가 텐트에 비친 그림자에는 더듬이와 같은 것이 머리라고 생각되던 곳에서 움직이던 것이 보였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기 죽어 있는 지네가 어제 텐트를 스치고 지나간 놈이라는 데 5백 원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세상이 툭하면 저런 놈이 튀어나오는 거야.’ 다행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 적응할 만하다 싶으면 무시무시한 놈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상황이고 보니, 몇 년이 지나도 쉽게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엔 주변에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라그놀의 시체를 살펴 보았다. 사지가 절단 된 놈에 목이 날아간 놈,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놈들까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만 대충 헤아려 보아도 스무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 지네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더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런 놈과 어제 싸움을 벌였다면 아마 저기 누워 있는 시체들 중의 하나가 되엇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투는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부상당한 라그놀 몇 마리가 울부짖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지네의 시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라그놀들이 부상당한 동료에게 다가가서는 대뜸 머리를 내리쳐 죽이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동물의 세계에서는 일부 짐승들이 도태된 동료를 무리에서 추방하거나 물어 죽인다는 식의 이야기를 본적이 있었다. 부상당하거나 약한 동료가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면 무리 전체의 생존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아마도 라그놀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짐승은 짐승인 모양이다. 짐승의 그런 행위를 경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고 오랜 시간 DNA에 새겨진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까지는 그래도 인간처럼 생겨 죽이는 것에 조금은 꺼리던 마음이 있던 것이, 그런 모습까지 보고 나자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상당한 라그놀을 모조리 때려죽인 놈들이 이번에는 지네의 시체로 우르르 달려간다. 지네의 몸에 달라붙은 놈들이 다리를 떼어내고 껍질을 갈라 내부를 파헤치며 생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을 식량으로 삼을 모양인지, 떼어낸 살덩이들을 동굴 쪽으로 옮기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설마 지금 놈들 숫자가 저게 전부야?’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지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열일곱!’ 겨우 열일곱이다. 물론, 강호의 입장에서 보자면 열일곱도 많은 숫자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마흔에 이르는 숫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비하면 열일곱은 할 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준비를 해서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정찰만 할 생각으로 넘어온 상황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공격하려면 지금이 최적기였지만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은 돌아가자.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최대한 빨리 정비를 해서 돌아와야 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현장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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