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49.생리
아파트의 계단.
동작감지센서로 작동하는 불은 꺼져 어두운 계단에는 비상등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쪼그려 앉아 계속해서 나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을 멍추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술 사러 가야하는데...
별 일 아니다...
별 일 아닌데...
괜찮다고 스스로 머릿속으로 다독일 때 마다 더 서러워져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잘 못된 걸까?
수민이가 미웠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내가 뭘 잘 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따졌으면 수민이가 사과를 했을까?
되려 싸움만 나서 친구 사이가 어색하고 멀어지지 않을까?
그냥 내가 못들은 척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래 앞으로 그냥 모른 척 하면 벌어지지 않은 일이 될 거다.
나만 참으면 된다...
그리고 과연 수민이가 잘못한 것일까?
수민이는 내가 여자가 되기 전에도 우리들에게 수 많은 음담패설을 해왔다.
키스를 하면서 손을 바지 아래에 집어 넣었는데 나중에 손 냄새를 맡아 보니 끔찍한 냄새가 났다고 하기도 했고, 몸매가 어떠니 저쩌니 하며 여자들에 대한 야하고 천박한 이야기를 옛날부터 꾸준히 해왔다.
그냥 이번에는 그 대상이 내가 된 것 뿐이다.
내가 여자가 됬기에....
그 전, 내가 남자였을 때는 나 조차도 그런 수민이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며 즐거워 했고, 나 또한 그 천박하고 야한 이야기를 거들었다.
누가 변한 걸까?
누가 변해서 아까 같은 상황이 된 걸까?
수민이?
아니, 사실 변한 건 나 뿐이었다.
내가 변해서...
내가 여자가 되서 벌어진 상황일 뿐이다.
수민이는 그런 친구였고, 그걸 알면서... 아니 오히려 그래서... 난 수민이를 더 가까이 두엇다.
지금 내가 여자가 되었다고 그게 수민이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이다.
그냥 내 잘못이다...
친구들 중 변한 건 나 뿐이고...
나만 변한 티를 안 내면 친구들은 이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난 괜찮다.
"크흡..."
난 코를 삼키며 팔로 눈물과 콧물을 훔쳤다.
몸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눈이 부었겠지?
상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면 괜찮을 거다.
그래...
괜찮을 거다...
그 때 계단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세진이다.
"야, 나 혼자 갔다 온다 했잖아. 너 왜 나왔냐?"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울면서 나온 목 안에 끓는 가래는 아직 말에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 세진이가 내 쪽으로 다가 왔다.
그 동작에 반응하여 계단의 불이 켜졌다.
난 고개를 피하려 했지만 세진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너 들었구나..."
"머,뭘!"
"하아.... 미안하다. 지수민 그 개새끼! 말을 못하게 입을 찢어놨어야 됬는데."
그 말에 겨우 사그라들었던 불씨에 불을 지피듯 다시 속에서 울음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울면 안된다...
겨우 참았는데...
난 괜찮은데...
당장이라도 목 놓아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간신히 입 밖으로 울음이 터져나오지는 않았지만 몸이 떨리며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세진이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팔로 나를 감쌌다.
계속 그 팔에 안겨 있고 싶은 생각과 동시에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 내고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왜 이러는 걸까?
겨우 참았는데...
겨우 마음을 추스렸는데...
내가 잘못한게 아니고 수민이가 잘못한 걸까?
그게 맞나?
난 결국 세진이의 팔을 거세게 쳐냈다.
"넌 수민이랑 뭐가 다른데!"
"어?"
"그래, 수민이가 한 이야기 들었어... 그런데 너야 말로 수민이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더 한 놈 아니야?"
"...."
"씨발 그래도 수민이는 내 앞에서는 멀쩡한 척이라도 했지... 넌 뭐 어쩄는데? 기억 안나?"
세진이는 얼빠진 표정을 하다 되려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에 더 짜증이 올라왔다.
너도 할 말을 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을 해!
이미 용서 받았잖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
그럼 없었던 일로 하면 되잖아!
이전의 관계로 돌아 갈 수 있잖아!
하지만 세진이는 그러지 않았다.
"씨발새끼, 개새끼..."
난 욕을 세진이에게 퍼부었다.
계속된 욕설에도 세진이는 가만히 듣고 만 있었다.
난 혼자 더욱 흥분하여 세진이의 뺨을 때렸다.
계단에 뺨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세진이의 볼에 붉은 손자국이 났다.
내 손이 아플 만큼 쌔게 때렸음에도 세진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미약한 팔... 작은 손... 앵앵대는 목소리...
내 몸무게의 두배는 되는 세진이에게는 내가 보기에도 하찮은 폭력이었다.
세진이는 당장이라도 날 제압하고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진이는 그럼에도 내 폭언과 폭력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그 말에 더욱 열이 뻗쳤다.
"강간범 새끼....! 너가 뭐라고 수민이를 욕하는데? 이 강간범 새끼야! 너가 나 강간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서 좀 야한 이야기 한 거는 죽일 죄야? 내가 하지마라고 몇 번이나 그랬는데... 너 억지로 한건 기억 안나냐?"
"...."
"왜 수민이랑 이간질을 시키는건데? 그냥 모른 척 너도 지나가면 되잖아? 내가 그랬던거 처럼... 너도 그냥 참으면 되잖아? 난.... 이제 남은게 니들 밖에 없..."
그 때 난 대 없이 진서의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렸다.
"야, 여기 있었냐?
진서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놀랐다.
순간 딸꾹질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들었지?
세진이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진서가 있었던 줄 모른 눈치였다.
"술 사온 다면서 왜 여기 있냐?"
"아.... 그게 그냥...."
"그거 마셨다고 술 취해서 계단에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아....하하.... 응..."
내 억지 웃음에도 진서는 얼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잠깐의 침묵.
우리는 계단의 불이 꺼질 때 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야, 박세진... 너 연우 강간했냐?"
아....
어둠 속에서 들린 진서의 한마디에 심장이 얼어 붙었다.
"그... 그게 아니라..."
"....응. 미안하다...."
황급히 변명하려는 내 말을 끊고 세진이가 멍청하게도 자백을 하고 말았다.
"언제?"
"한, 두 달 전 쯤에..."
"어디서?"
"....니 집에서...."
"아... 그래?"
계단의 불이 켜졌다.
순간 진서의 주먹이 세진이에게 꽂히는게 보였다.
세진이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시 진서의 주먹이 세진이에게 날라갔다.
"하지마!!!"
내 외침에도 진서는 세진을 구타했고, 세진이는 그 주먹을 막을 생각도 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난 황급히 진서를 끌어 안고 말리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는 성난 진서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다음 진서의 주먹을 맞고 세진이는 쓰러졌다.
쓰러진 세진이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왔다.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세진이를 끌어 안았다.
"야, 서연우, 나와."
"하지마... 제발..."
세진이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야, 서연우... 나오라고 했다."
진서의 고압적인 목소리에 몸이 움츠려든다.
하지만 여기서 나왔다가는 정말 진서는 세진이를 죽을 때 까지 때릴 것 같았다.
"그, 그만 하라고.... 왜 때리는 건데!"
"그걸 몰라서 묻냐? 널 강간 했다고 스스로 자백을 했는데 가만히 내버려둬?"
"그럼... 너는 뭔데? 왜 친구한테 주먹을 휘두르는데? 깡패야?"
"뭐? 그래 나, 깡패다 됐지? 나와라 서연우."
"그만 안하면... 경찰에 신고할 꺼야!"
"하... 참나... 그래 신고해, 나 폭력으로 신고하고, 난 이새끼 강간범으로 신고하고. 그럼 되겠네."
진서는 주머니의 폰을 꺼내 경찰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진서의 손에서 폰을 빼았았다.
"왜? 너가 경찰에 신고한다며? 대신 해주려는데 싫어?"
"진서야, 그건...."
"야, 서연우. 너 같으면 친구를 강간 한 새끼를 그냥 내버려 둘꺼냐?"
친구...
그래...
애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그냥 친구다...
"너도 똑같잖아."
"뭐?"
"너라고 다를 거 있냐? 김진서. 너도 나 따먹었잖아. 너가 세진이랑 뭐가 다른데?"
"강간이랑은...."
"강간이나 섹스나, 그냥 나 따먹은 거는 똑같은 거 아니야?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야, 서연우!"
"어차피 너도 성욕 해소하려고 나 따먹는 거고, 세진이도 마찬가지였고, 뭐가 다른데?"
"다르지! 난 너와 합의를 해서 하는 거고, 저 새끼는 너가 싫다고 해도..."
"...만약 세진이가 하게 해달라고 했으면 해줬을 꺼야. 그냥 그 때는 놀라서 하지마라고 했던 거고."
"진심이야?"
진서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응, 그래... 뭐가 문제인데? 그냥 살덩이가 몸 속에 들어오는 거 뿐이잖아. 닳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끼리 한번 대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너는 해도 되고, 세진이는 하면 안돼? 내 몸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수민이나, 현우가 대달라고 부탁하면 대줄거란 거네?"
"...응, 그럴 꺼야. 뭐 잘못됐어? 섹스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같이 노는 거랑 뭐가 다른데?"
진서는 화를 참으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렇단 거지....? 알았다. 일단 폰 내놔. 신고는 안 할 테니깐."
진서의 말에 난 진서의 손 위에 살며시 진서의 폰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진서는 폰을 가지고 무언가 누르기 시작했다.
"야...혹시.."
"말 했잖아, 신고는 안 한다고."
진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톡이 울렸다.
우리 친구들이 있는 카톡 방에 따로 설정한 알림소리...
나는 황급히 폰을 꺼내 확인을 했고, 그곳에는 나와 관계를 맺으며 진서가 찍었던 사진들과 짧은 영상이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