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season2. 33. 이거, 물건일세(3)
season 2
33. 이거, 물건일세(3)
기찬이 막 입을 떼자, 김하익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버지 성격이라면, 지금 기찬의 말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을 잘 알았다.
분명 계약서를 보자고 할 것이다.
그게 좋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계약서로 장난질한 꼼수를 아버지에게는 들통나겠지만,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그 내용까지 기찬에게 알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제가 미덥지 못해도, 그래도 자식인데, 자식이 사기 친 걸 남에게 곧이곧대로 일러줄 리 없었다.
아버지 또한 남들 뒤통수 쳐가며 지금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기찬은 그런 그의 마음이 훤히 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는 게 좋았을 뻔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쐐기를 박아버려서 미안하군.’
김종태 회장 앞에서 계약서 내용이 밝혀지면, 그야말로 김하익은 빼도 박도 못 하게 된다.
계약서가 잘못됐다고, 자신이 준비한 계약서와 다르다고 우겨 봐야 등신 취급 받게 된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로서는 당장의 손실보다 아버지 눈 밖에 나는 일을 피하는 게 가장 중요할 때였다.
그래서 김하익은 입도 뻥긋 못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는 스타 레코드의 지분이 필요했고, 김하익 사장님은 제가 원하는 걸 망설임 없이 넘겨주셨습니다.”
기찬이 대답과 함께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김하익을 바라봤다.
정말 고마움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김종태 회장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어디, 그 계약서 좀 보자.”
김하익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뒤에 서 있던 이태석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덩치큰 그가 날렵하게 책상으로 가 서류를 챙겨왔다.
“여기….”
김하익이 내민 서류는 기찬도 익히 아는 계약서였다.
김종태는 그걸 집어 들고 찬찬히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다 읽는 동안 표정 변화는 없었다.
다만, 썩은 미소가 잠시 입가에 어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기찬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아주 잘한 계약이야. 나도 살면서 이런 계약은 몇 번 해보질 못했는데 말이야.”
담담한 말이었지만,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어려있었다.
김하익은 그런 것도 모르고 아버지의 반응에 속으로 ‘역시 아버지는 내 편’이라고 좋아했다.
분명한 오해였음에도, 그는 알 길이 없었다.
기찬도 모른 체 하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김하익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그래서 저는 계약된 시간 동안이라도 김하익 사장님께 저의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게 도리겠죠.”
김하익은 눈치 없이 되지도 않는 겸양을 떨었다.
“아,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자네는 참. 하하.”
그런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회장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에라이, 등신 머저리 새끼야. 나가 죽어라.’
기찬에게는 김 회장의 그런 속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다만, 그 또한 김 회장이 계약서를 보고 어떤 판단을 했는지는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김하익이 병신이어도, 그런 계약을 할 거로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즉, 계약서로 장난질한 사람이 기찬이라는 걸 알아봤느냐가 관건이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라 전생자인 기찬으로서도 판단이 쉽지 않았다.
김종태 회장은 혀를 한번 차고는 계약서를 탁자 위에 툭 던져놨다.
그러고는 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송지연이 병원 데려다 입원 시킨 게 자네라고.”
“네. 회장님.”
“그 아이가 대충 얘기는 했다고 하던데,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찬은 잠깐 생각했다.
어디까지 얘기를 하는 게 좋을지, 뭐라 말해야 저에게 이익이 되는 지를 저울질한 것이다.
‘김하익에게 한 말이 있으니, 그것까지 고려하자면….’
지금까지와 다르게 즉답하지 못 하고 신중한 그를 보며, 김종태가 먼저 지침을 주었다.
“내 아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저놈은 자넬 보호해 줄 수 없어.”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순간 살벌한 압박감이 가슴을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찬은 김종태 회장의 성향을 이용하기 위해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오히려 기회 삼았다.
“저는 남에게 제 안위를 맡기거나 기대지 않습니다. 지금은 염려해 주신 것과 달리, 김하익 사장님을 보호하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며 김종태 회장 뒤에 서 있는 덩치들에게 한번씩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두 사내의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가 돌아왔다.
어지간한 건달들도 자신들의 기세에 밀리는데, 어린 친구 배포가 제법이라는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김종태 회장도 속으로 꽤 놀랐다.
한편으로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저 계약서, 하익이놈이 정말 저렇게 쓴 건가? 제 지분을 다 공으로 넘겨줄 만큼, 기찬이라는 놈이 쓸만한 거야?’
그는 기찬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김하익의 오른쪽에 든든히 서 있는 이태석을 봤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살갗이 쓰릴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내가 쓰는 애라는 걸 알면서 손을 댔으니, 팔 하나쯤은 가져갈 생각으로 왔다. 너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겠지?”
송지연이 다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태석은 회장의 말과 다르게 각오가 없었던 것 같았다.
커다란 덩치와 강철 같은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겁먹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김하익을 내려다봤다.
‘김하익 저 새끼,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일 처리 하라고 시켰겠지.’
안 봐도 뻔했다.
당연히 책임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뻔한 일이었다.
김종태 회장도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이태석을 더 몰았다.
“팔이 곤란하면 다른 걸 내놔도 좋다. 내 옛정을 생각해서 그 정도 선택권은 주마.”
결코 농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김하익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이태석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털썩.
“회,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김종태 회장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기찬을 보며 물었다.
“내가 오늘 너희 사장 혼 좀 내주려고 왔다. 그런데 넌 그 사장을 지키겠다고 했다.”
기찬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당연히 그럴 겁니다.”
김종태 회장은 그런 기찬의 태도가 어린 나이의 치기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무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이놈 보게? 이거, 물건일세.’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보고 싶었다.
자신의 제자인 오명환이 키웠다는 기찬의 실력을.
그는 다시 이태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오늘 이 어린 친구에게 고마워해야겠다.”
무슨 소린지 이해한 사람이 없어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자 회장은 정말로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네가 이 녀석을 때려눕히면 용서해 주마.”
그러고는 기찬을 향해서도 말했다.
“네가 이실장을 이기지 못하면, 난 너희 사장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자식을 어쩌겠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어떨까.”
김종태의 황당한 설명이 끝나자, 김하익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는 제 아비가 한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이다.
‘내가 제 아랫것 건드렸다고 아주 작정하고 온 거구나!’
경고 정도를 생각했는데, 너무 안이했다.
아주 본보기를 보일 심산으로 보였다.
생각하다 보니 절망적이었다.
기찬이 이태석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크흑.
분한 마음에 이가 빠득 갈렸다.
그런데 그때, 기찬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제가 이기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질 거라는 생각은 없는 사람 같은 태도였다.
김종태는 눈앞의 당돌한 청년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사장을 지키는 건 네 일이야. 네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내가 왜 부탁을 들어줘?”
예상했던 반문에 기찬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람을 때리는 일입니다. 회장님도 복싱선수 출신이시니 잘 아실 거로 생각하고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제야 김종태도 기찬의 부탁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나든, 뒷일은 다 내가 처리하마.”
그제야 기찬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벗어나 문 쪽 넓은 공간으로 이동해 섰다.
“내가 어제 송지연 대리와 사귀는 사이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적 감정은 없다. 당신도 나한테 감정 갖지 마.”
기찬의 선전포고 같은 말에 이태석이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입은 야무지게 다물고 있었지만, 눈매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만했다.
김종태 회장의 분노를 피할 길이 없었는데, 분수도 모르는 의대생 새끼가 나대준 덕에 살게 됐다.
물론 기찬에게 고맙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보여줄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할 소릴. 잡소리 말고 빨리 끝내자.”
그래도 어른인데, 게다가 회장이랑 사장이 다 보는 앞인데, 선빵을 날릴 수는 없어 선수를 양보했다.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와 봐.”
살짝 두 팔을 들어 올려 가드 포지션 잡는 걸 보며, 기찬은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킥복싱 유단자. 유도도 3단. 그라운드 기술로 들어가면 승산이 있지만….’
하지만 기찬은 모든 계산을 다 지워버렸다.
김종태 회장이 보는 앞이다.
그의 취향에 맞출 생각이었다.
‘김 회장이 생각하는 진정한 남자는, 힘.’
기찬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