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season2. 34. 이거, 물건일세(4)
season 2
34. 이거, 물건일세(4)
기찬은 이태석이 어깨를 들썩이고 목을 돌려가며 몸 푸는 걸 가만 지켜봤다.
‘영화에서 보기는 했지만, 정말 재벌들 하는 짓거리 유치해서 못 봐주겠네.’
그들 생태계가 그렇다.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이 언제나 곁에 갖춰져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독 그들이 가진 폭력 앞에서 법은 관대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제 집 지키는 개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강한 놈을 가까이 두겠다는 심산이다.
그리고 그걸 유희 삼는다.
마치 로마 시대 검투사들처럼.
‘놀아나 주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기찬은 지금 상황이 영 못마땅했지만, 대업을 위한 희생 정도로 타협했다.
“복싱 선출이라니까, 안 봐줘도 되겠지?”
몸을 다 풀었는지, 이태석이 거구가 무색하게 가벼운 몸놀림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기찬에게 다가왔다.
스륵.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운동한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스텝이었다.
슥.
기찬은 그에 대응해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소독스 스탠스가 됐고, 그와 동시에 이태석의 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후욱.
‘짧고 간결하고 빠르게.’
기찬은 지금 상황이 못마땅한 만큼,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제 기분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기기에도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휙.
왼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더킹으로 가볍게 주먹을 피한 후, 그대로 왼발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뒤에 있던 오른발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가다가 몸이 회전하는 대로 왼쪽으로 빠져 무게중심을 앞으로 밀었다.
쉭.
스윽.
팟.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순식간에 이어진 빠른 동작에 이태석은 흠칫 놀라며 뻗었던 주먹을 거둬들이기 바빴다.
“읏!”
하지만 늦었다.
기찬의 왼쪽 주먹이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비어 있는 이태석의 옆구리에 꽂혔다.
훅.
뻑!
“큭!”
기찬은 그것으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두 번째 연타는 감정을 실었다.
‘이 새끼 어제부터 계속 거슬렸어.’
오른쪽으로 기우는 커다란 이태석의 턱에 어느새 오른 주먹이 강타했다.
훙.
빠각.
“커흡!”
정타였다.
관자놀이나 턱에 정타가 들어가면 버틸 장사가 없다.
그래서 이태석은 들숨 한 번 들이쉬는 것을 끝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이태석이 몸을 풀고, 기찬에게 경고하고, 그리고 쓰러졌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찬은 그 고요함을 즐기듯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김종태 회장의 시선은 피했다.
‘노인네. 사람 얼굴 뚫어지겠다.’
그는 분명 두 가지 생각을 하는 중일 것이다.
갖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그게 안 될 경우 제거해야겠다는 경계심.
아니나다를까.
김종태 회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밀어냈다.
“오명환이가 복이 많구나. 너 같은 재목을 제자로 두고.”
오명환이 잘 가르쳤다고 하는 게 아니라, 기찬이 재목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직 안목은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 겸양을 떨었다.
“천재들은 많습니다. 감독님 지도가 훌륭했던 겁니다.”
그러자 김종태가 택도 없는 소리라는 듯 픽 웃었다.
“명환이 놈도 속 좀 탔겠어.”
툭 던진 김 회장의 말에 기찬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물었다.
“네?”
그런 기찬을 바라보는 김종태의 눈빛이 사뭇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전에도 호감과 기대감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뭔가 더 공격적인 느낌이었다.
직접 나서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 재능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겠다니, 내가 다 속이 쓰리구나.”
그 말을 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제 아들을 내려다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저 계약서는 인정하마. 원석은 아주 잘 골랐다. 그만한 값어치를 할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김하익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못마땅한 김 회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원석이 보석이 될지, 그냥 돌맹이로 굴러다닐지, 너 하기에 달렸다.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계속 있다가는 빼앗길 수도 있고.”
김종태 회장이 자리를 뜨려 하자 그제야 김하익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가시게요?”
김종태는 그런 아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뭔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거야.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기찬은 그 말을 들으며 송지연 문제가 진짜 용건이 아님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체육회쪽 일이겠지?’
그런 생각이 불쑥 드는 사이, 김 회장은 기찬의 옆을 지나치다가 멈춰서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네 스승 놈한테 전해. 지금은 몸 사릴 때라고. 무슨 뜻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전해. 그러면 알아들을 거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기찬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한참이나 눈을 마주 보던 그가 다시 한번 픽 웃으며 말했다.
“내 제안은 상시 유효하다. 언제든 찾아 와. 저런 덜떨어진 놈 밑에 있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김종태 회장은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두 수행 비서도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사무실에는 다시 침묵이 들어찼다.
김하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기찬이 먼저 움직였다.
“일단 이 실장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의외로 김하익이 침착하게 말했다.
“뭘 네가 가. 119 불러.”
“네.”
기찬은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지금 그의 말을 거슬렀다가는 괜한 감정 사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직원들 다 있는 데서 제 아버지한테 등신 취급 받았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기찬이 사무실 밖의 직원에게 구급차 부를 걸 지시한 직후, 삐삐가 울렸다.
음성 메시지였고, 발신 번호에 호텔 전화번호가 찍혔다.
그는 단단히 화난 표정으로 제 사장 명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김하익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 삐.
- 한 개의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 기찬아. 내가, 이걸 뭐라고….
오명환이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찬은 문제가 있다고 직감하고 곧바로 호텔로 전화했다.
“1107호 연결해 주세요.”
- 기찬아….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 어, 아니, 난 괜찮은데, 그게….
호흡이 거칠고 잠이 덜 깬 것같은 잠긴 목소리였다.
‘아직 술 취한 상태다.’
기찬은 빠르게 판단한 후 차분하게 감독을 진정시켰다.
“감독님. 그대로 계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
기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김하익에게 사정을 말했다.
이미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 보라고 했다.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가던 기찬이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장님, 혹시 오토바이 있어요? 아니면 회사용이라도?”
* * *
고급 세단에 오른 김종태는 줄곧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다 버리고 이 바닥을 떴던 오명환이가 이사 자리를 추천받아 꿰찼다면, 박효필이가 뒤에 있는 거겠지.’
하아아.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평온하던 호수에 누가 돌멩이를 하나 던져 놨다.
이미 수년 전에 다 정리되고 셋팅까지 마무리해서 잘 굴러가고 있는 협회를 들쑤셔 놓은 것이다.
“그래봐야 얼마 가지 못하고 다 기어들어 가게 될 거다. 쥐새끼들.”
권력은 나누는 게 아니다.
좋게 좋게 대했더니, 자꾸 고개를 쳐드는 게 화가 났다.
이번에는 다 족쳐서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장년인의 비열한 눈빛에 순간 맑은 기운이 스쳤다.
심기를 건드리는 현안을 생각하던 끝에, 불쑥 기찬이 떠오른 것이다.
“오랜만에 물건이 나타났어. 허허.”
김종태 회장이 기찬에게 마음을 뺏긴 건, 단지 그의 운동신경이나 피지컬, 대찬 성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생긴 외모와 더할 나위 없는 학벌이 마음에 들었다.
“손주사위 삼으면 딱 좋겠는데.”
큰아들 상익의 장녀가 올해 스무 살이다.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손녀가 아직 혼기는 아니지만, 기찬만한 최상품은 미리 확보해야 한다.
그는 다른 재벌들과 달리 집안 따지는 건 비교적 후순위였다.
건달로 살던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작은 외국인 전용 유스호스텔로 시작해 지금에 이른 건, 순전히 김종태 자신의 노력이었다.
그것도 손에 온갖 오물을 다 묻혀가며 일군 것이다.
그러니, 집안이라고 딱히 내 세울만한 게 없었다.
김종태는 차창 밖을 보며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손녀와 기찬이 이어진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엉뚱하게도 기찬의 양 훅에 덩치 커다란 이태석이 고목 쓰러지듯 넘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그걸 지켜보며 피가 뜨거워졌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하아, 옛날이 그립구나.’
링 위에서 느꼈던 그 뜨거운 호흡과 땀 냄새, 거친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몸에 전율이 일었다.
걸출한 젊은 친구 덕에, 오랜만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최 마담한테 전화해. 호텔로 들어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