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화
3화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때, 내 마음은 죽어 가는 육체만큼이나 약해져 있었다.
'그냥 이렇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허울뿐이라도 귀족 세계의 일원이었는데, 한순간에 유배인으로 전락하다니. 눈앞이 캄캄하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두려웠다.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이마 위에 올려놓은 물수건이 계속해서 데워지고 의식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귓가에서 재잘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간 내 곁에 있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무척이나 힘 있고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유배인이 도착해야 할 날짜가 달이 넘어가는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여자는 왜 죽어 가고 있고? 여기 오기 전 고문을 받았나?”
깜박이는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잠깐 밝아지기를 반복하던 내 의식을 붙들 만큼,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
“죽지 않을 만큼만 고문해 유배 보낸 뒤에 여기서 죽으면 또 야만인 탓을 할 셈인가? 아직도 문명화가 되지 않아 유배인에 대한 대우가 부당하고 모질었다고?”
그 물음에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호송관의 변명하는 듯한 말이 이어 들렸다. 나는 낯선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두 눈을 뜨려 해도 그때 내게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럼 고문도 당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온 것만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인가? 마엘 공자가⋯⋯ 자신의 애마까지 내어 주었는데도?”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은 들어 올려졌다.
“이제 내가 이 여자를 맡지.”
근육질의 단단한 두 팔에 밧줄처럼 묶여.
❖ ❖ ❖
눈을 떴더니, 예의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천장화는 온데간데없고 석재가 그대로 노출된 둥근 형태의 천장이 보였다. 왕궁에서 익히 보던 건축 방식은 아니었다.
그렇다. 이곳은 왕궁이 아니다.
“흐어어어억⋯⋯.”
상체를 일으킨 순간 나는 신음을 흘리며 금방 다시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병으로 인해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몸이 허약해졌던 것이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그러나 살아는 있었다, 이 낯선 곳에서.
점차 감각이 돌아오고 등에 몹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쓸어 보니 그곳엔 얼룩 없는 보드라운 천이 깔려 있었다. 지금까지 등을 부서뜨릴것만 같던 딱딱한 널빤지 침대와 축축하고 더러운 천이 아니라 깨끗한 천이 깔린 푹신한 매트리스였다.
'여기가 어디지?'
이윽고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당황했다. 침대 아래를 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 연기는 스멀스멀 침대까지 올라오려는 중이었다.
나는 놀라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발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게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전해졌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의 쓰라린 통증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자욱한 연기에 휩싸인 나는 일단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감싸고 허둥거리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어났군.”
문을 열자 복도가 보였고, 복도 또한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연기를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숲에서 봤으면 곰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체구가 커다란 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겁에 질려 매달렸다.
“불이 났어요! 얼른 이곳을 나가야!”
“이건 안개요.”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프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자주 안개에 뒤덮이오.”
'안개?'
그러고 보니 연기는 매캐하거나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축축하고 차가웠지.
'세상에⋯⋯.'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붉혔다. 남자가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놓아주시겠소?”
“죄송합니다.”
두 손을 놓고 한 걸음 떨어진 나는 이제야 남자를 관찰할 수 있었다.
남부의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커 보이는 키에 넓은 어깨와 길쭉한 팔다리, 그에 비해 너무도 작아 보이는 머리는 그를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했다. 흑발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뱀의 것같이 음산하게 느껴지는 초록색 눈동자.
왕궁에서 본 귀족 남자들을 대부분 금발이었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는 등 공작새처럼 화려한 매력을 뽐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들과는 다른 종족인 것 같았다. 그건 무릎까지 오는 흰 튜닉에 바지뿐인, 너무도 단출한 옷 차림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인간 같지가 않아.'
뚜렷한 이목구비를 잘 들여다보면 준수하다 평가할 만한 외모였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무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나와는 아예 다른 종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미남처럼 보일 텐데, 남자의 눈동자는 너무도 차가워서 얼음 같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늑대처럼 사나워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를 너무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또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잔느 드 툴루즈입니다.”
“발드르 드 스카디요.”
'드 스카디? 그렇다면 바로 그⋯⋯.'
바로 그 '스카디 공작'이구나. 예상치 못한 대면에 나는 두려움으로 압도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여기 왜 왔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나? 누명이라고? 하지만 말해 봤자 믿어 줄까?'
처음으로 스카디 가문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에 못 이겨 드디어 연 입 밖으론 긴장감으로 갈라진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알고 있소, 그대에 대해선 이미. 이제부터 내가 그대의 주인이니 말이오.”
“⋯⋯.”
“⋯⋯.”
내가 움찔하자 그가 살짝 단어를 정정했다.
“그대의 '보수 주인' 말이오.”
보수 주인이란 유배 온 죄인의 거처와 음식을 마련해 죽지 않도록 돌보고, 유배인이 도망칠 시 그 죄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자였다. 그렇다. 그는 내 간수였다. 이곳에서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도착해야 할 시일을 한참 넘겼건만 아무 소식도 없기에 그대가 도망친 줄 알았소. 아니면 들짐승에게 죽었거나. 그런데 알아보니 영지 끝자락에 있는 여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더군. 거기서 회복하기를 기다리다간 그대로 죽을 것 같기에 내가 그대를 직접 이곳으로 옮겨 왔소.”
그것이 내가 눈을 떠 보니 이곳에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대가 이곳에 오기 앞서 안면도 없는 왕의 소생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소. 그대의 죄가 누명임을 소상히 밝히고 구구절절 그대의 안위를 부탁하더군.”
나는 그의 말끝에 단단히 박힌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빈정거림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데 어떻소?”
'저녁 식사?'
식욕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지. 푹 쉬시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밀려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안개처럼.
❖ ❖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가 돌아간 뒤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앳되어 보이는 하녀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요깃거리를 좀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스튜였다. 정체불명의 여러 자투리 고기와 야채가 섞인, 이곳에 오기 전까지 허름한 여관들에서 먹었던 ‘영원한 스튜’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양이 줄어든다 싶으면 그때마다 있는 재료와 국물을 스튜가 담긴 냄비에 그대로 다시 부어 채우는 방식으로 조리하기 때문에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 스튜 말이다. 역겹게 느껴지는 생김새였지만 유형지에 와서까지 음식 투정을 할 마음은 없었다.
'먹어야지, 그래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제대로 못 먹은 여파로 식욕도 별로 없었지만, 힘을 내야지 싶어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그러고 나니 하녀가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그래 줄래?”
몇 시간 뒤 하녀가 목욕물을 가져와 욕실의 작은 반신 욕조에 부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없는 힘, 있는 힘을 다 쥐어짜 내 몇 번이고 몸을 씻었다.
'이렇게 더러운 꼴로 공작 각하를 뵈었단 말인가?'
흘러나오는 구정물을 보면서 나는 새삼 아연실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