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화
10화
발드르가 그녀에게 시키려는 일은 단순한 강제 노동, 글을 한 자 한 자 베껴 쓰거나 돌을 나르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불만이 쌓여 태만하게 될 것이고 그 피해는 자신과 양녀에게 올 것이다.
발드르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그대 가문은 황금 방패 은행과 거래해 본 적이 있소?”
은행업은 각지에 성행하고 있었으나 그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귀족 가문과 대상인, 왕족에 한정되어 있었다. 개중 황금 방패 은행은 전역에 가장 많은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예, 계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은행은 우리 가문과도 거래하고 있소. 근시일 내에 금융업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지. 그대 가문의 계좌에 봉급을 보관하면 안전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소? 물론 그 돈은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가족도 손을 댈 수 있겠지만, 만약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습니까?”
“뭘 그렇단 말이지?”
“제 봉급을 제 가족이 쓸 수 있습니까?”
“가능하지 않겠소?”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것인데 여자의 얼굴이 구름 밖으로 나온 햇살처럼 밝아졌다. 그는 그 반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폴린느 부인에게 일러 놓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택과 드나드는 상인들과 거래하시오. 무엇보다⋯⋯ 그 옷.”
그는 이전부터 계속 거슬리던 장신구 하나 없는 갈색 드레스 차림에 시선을 던졌다. 심지어 옷은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보니 꾀죄죄해 보이기까지 했다.
“공작저의 가정 교사가 하녀 옷을 입고 있으니 보기에 좋지 않군. 품위 유지비를 지급할 테니 옷부터 사시오. 다음엔 그 옷차림으로 보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는 여자가 감옥에서 나온 즉시 짐을 꾸릴 새도 없이 유배 길에 올랐다는 사실은 몰랐다. 사실 유배인이 어떤 경로로 유배지에 도착하는지는 그가 알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그의 말에 하얗던 여자의 얼굴이 이번엔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더 청할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
그는 자비를 베풀어 물었다.
“저⋯⋯ 수업 시간 이외에도 산책을 해도 괜찮을까요?”
“산책?”
“멀리는 나가지 않고 저녁 식사 전까진 꼭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저, 서재의 열쇠를 받고 싶습니다.”
“⋯⋯.”
“아가씨의 수업 교재를 찾아보기 위해서 자주 들락날락하다 보니 제가 폴린느 부인을 너무나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그는 잠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책은 은식기만큼이나 고가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수락했다.
“그렇게 하시오. 열쇠와 책은 그대가 알아서 잘 관리하리라 믿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않은가. 왜 서재 열쇠를 요구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업 말고는 할 것도 없으니 즐길 거리가 필요하겠지. 그런데 그만큼 시간이 많다면⋯⋯.'
“대신.”
대신 그는 조건을 달았다.
“뛰시오.”
“예? 뛰⋯⋯라니요?”
가정 교사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식사 전 연병장을 세 바퀴 뛰시오.”
“⋯⋯.”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 위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것. 그런데 그대는 너무도 허약해 보이는군. 그래서야 이곳의 겨울을 버틸까. 이 저택 뒤뜰엔 사병들이 쓰는 연병장이 있소. 그곳을 개방해 줄 테니 세 바퀴씩 뛰시오.”
체력 단련엔 뜀걸음만 한 게 없다는 것이 발드르의 지론이었다. 그와 그의 사병들 또한 혹한기를 대비하기 위해 아침 식사 전 연병장을 열 바퀴 뛰었다.
“시간이 나면 더 뛰어도 좋고. 그러면 기초 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에 잔느는 계속해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날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공작⋯⋯ 각하? 저더러 연병장을 뛰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제, 제가 사병들도 사용하는 연병장을 어떻게⋯⋯.”
“어떻게라니? 두 다리가 있으니 그걸로 뛰면 되지 않소?”
“저는!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아가씨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산책할 시간을 줄이면 될 거 아니오. 나가 보시오.”
용건이 끝난 발드르는 가정 교사를 내쫓았다.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바들바들 떠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다음 날, 해도 뜨지 않은 아침 연병장은 여느 때처럼 사내 어깨쯤까지 오는 안개에 싸여 있었다. 발드르와 병사들은 뜀걸음을 시작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는 가정 교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감을 느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대체 왜 실망감을 느꼈을까? 마치 무슨 기대라도 했던 것처럼. 그래 봤자 결국 그녀도 프랑의 귀족 아닌가? 발드르는 프랑의 귀족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거만하고 게으르며, 그보다 지위도 낮으면서 야만인의 후손이랍시고 자기 가문을 무시한다는 편견을.
그는 그녀에게 내릴 벌을 생각하며 구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연병장을 세 바퀴 뛰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개를 헤치고 낯선 인영이 나타났다. 창백한 표정에 예의 그 갈색 옷차림을 한 여자였다.
'보기 싫다고 말했는데도⋯⋯ 뭐, 하긴 하루아침에 옷이 생겨날 순 없지.'
여자가 연병장에 온 것을 발견한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는 병사들을 윽박 질러 조용히 시켰다. 잔느는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그들의 사병이 다 지나가고 나서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밥 먹듯 벌어지는 교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훈련만 하며 강철처럼 제련된 정규군과 체력 단련이라곤 산책밖에 해 보지 않았을 귀족 여식이 체력 차이가 나지 않는 다면 심각한 문제다. 여자는 연병장을 반의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사병 무리에 따라잡혔다.
그는 잔느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를 흘긋 보았다. 여름이라도 차가운 새벽, 가정 교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허리는 헉헉대느라 굽어져 있었다. 그러나 잔느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사병들이 열 바퀴를 다 달리고 난 지 한참 뒤, 여자는 걷다 뛰다 하며 결국 세 바퀴를 채웠다. 그리고 그녀는 터덜터덜 기어가다시피 사라졌다.
못 하겠다고 드러누울 줄 알았건만 여자는 그다음 날도 나타났다. 하늘이 안개비를 뿌리던 그다음 날도.
❖ ❖ ❖
'스카디 공작은 미친 인간이다.'
어느 고용주가 가정 교사에게 아침 뜀걸음을 시킨단 말인가? 그것도 사병들과 같이? 미친 자라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듣긴 했으나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 난항을 겪겠다 생각했던 아나 아가씨의 수업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충격을 받았던 첫 수업 날 이후 대화를 나눠 볼수록 알게 된 것이지만 아나 아가씨는 그냥⋯⋯ 이렇게 말하면 정말 이상하지만⋯⋯ 평민 아이 같았다.
아나 아가씨는 염소 젖 짜기도 해 보았고 건초도 날라 보았으며 버터를 만들어도 보았고, 바느질도 할 줄 알았다. 자신이 해 본 것,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에 대해 묘사할 때 그녀는 막힘없이 즐겁고 재치 있게 말했다. 그걸 듣고 있는 내가 무심코 빨려들어 갈 만큼.
'이 아이한테는 선천적으로 말을 잘하는 능력이 있어. 슬기와 재치도 있고.'
이런 아이가 결코 지능이 낮을 리 없었다. 그냥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학습할 기회가 없었을 뿐.
'혹시 형의 아이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사실 이 아이는 스카디 공작이 시골 처녀와 통정해서 낳은 아이가 아닐까? 그리고 그 시골 처녀는 아이를 그냥 평범한 아이처럼 키웠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쯤에서 추측을 그만두기로 했다. 가정 교사로서 고용주의 치부를 굳이 캘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사명은 이 시골 아이를 귀족 아가씨로 키우는 것이었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일국의 왕비가 될지도 모를 아이를.
같은 병을 앓는 사람에겐 마음이 더 간다고 하던가. 나는 개인적으로도 금방 아나 아가씨가 좋아졌다. 우리의 사정이 놀랄 정도로 비슷했던 것이다. 우리는 둘 다 갑작스럽게 가족과 헤어져 낯선 곳에 떨어졌으며 이곳에는 정 붙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게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여기서 새로 생긴 막냇동생처럼 여기기로 했다.
매일, 공부방에 오면 나는 그녀의 보모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 묶은 머리를 풀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예쁘게 땋아 주었다. 아나 아가씨는 이마의 선을 따라 실타래처럼 땋아 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머리 모양은 밀밭 같은 금발을 벼 이삭처럼 땋아 한쪽 어깨 너머로 늘어뜨리거나, 정수리를 중심으로 머리칼을 양쪽으로 나누어 뿔 모양으로 양옆에 틀어 올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