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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화


15화 걸어서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호숫가도, 사슴 서식지도 숲도 금방이었다. 인생이란 참 모를 일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이곳에 있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유배령이 내려졌을 땐 그저 죽고 싶었으며, 유배지에 도착했을 땐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나는 우울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는 점점 이곳이 좋아졌다. 믿을 수 없게도. 스카디령의 가을은 하루에도 세 번 이상은 바뀔 정도로 변덕스럽긴 했지만, 이따금 구름이 걷히고 완벽할 정도로 따스한 볕이 내리쬘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그랬다. 수업 중에는 내내 흐리고 비가 올 것처럼 찌뿌둥해 사람을 울적하게 만들더니 수업이 끝나자 갑자기 아름다운 햇볕이 뜰 전체에 내리쬈다. 젖은 풀밭을 말리는 햇살을 본 나는 날씨가 변하기 전에 책 한 권을 챙겨 브륄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프랑에서는 이런 날씨쯤이야 매일 볼 수 있었으므로 소중함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나는 햇볕이 나면 너무도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언덕에 도착한 나는 브륄을 풀어 준 뒤 잔디가 축축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잠시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책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따스한 햇볕이 졸음을 몰고 와 서서히 글자가 흐려지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여기서 이대로 잠이 들면 감기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너무도 따스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이 가볍게 이마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마저 기분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점차 감은 눈을 뜨는 것이 어려워지고, 일어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결국 나는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읽던 페이지에 검지를 끼운 책이 내 손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것과 동시에 내 정신도 함께 무의식의 세계로 떨어졌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헉!” 나는 흠칫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곤히 잤는지, 잠시 동안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방 안인지, 언덕 위인지 아니면 수도인지. 혹시 내가 유배형에 처했던 것조차 꿈이 아닐까? 스카디령에서 겪었던 이 모든 일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상상이라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곁에 서서 나를 골똘하게 바라보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공작 각하?” 대체 언제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혹시 지금 이조차 꿈인가?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구름이 오고 있소.” “구름?” '구름이라니?' 뜬금없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북해의 습기를 빨아올린 비구름이요. 곧 이곳에 비를 뿌릴 테니 이만 말을 끌고 들어가 보시오.” “아, 예!” 그는 산책 중 우연히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나는 급히 일어나 브륄을 찾았다. 다행히 브륄은 근처 나무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내가 브륄을 나무에 묶었던가? 내가 일어서자마자 공작이 말했다. “다음에는 숄이라도 두르시오. 옷도 좀 더 두꺼운 것을 입고.” 하늘에서 뿌려진 차디찬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그는 고개를 까닥이곤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흑마가 공작 각하께 다가왔다. 보기만 해도 준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늘씬하고 키가 큰 말이었다. 그는 윤기가 흐르는 말 위에 훌쩍 뛰어올라 고삐를 쥐었다. 공작 각하는 미련 없이 말과 함께 떠났고, 나 또한 허둥지둥 나무에 묶인 가죽끈을 풀어 브륄을 타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과연, 갑자기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마사에 도착하자 공작 각하께서 일러 준 보람도 없이 나는 쫄딱 젖었다.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맡기고 젖은 생쥐 꼴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퍼뜩 읽고 있던 책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젖으면 큰일인데!' 생각이 나자마자 나는 다시 브륄을 빌려 급히 언덕으로 달렸다. 하지만 책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책이 어디 갔을까.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하던 중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잃어버린 책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공작저의 중요한 자산을 함부로 다루다 잃어버리기까지 하다니, 이게 은 접시를 훔친 하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떡하지?' 결론은 금방 나왔다. '사실대로 고하는 수밖에.' 폴린느 부인에게 말하고 잃어버린 책값을 지불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 일로 신뢰도 잃어버리고 열쇠를 다시 반납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좀 더 찾아보면 안 될까?' 너무 달게 잔 탓일까? 사실 책을 가지고 나간 게 정말 맞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책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그 언덕에 두고 온 것이 맞다면 책이 비에 맞아 쭈글쭈글해졌을지언정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많은 장서 중 딱 한 권이다. 금방 들키지는 않을 테니 나는 일단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 며칠간 방과 공부방, 언덕, 그 외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도 책은 나오지 않았다. ❖ ❖ ❖ 가을은 격무의 기간이었다. 여름의 방어전을 마치고 돌아오면 영지에는 그간 미뤄둔 업무가 발드르를 맞이했다. 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세금 징수도 추수의 계절인 가을에 시행되었으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스카디령 내의 군소 귀족들이 공작저를 방문해 이런저런 문제로 알현을 원했다. 이런 연유로 발드르는 가을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새벽 5시에 하루 일정을 시작해 점심 식사 전까지 오전 군사 훈련을 마친 뒤 거의 자정까지 집무실에서 일하는게 보통의 하루 일과였다. 그리고 그런 발드르의 집무실은 앞뜰과 잘 다듬어진 정원, 숲이 잘 내다보이는 저택의 정중앙 정면에 위치해 있었다. 업무를 하다 심신이 지치면 그는 앞뜰의 전경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듯 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럴 때 그의 눈에 바깥 전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올해는 갑자기 뛰어다니는 말과 가정 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공작은 얼마 전 양녀의 가정 교사에게 말을 선물했다. 야외 활동을 하기 힘든 겨울이 오고 있기도 했지만 막상 뜀걸음을 시켜 보니 생긴 문제 때문도 있었다. 이따금 그녀에게 꽂히는 병사의 뜨거운 시선들이 점차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가정 교사는 잠시 연병장을 뛰다 떠날 뿐이고 그 후로도 훈련은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하지만 발드르는 알고 있었다. 그의 사병들은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쓰는 젊은 남자라는 것을. 저택 내 하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긴 했지만 사병들과 하녀 몇이 몰래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발정기의 말에게 교미를 금지하겠다고 해 봐야 알아들을 순 없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였다. 발드르는 자신의 사병 중 한 명과 가정 교사가 정분이 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승마를 권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조랑말과 함께 안뜰에 나타났다. 둘 다 체구가 작아 여자가 말을 타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럽지 않고 잘 어울렸는데, 처음엔 외승에 서투른 것이 이 먼 곳에서도 잘 보여서 발드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쥘 정도로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그 말을 타고 어디든 돌아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은 정원을 한 바퀴 빙 둘러 걷고 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언덕에 올라가 있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숲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가에 가 있기도 했다. '이러라고 준 거긴 하지만 정말 잘 쓰는군.' 그녀는 볕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볕 드는 곳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기도 했다. '저건 아마도 내 책이겠지.' 생각보다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아닌가? '유배가 아니라 휴양이라도 온 것 같군.' 발드르는 그런 행동들이 거슬리긴 했으나, 어쨌거나 그녀의 적응은 그도 바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잔느가 자신의 앞뜰을 제 것처럼 사용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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