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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화


16화 집무실에선 바람을 타고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구름이 앞뜰로 몰려오는 것이 잘 보였는데, 정원의 언덕 위 나무 아래서 기둥에 몸을 기댄 가정 교사는 미동도 없었다. 근처에는 그녀의 말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잠들어 있는 것이겠지.' 비를 맞으면 가정 교사는 감기에 걸릴 것이고, 낫는 동안엔 수업에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여자군.' 그것이 발드르가 비구름을 보자마자 집무실을 빠져나가 말을 탄 이유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본인이 직접 가는 것보다 하인을 시키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었을까? 발드르가 자신의 행동에 아무 의문도 품지 않은 채로 포플러 나무 그늘 아래에 다다를 때까지 가정 교사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손 근처에 책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니 읽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책을 집어 올려 툭툭 털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늘 궁금했었다. 책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읽어 본 적이 없군.' 장서 중 대부분을 그도 읽어 보긴 했으나 모든 책을 다 본 건 아니었다. 그 많은 장서는 선대부터 아버지 대까지 수집한 것이었다. 그는 서서 잠시 책의 내용을 훑어본 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았다. 그러는 동안 구름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지금 깨운다 해도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비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눈을 감은 잔느의 얼굴을 보니 발드르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이런 얼굴이었던가?' 대신 바라보고 싶었지. 마치 맑은 호수를 들여다보듯이. 자신과 대면할 때 가정 교사는 늘 심하게 주눅 들어 있었다. 고용주가 생계뿐만 아니라 목숨도 움켜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악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무서워할 만도 하지.' 군주에게 공포란 좋은 것이었다. 적군에게든 아군에게든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편이 나았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등에는 칼을 꽂을 수 있어도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히 해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악명을 지금까지 유용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정했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 가정 교사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 이상하게도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칼을 꽂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상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해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발드르는 이 여자가 자신을 해칠 수 있으리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독살이 아니고서야 이 여자가 날 해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그녀가 제 가슴속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는 것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두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무척 곤히 자고 있었다. 잠든 얼굴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의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정 교사가 눈을 뜨지 않길 바랐다. 눈을 뜨면 그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말 테니까. “⋯⋯" 한참 동안 발드르는 말없이 잔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치 형태의 매끈한 이마와 짙고 단정한 눈썹과 풍성한 속눈썹, 그 이마의 선과 이어져 뻗어 나간 콧날하며 무슨 꿈을 꾸는지 가끔씩 움찔거리는 입매 등을. 자면서 그녀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는 옷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정 교사는 가슴 부분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예전 어머니의 드레스처럼.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런 옷이 유행인가?' 그 드레스는 이곳 기후를 견디기엔 너무 얇았다. ❖ ❖ ❖ '대체 책이 어디 갔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점차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갔다. '이젠 정말 폴린느 부인께 말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날에도 나는 브륄을 타고 산책을 했다. 상념에 젖어 한참 생각 없이 말을 몰다 보니 도착한 곳은 사과 과수원 앞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공기 중에 달콤하고 신선한 사과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사과 냄새에 이끌려 온 말이 나를 보고 잎사귀 같은 두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는 사과 수레를 끌던 말이라고 했지.” 나는 브륄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과수원 울타리 밖에도 자연적으로 자라난 사과나무들이 있었고, 일꾼이 따 주지 않은 사과나무는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금방이라도 가지가 부러질 것 같았다. 알이 좀 작지만 그래도 먹음직한 사과가 지천으로 굴러다녔다고, 브륄은 신나게 사과를 입에 넣고 깨물었다. 사슴도 다람쥐들도 사과를 먹는 중이었다. '나도⋯⋯ 좀 가져갈까?' 과수원 사과도 아니고 짐승도 먹고 있으니 방에서 간식으로 먹을 것을 좀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에 나는 브륄의 등에서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주머니가 없다는 것이었다. 말을 탈 땐 고삐를 쥐어야 하니 두 손을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다람쥐 처럼 볼에 넣어 갈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외진 곳이라 달리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치마폭에 사과를 좀 담아 가려 했다. 치마폭에 사과를 담은 뒤 긴 옷자락을 주머니 삼아 사과를 넣어 묶은 다음 말에 탔다가, 내릴 때는 두 손에 들고 가자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귀족답지 못한 일이지만 뭐 어떤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치마를 걷어 올리자 자연히 두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숙여 낙과의 상태를 보아 가며 알이 굵고 상하지 않은 것을 골라 치마폭에 담았다. 많이 가져갈 것도 아닌데 일단 사과를 줍기 시작하자 그저 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너무 많이 주웠나? 브륄도 좀 줄까.' 사과를 줍는 데 몰두하던 내가 뻐근한 허리를 폈을 때였다. 내 두 눈에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그였다.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 '흐억.' 원수가 생기면 도처에서 그를 만난다고 하던가? 내 경우가 딱 그렇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놀라 치맛자락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우르르, 사과가 굴러떨어졌을 때, 그와 나의 두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가 그토록 강렬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설마 다 보았을까? 공작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참으로 외진 곳에서 산책하는군.” 공작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예⋯⋯!” “사슴뿔에 받혀 봤소?” “예?” “사과 냄새를 맡은 산짐승들이 사냥터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리니 저택 가까운 곳의 산책로를 이용하시오.” “예.” '지금⋯⋯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 정말 적응 안 되는 화법이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반대로 말하면, 그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으로 온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얼른 사라져 드리자.' 나는 눈으로 브륄을 찾았다. 브륄은 사과나무 아래서 코를 박고 사과 삼매경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척이나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함께 산책하겠소?” “예?” “혼자 걸으니 적적하군.” 나는 생각했다. '잘못 걸렸구나.' 하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결국 나는 꼼짝없이 그와 산책하게 되었다. 나는 이번엔 할 말이 없어 침묵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나 아가씨가 요즘 어떤 생활을 하고 또 요즘엔 어떤 수업을 중점적으로 하는지 주절주절 말했다. 내 말을 다 들은 공작이 말했다. “그렇군.” 그리고 대화는 한참 동안 끊겼다. 나는 뻐근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을 맛이다.'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번뜩 잃어버렸던 책이 떠오른 것은. 그렇다.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책 주인에게 책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기에. 하지만 마음먹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죽 솟았다. '굳이 그래야 할까? 그냥⋯⋯ 폴린느 부인에게 살짝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때부터 나는 두 손에 밤송이를 쥐고 걷는 것 같았다. 양심이 실수를 고백하라고 나를 찔러 댔다. 나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라도 폴린느 부인에게 말할걸.' 여우 피하다가 범 만난다더니. 나는 그냥 오늘 밤에 폴린느 부인께 말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양심의 질책은 가혹했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저, 공작 각하.” 내가 그를 부르기만 하고 머뭇대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녹색 눈이 반짝하고 햇살에 부딪쳐 빛났다. 마치 스스로 광원을 가지고 빛나는 것처럼.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오.” “저, 그게, 저 제가⋯⋯ 그.” 나는 두 손으로 치마를 구깃거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책을 읽어버렸습니다! 교재 목적으로 사용해야 할 서재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책까지 잃어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책은 변상하고 서재 열쇠도 반납하겠습니다! 그밖의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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