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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화


27화 너무 속을 드러냈다 생각한 듯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옷이 얇다고 했었구나.' 동시에 그가 대체 왜 일개 가정 교사의 옷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이해되었다. 그는 이미 선례를 겪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생각해 왔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공작이 화제를 바꾸었다. “예.” “말하시오.”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한 통이면 됩니다.” “누구에게?” 그는 내게 되물었다. “마엘 공자에게?” 마엘 도련님이라니? 나는 어리둥절했다. 물론 서신을 여러 사람과 주고받을 수 있다면 나는 마엘 도련님께도 편지를 써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편지를 보내 내 소식을 알리고 싶은 것은 가족이었다. “아닙니다. 제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면 어머니와 동생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지요. 답장을 받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제 사정이라도 알리고 싶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단 한 통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누구라도 가족에게 쓰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대가 마엘 공자에게 서신을 쓰고 싶어 할 줄 알았소. 유배를 풀어 달라고. 그런데 그대는⋯⋯ 가족과 친한가 보지?” “⋯⋯.” “부럽군, 누구나 다 다정한 가족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오.” 그는 말을 마친 후 술잔을 비웠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질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또한 질문은 생각보다 빨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공작 각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말하시오.” “공작 각하께선⋯⋯ 어째서 혼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 '허억.' 그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다소 무례하진 않았을까. “왜 혼인하지 않았느냐고? 글쎄.” 그러나 공작은 순순히 질문에 답해 주었다.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오.” “⋯⋯.” “그대도 귀족의 일원이니 귀족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혼인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지. 나 정도의 지위에 오르면 혼인할 수 있을 만한 신붓감들도 제한되오. 그들도 신랑감이 제한되는 건 마찬가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약속한 봉신이긴 하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공작령을 거느린 그 정도 되면 같은 공작가뿐 아니라 왕자나 공주와도 혼인할 자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자격은 반대로 격이 떨어지는 백작 이하의 귀족과 결혼할 시 그 품위에 손상을 입는다는 뜻과도 같았다. “신붓감들은 대부분 공주들이지. 살면서 아무 고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 신붓감들이 과연 이곳으로 와 내 신부가 되기를 원할까? 이곳은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땅이오. 지금은 단단해 보이더라도 언제 화마에 휩싸일지 알 수 없고, 과부가 되기도 쉽지. 그뿐인가, 재밋거리는 부족하고 1년 중 따스한 날도 얼마 없소. 나는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이 땅을 미워하는 것과,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평생을 고통받는 걸 이미 충분히 보아 왔소. 그런데 내가 그 전철을 밟아야 할까? 굳이? 그 여자가 누구든 우리 둘 다에게 못 할 일이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비슷한 기후와 사정을 가진 타국의 공주나 공녀와 혼인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 마음을 읽은 듯이 그가 말했다. “더군다나 내 혼인에는 여러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소. 그대가 왕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시오. 만일 내가 격이 비슷한 타국의 공주와 혼인했을 때 생길 문제점을.”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타국의 공주와 혼인한다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타국의 왕위 계승권 일부와 공국의 작위 계승권을 갖게 된다. 때에 따라선 그 자식이 타국의 왕위에 오른 뒤 동시에 공국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지 않소? 나는 이미 골치 아픈 일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소.” 그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마당에 내가 혼인까지 하면서 더 많은 책임과 문제를 떠안아야겠소? 나는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소. 다정한 가족을 가진 그대는 모르겠지만, 불행한 가정을 갖느니 혼자가 낫소. 나는 지금 너무나도 편하오.” 사실 여기까지 들은 것만 해도 고용주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알게 되긴 했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하고, 고용주야 그 선을 마치 없는 것처럼 넘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고용인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발을 빼고 좀 더 가벼운 화제로 주제를 전환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외람되오나 공작 각하께서는 엄밀히 말해 혼자는 아니십니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독주 때문에 돌아 버린 게 분명했다. “뭐?” “공작 각하께는 아나 아가씨가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이미?”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충고하듯이 나는 그에게 내 속마음을 꺼냈다. “또한 피로 맺어지지만 않았을 뿐 공작 각하의 영지를 맡아 관리하는 봉신들과 영지 내 주민들이 모두 각하의 자식이나 마찬가지고, 이 저택만 해도 백여 명은 넘는 가솔을 거느리고 계시지요. 공작 각하께선 혼자가 편하다 하셨지만, 실제로 홀몸은 아니십니다. 오히려 각하께선 안주인의 자리를 비워 뒀기 때문에 더 많은 의무와 문제를 짊어지고 계실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 아까우냐 하면, 그였다. 바로 이 남자가 혼자 지내는 것이. “각하께 혼인은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편안하기만 한 궁정 생활에 익숙한 공주들은 이 땅에 오면 분명 고역을 치를 터였고, 어쩌면 그의 어머니처럼 평생 적응을 못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공작 각하께선 모든 공주님들이 다 어머니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지만, 세상 모든 남자가 같지 않은 것처럼 모든 여자도 같지 않습니다.” 만일 사랑이 있다면. 내가 아나와 그의 배려 덕에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 나를 사로잡았다. “어딘가에 공작 각하와 이 영지를 제대로 알아봐 줄 분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지레짐작하여 혼인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쉽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왜? 그가 광대한 영지를 가진 부유한 남자여서? 영지 밖에 퍼진 악명에 비해선 의외로 젊고 잘생긴 남자여서?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내 마음 안에서 그에 대한 첫인상이 변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바뀌는 계절처럼. 처음에는 그가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하면, 글쎄, 그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기는 하나 그가 그저 공포스럽기만 하느냐 하면 아니었다. '나는 혹시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나 덕도 있었지만 공작 덕도 있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인정해 주었고, 내게 겨울이 오기 전 내 나름의 대비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그가 만약 내게 베풀어 준 것만큼만 자신의 배우자에게 해 줄 수 있다면, 아니, 그보다는 분명 더 다정하게 배려해 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누가 저 남자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술에 취한 머리가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었고, 멀쩡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어 갔다. '공작은 잘생겼고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대귀족이며 딸은 토끼처럼 귀엽고 착하다. 겨울이 길고 지루하고 추운 것이 대수인가? 그만큼 여름과 가을이 아름다운데. 물론 여름에 그가 전장으로 떠나는 것이 걱정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 불안감만 견딜 수 있다면, 저런 남자와 혼인하는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불행이 아니라.' “희박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혼인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 왜냐하면 내가 궁정에서 몇 년간 겪어 본 결과, 겉으로 보기엔 잘생기고 부유한 귀족 남자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명도. 나는 그곳에 정직함, 도덕성, 영원한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곳은 마치⋯⋯ 짐승 우리 같았다. 그곳보다는 차라리 이곳이 낫지 않을까, 좀 단조로울 수는 있어도. 만약에 그 곳에 환멸이 난 공주들 중 이곳에 오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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