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8화
28화
'저 남자의 진가를 알아주는 다정한 여자가 나타난다면.'
“만일 이 영지에 제대로 된 안주인이 있다면,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리하고 공작 각하께서 매년 저택을 비우실 적에 각하의 대리인이 되어 대신 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아나 아가씨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그러나 여기서부터 나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 각하께서 영민하고 다정한 분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뭐?”
“공작 각하께서는 충분히 그런 분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그리고 말을 다 마치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것을.
“그게⋯⋯.”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 맞는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일그러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헉.'
그제야 내가 선을 제대로 넘었음을 깨달았다. 가까운 사이에도 하기 어려운 무례한 말을 함부로 내뱉었고, 심지어 나는 이 말을 할 자격도 없었다. 내가 가정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가정을 꾸려 보지도 못한 주제에.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뒤늦게 내가 저지른 무례에 너무나 놀란 나는 황급히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너무 놀라 두 손이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대가 뭘 안다고?”
그는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불에 닿은 술처럼, 내 몸 안에 남아 있던 술기운이 모두 날아갔다. 나머지 식사는 아나가 죽을 뻔했던 깨진 살얼음판보다도 더 아슬아슬했다.
디저트로는 언제 또 먹어 볼까 그리워하던 음식이 나왔다. 크렘 브륄레였다. 그러나 나는 입안에서 파삭하게 깨지는 설탕 막의 달콤함도, 그 아래 부드럽게 혀를 감싸 오는 커스터드의 맛도 느낄 수 없었다.
“⋯⋯.”
그는 디저트에는 입에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 정찬실에서 방으로 돌아온 나는 드레스를 벗지도 못하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그에게 내가 무슨 조언 상대라도 된다고, 그는 그냥 혼잣말처럼 자기 생각을 꺼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왜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처럼 똑똑한 척을 했는가.
'미쳤나?'
침대에 누워 내가 한 말을 모두 후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믿기지가 않아.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일그러진 초록빛 눈동자가 내 가슴에 콱 틀어박혔을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편지 쓸 기회까지 날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히 내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 ❖ ❖
그 시각,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도 잠을 설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갈색 눈을 한 여자가 보였다.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의 두 망막 속에 맺힌 그 여자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양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웃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갑자기 왜?'
솔직히 그녀가 정찬실로 들어올 때부터 발드르는 당혹스러웠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잔느는 전과 달랐다. 누가 지금 이 여자를 초주검이 되어 이 저택에 실려 오듯 도착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뺨과 입술은 전보다 유독 붉고 두 눈은 반짝거렸다. 별처럼 빛나는 눈에 발드르는 먼저 시선을 피해야 했다. 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뭔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어제 그의 서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하나 그러면서도 시선이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발드르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잔느 드 툴루즈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는 많았다.
그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셨다. 때는 겨울, 몸을 데우기 위해 식사에 곁들이는 술은 다른 계절 때보다 독해졌지만, 이곳에서 겨울에 독주를 마시는 건 의식하지 않고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 발드르는 이 여자가 이 술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술의 독한 기운이 그녀의 두 눈을 더욱더 반짝거리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입장에선 심각한 실언을 불러왔다는 것도.
'각하께 혼인은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발드르는 잔느가 한 말에 사로잡혔다.
'공작 각하께선 모든 공주님들이 다 어머니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지만, 세상 모든 남자가 같지 않은 것처럼 모든 여자도 같지 않습니다.'
발드르는 그녀의 말을 해석하려고 계속해서, 신물이 날 정도로 오래 속으로 곱씹었다. 그러나 그 말은 소화되지 않고 그의 뱃속에 남아 그를 괴롭혔다.
'만약 어딘가에 공작 각하와 이 영지를 제대로 알아봐 줄 분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지레짐작하여 혼인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쉽지 않으십니까?'
발드르는 무례한 발언을 한 것이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어이없어하고 말았을 것이다.
'공작 각하께서 영민하고 다정한 분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말의 주인이 잔느였기 때문에 그 말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 마치 마법처럼. 발드르는 평정심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고, 식사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정찬실을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당연히도 잔느에게 오랜만에 먹은 크렘 브륄레의 맛이 어떠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대가 뭘 안다고?'
두려움을 모르던 그가 사냥꾼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짐승처럼 꽁무니를 빼고 도망친 것이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가?'
막상 그 말을 한 여자는 밤이 깊어 가는 지금도 그저 두 다리를 쭉 뻗고 자고 있을 텐데, 저 혼자만 여태 잠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자가 다 어머니 같진 않다고? 대체 내 어머니에 대해 뭘 안다고?'
선을 심하게 넘은 말에 혼자 의미 부여를 해 가며.
'게다가 그 말을 하는 그녀 자신도, 발이 풀리기만 하면 주저 없이 이곳을 떠날 게 아닌가?'
이곳에 유배 온 많은 유배자들도 그러했지만, 랑시스의 공주였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평생 증오했다. 공주 중 한 명이 이곳에 와 공작과 결혼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그게 자신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섯 여인 중 하필이면 어머니를 선택했고, 어머니는 그 선택으로 짧은 생 내내 고통받았다.
당신이 다섯 자매 중 나를 고르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닌 다른 자매를 골랐더라면, 내가 당신 눈에 들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증오는 커져 갔다. 평생 혼인하지 않고 궁정의 중심이 되어 여러 애인과 염문을 뿌리던 자매도 있어 상실감은 더했을 것이다.
형과 그는 아버지를 내내 미워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 왔다. 그의 눈에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분노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차라리 아들에게라도 애정을 느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다른 고귀한 귀족 부인들처럼 젖을 먹이는 일은 유모에게, 놀아 주는 일은 보모에게, 가르치는 일은 가정 교사에게 맡겼다. 불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전문가였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손을 거친 여인들이라서인지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다.
발드르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가 왜 그것을 느끼지 못했겠는가? 갈증이 난 사람은 멀리 떨어진 물 냄새도 맡는 법인데.
어렸을 때 발드르는 차라리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를 바랐다. 불과 얼음의 결혼 같지 않은가, 둘은 서로를 해치는 관계였다. 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면 아버지는 더욱더 얼어붙었고 대화 대신 일로, 전쟁으로,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와 형을 바라보며 빈정거리곤 했다.
'내가 공작과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학자였군.'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죽었다. 사인은 폐병과 감기였다. 한겨울에 너무 얇은 옷을 입은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었지만 사용인들은 공작 부인이 자살하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때도 그는 놀랍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저를 낳아 준 어머니이긴 하지만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녀는 너무 낯설고 먼 존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