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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화


41화 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모든 말을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나는 할아버지의 서재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보냈다는 것도, 아주 가끔 할아버지가 읽는 서적에 낙서를 해 놓고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것도. '어린애가 책을 훼손하니 화를 낼 법도 하신데, 할아버지께선 웃고 마셨죠. 그리고 또 가끔은 제가 쓴 글 밑에 다정하게 답을 써 주시기도 했어요. 할아버지와 저 사이에 책이 편지처럼 쓰이는 일도 잦았습니다.' 몰려드는 추억에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서재는 없어도 좋으니, 그때 그 책 중 한 권이라도 제 손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나는 그 말을 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재에서 공작님을 마주쳤다.     그때 나는 읽은 책을 제자리에 정리해 놓고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재미있어 보이는 제목의 책이 까치발을 들면 닿을 만한 높이에 있었다. 하지만 손을 뻗으니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았다. 끙끙거리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내 손끝을 덮듯이 하여 책을 대신 꺼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여기 있다는 게 놀랍지는 않았다. 이곳은 그의 서재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와 닿은 손끝이 저린 듯했다. 다른 손으로 그와 손이 닿은 손가락을 쥐고 있는데, 그는 내가 꺼내려던 책의 제목을 눈여겨보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매번 꽤 많은 책을 가져갔다 다시 돌려놓는데, 그걸 다 읽소? 아니면 책을 산책이라도 시켜 주는 것이오?”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다 읽기도 하고 산책을 시켜 주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으면요.” “그럴 테지.”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곤 갑자기 생각난 듯이 내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줄 게 있소.” 그리고 공작은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 내게로 왔다. 그의 손엔 낡아 보이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공작은 그 책을 내게 건넸다. “자.” “이게 무엇입니까?” 나는 그가 내게 그 책을 준 이유가 단순히 내게 추천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이 책 좀 보시오. 어딘가 익숙하지 않소?” 그 말에야 나는 그가 건넨 책을 살펴보았다. 낡고 너덜거리기까지 하는 책장은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그 책은 우화집이었다. '이 책은 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퍼뜩 날카로운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쓰여 있는 익숙한 필체의 글씨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우리 꼬마 망아지. 할아버지의 글씨였다. 너의 아홉 살 생일을 축하하며. 낡은 책의 첫 장에는 할아버지의 서체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제 막 어른들의 책을 읽는 데 맛을 들인 네겐 이 책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란 걸 안다. 하지만 원래 진실은 단순하고 지혜는 쉬이 읽히는 법. 맛있는 음식을 꼭꼭 씹어 먹듯 이 책을 여러 번 읽거라. 그럼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담은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말미에는 할아버지의 서명이 있었다. 충격에 사로잡혀 얼어붙어 있는 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책에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 내게 말하지 않았소? 조부의 서재에 있던 책이 경매에 넘어갔다고. 그 말을 듣고 그 일부가 이곳에 있으리라 짐작했소. 그만한 양의 책이 경매에 넘어갔다면 아버지께서 입찰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그대가 읽었을 만한 책 위주로 낙서가 되어 있는 책을 찾아보았소. 그리고 이 책을 발견했지. 첫 장뿐 아니라 우화 곳곳에도 그대의 조부가 글을 적어 놓았더군.” 그 말을 듣는데 내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입이 열리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내 심장을 꽉 움켜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충격 속에서 그가 달리 보였다. 무엇이 달리 보였는가⋯⋯ 하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던 나의 심장은 그 순간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공작은 얼어붙어 있는 내게 말했다. “그 책을 그대에게 주겠소.” “⋯⋯제게요?”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그 심장 소리를 감추려 나는 들고 있는 책을 두 손으로 가슴에 대고 꽉 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이 책을⋯⋯ 저에게 주시겠다고요?” “그렇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의 책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싫은가?” 싫을 리가 없다. 그러나 감사하단 말이 바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이상하냐면 그가 그냥 잡담으로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이 서재를 뒤져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책을 찾아주었다는 것이. 엄청난 양의 책이 모여 있는 서재였다. 그저 책을 훑기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텐데. 심지어 그렇게 시간을 써도 찾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그는 내 말만 듣고 시작한 것이다. 내게 알리지도 않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제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거렸다. 관자놀이에 맥박 뛰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나는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왜?' 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이 영지에 도착하기 전 그에 대해 들은 소문은 피비린내 나는 것뿐이었다. 물보다 피를,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좋아하고, 잔인하고 피도 눈물도 없으며 국왕 폐하에게도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내가 이곳에 와서 실제로 겪은 그는 어떤가? '이 사람은 내게 왜 이렇게 다정하지?' 소문과는 너무 다르지 않나.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고,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가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전혀 무섭지도 않았고, 사납게 느껴졌던 얼굴은 잘생겨 보였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나는 그의 두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워 시선을 피해야 했다. 남자의 눈을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동시에 얼굴이 뜨거워졌고, 책을 든 두 손이 떨렸다. 가슴에 대고 있던 책을 황급히 등 뒤로 숨긴 것은 그에게 손의 떨림을 숨기기 이유에서였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소?” 그는 재차 물었다. 나는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에 듭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서 잠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대가 좋다고 하니 나도 좋소.” 뒤늦게 감사를 전하자 그의 두 눈이 모양 좋게 구부러졌는데 그것을 본 내 마음도 구부러지는 듯했다. 잠깐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속이 울렁거려서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책 몇 권을 뽑고 허둥지둥 서재를 빠져나갔다. '내가 왜 이러지?' 그에겐 별다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서재에서 읽을 책을 찾다 문득 내 말이 생각났고, 심심하던 차에 책을 찾다 우연히 조부의 흔적이 남은 내 책을 손에 넣은 것이겠지. 그밖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되짚어 봐도,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뛸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그는 내게 늘 다정했었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가 내게 선물한 말과 사과 바구니가 기억났다. 그리고 내게 선물한 곰 가죽도. 지금까지 고용주에게 이런 배려와 다정함을 받은 적이 있던가? 없었다. 고용주와 이렇게 자주 식사 자리를 가진 적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어쩌자는 거지?' 나는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용주가 내게 다정하다고 해서, 뭘 어쩌잔 말인가? 나는 내 처지를 되새겼다. 그는 우리 가문의 명예가 가장 드높던 순간에조차 탐낼 수 없을 만한 존재였다. 스카디 공작이라니⋯⋯ 그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는 적어도 같은 공작가나 왕족은 되어야 했다. '정신 차려, 잔느.'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더 이상 마음이 풀어헤쳐지지 않게 단단히 졸라매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라도 다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러나 한번 흔들린 마음이 제자리를 잡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마음을 다잡고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던 책을 읽어 보려는데,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어⋯⋯?' 쿵 쿵 쿵. 그리고 심장은 너무도 불규칙하게 뛰었다. 쿵 쿵 쿵 쿵 쿵. 궁정에서 내게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궁정 사교계에는 자유연애가 만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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