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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외전 1화


외전 1화 스카디의 최남단 관문 앞에 도착해 잠시 창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차디찬 바람이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적응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무서웠지.' 겨울엔 언젠가 저 추위가 나를 얼어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실제로 한 번은 죽을 뻔했다. 얼어붙은 겨울 호수에 빠져서. '그런데 돌아오다니.' 하지만 이젠 무섭게 느껴졌던 바람이 마냥 시리지만은 않았다. '그것도 스스로 이곳에 돌아오길 원하다니.' 아니, 오히려 상쾌하고 후련했다.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이 바람마저.' 마차는 관문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더 달렸다. 경비병이 선 저택의 입구에 도착해 철문이 열리고 마차가 저택의 뜰안으로 들어가자 이곳을 떠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나는 창밖으로 뜰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 주신 마차를 타고 이곳을 떠났을 때의 감정이 나를 새삼 옥죄어 왔다. 사실, 나는 그때 엉엉 울고 싶었다. 가족이 미친 듯이 보고 싶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청혼을 받고 스카디로 돌아오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되는구나. 아마도 평생.' “잔느.” 감상에 젖어 밖을 내다보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보면 아나가 많이 좋아할 거요.” 그의 손이 의자에 얹은 내 손 위로 포개졌다. 나는 아나와 헤어졌을 때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나가 무척 보고 싶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에는 아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떠나면 아나는 어떻게 될까?' 교사와 학생은 언젠가는 헤어질 운명이다. 하지만 나는 떠나면서 아나가 눈에 밟혔다. 갑작스러운 이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세 학생을 가르쳤지만 내겐 아나가 가장 각별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고 공작저로 오게 된 아나와 유배인이 되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다시피 공작저로 오게 된 나, 아나와 나, 우리는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인지 서로를 망망대해 위 뗏목처럼 의지했다. 그런데 내가 유배가 풀렸다고 갑자기 아나를 버리듯 떠난 것이다. 나는 나를 떠나보낼 때 흘렸던 아나의 눈물을 기억했다. 하지만 아나의 얼굴을 떠올리니 불현듯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나를 맞이 하던 공작령의 안개처럼. '아나가 정말 날 다시 보고 싶어 할까?'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가정교사로서 공작령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정교사가 아닌 새어머니가 되어도?' 아나가 나를 좋아했던 까닭은 내가 가정교사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돌아와 새어머니가 된다고 하면 아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가 빈 어머니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동안 우리가 나눴던 우정의 진의를 의심하게 되진 않을까?' 내가 공작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나에게 접근했다고 오해하진 않을는지, 갑자기 든 생각에 가슴이 옥죄여 왔다. 같은 침대에 누워 아나를 옆구리에 끼듯이 앉고 그녀의 눈물 젖은 목소리를 듣던 날 밤이 떠올랐다. 아나가 내가 서로를 의지했던 나날들. 내가 새어머니가 된다고 하면 아나는 충격에 마음의 빗장을 닫을지도 몰랐다. 그럼 아나는 얼마나 외로워질까? 그런 걱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와 결혼한다는 건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그와 결혼한다는 건 다시 말해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청혼을 받아들일 적에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서로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혼인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물론 그의 정부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모든 것을 충분히 고려했다 생각했는데 머지않아 낳을 아이 생각을 하자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정말 나 같은 사람이 그와 결혼해도 될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갑자기 말을 잃어버린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마 걱정으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얼굴에 어렸을 근심을 지우기 위해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추운가 보군, 그 옷은 너무 얇소. 가자마자 옷을 다시 장만합시다.” 내 손을 쥐었던 그의 손이 어깨로 옮겨 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체온으로 나를 녹이려는 듯이. 물론 그의 몸은 나도 모르게 긴장감으로 굳어졌던 몸을 풀리게 할 만큼 따스했다. 마차가 장원의 대문을 통과해 저택의 현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내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부가 현관 앞에 마차를 세우자 그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아.' 그의 손과 내 손이 맞닿았을 때 불현듯, 어떤 기억 하나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전에 공주님의 마차가 저택의 현관에 도착했을 때 공부방 창문 너머로 그것을 들여다보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호위를 받는 공주님을 질투하고 있었지.' 기억이 떠오른 그 순간, 동시에 바로 그때 느꼈던 감정이 소화되었다. '나는 그에게 결코 그런 존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 나는 공작저의 안주인이 될 자격을 지니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그와 나, 우리 모두의 선택이었다. 그 생각이 내게 아주 조금의 용기를 심어 주었다.     하지만 그 용기는 저택의 현관문이 열렸을 때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하녀의 표정을 본 즉시 꺼져 버렸다. 그녀는 그와 함께 온 나를 보더니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나온 폴린느 부인 또한 나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작님, 그리고⋯⋯ 툴루즈 양이 아니십니까?” 그럴 만도 했다. 사면령을 받아 저택을 떠난 가정교사가 주인과 함께 돌아오다니.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반대 상황이라면 나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리라. 폴린느 부인은 일단 공작님에게 갑작스레 공작저를 떠난 사정을 물었다. “그간 어디 계셨습니까, 공작 각하. 며칠 동안 한마디 말씀도 없이 사라진 데다 행방 파악도 되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그런데 여기 툴루즈 양은 어떻게⋯⋯?” “이 사람에게 청혼을 하러 갔소, 프랑에.”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양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 폴린느 부인은 가슴이 들썩거릴 만큼 숨을 삼키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내 청혼을 받아들였고. 이제 잔느 드 툴루즈 양은 스카디 공작 부인으로서 이 공작저의 안주인이 될 것이오.” 여전히 조금의 부연 설명도 없는 화법이었다. '이걸⋯⋯ 이렇게까지 생략한다고?' 나는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폴린느 부인을 바라보았다. 연로한 부인은 입을 벌린 채로 우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곧 폴린느 부인의 안색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부인의 두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가려는 것을 보았다. “부인! 부인, 잠시만요,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다 설명드리겠어요!”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설명? 전부 하지 않았나?” 전부는 무슨 전부?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방금 전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폴린느 부인을 부축했다.     “부인은 이 일을 오늘 처음 들어 무척 갑작스럽다 여기시겠지만 사실 공작님께서 제게 아무 전조 없이 청혼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후 나는 폴린느 부인의 방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그간 공작님께 흠이 될까 봐 숨겨 왔지만, 공작님과 저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렇다 해서 제가 공작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서서히 공작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나서⋯⋯ 공작님께서도 저를 사랑하신 것뿐이지요. 하지만 제 처지가 공작님께 어울리지 않았던 터라 마음을 알게 된 뒤에도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았을 뿐.” 사실 차를 마신다기보다는 식어 가는 찻물이 든 찻잔을 앞에 두고 그녀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을 해명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단어를 하나하나 고심해 가며 이전에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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