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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외전 14화


외전 14화 청년으로 성장하긴 했으나, 알에서 막 깬 새가 아직 부서진 알껍데기를 몸에 붙이고 있듯이 아직 앳된 티가 군데 군데 남아 있는 미청년이 발드르의 말에 웃으며 손등을 그에게 내밀었다. 왕세자는 여러모로 발드르와 대비되는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금발 고수머리에 흰 피부, 맑은 하늘색처럼 푸른 눈은 그의 완벽한 혈통을 상징했다. 비록 서자이기는 했으나 왕의 핏줄이 모두 사라진 지금 그에게 대적할 적은 없었다. 발드르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왕세자의 장갑 낀 손에 키스했다. “변함없는 그대의 충성과 헌신에 감사하오. 그래서,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오?”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발드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국왕 폐하께 남은 유일한 아들이긴 하나, 메트레상티트르의 자식이란 이유로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이가 많소. 병이나 우환 핑계를 대면서 말이오. 그렇기에 더더욱 랑시스의 대귀족인 그대가 자리를 빛내러 와 주어 고마울 따름이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궁정에서 열었던 그 어떤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없지 않았소? 아버지는 그대를 궁정에 끌어들이려 갖은 애를 썼지만 실패하셨지. 그런데 내 결혼식에는 참석해 주다니⋯⋯. 이제까지의 관습을 깰 만큼 우리가 친분이나 우정을 쌓은 적도 없지 않소? 물론, 내가 이전에 실례를 무릅쓰고 내 가정교사를 그대에게 맡긴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오.” 발드르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속으로 왕세자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겉모양과는 달리 궁정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왕세자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대와 친구가 되고 싶소. 그러니, 내게 원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어찌 되었든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알겠습니다, 왕세자 전하. 실은 이 경사에 기대어 전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발드르는 긴장했다. 바로 지금이 그와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대목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직감을 발드르는 알고 눈앞의 적은 모르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 저는 덫에 빠졌습니다.” “덫에 빠졌다고? 무슨 덫을 말하는 것이오?” 발드르는 왕세자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분명한 진실만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덫입니다.” 발드르의 말에 왕세자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사랑을 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저에겐 있습니다. 안고 있어도 원하게 되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자비를 베푸시어 저와 그 여자가 혼인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여자가 누구요? 공녀요, 공주요?” 왕세자는 질문을 던졌다. “공녀도 공주도 아닙니다. 제 영지에 있는 사람으로 작위는 있으나 가문이 영세하여 지금은 여염집 규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세자는 매끈한 턱을 만지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라면 훨씬 더 좋은 신붓감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의외로군.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보다 더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강력한 상대와 동맹을 맺거나 곳간을 채울 수도 있는 기회를 그르친다는 생각이 들진 않소?” “그 모든 기회보다도 그 사람이 제게는 가장 절실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는 예전에 내 아버지께서 그대와 내 이복누이를 혼인시켜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 말이 맞습니다. 제가 그 혼인을 거절했기에 폐하께서는 제 혼인 자체를 금하셨지요.” “그럼 내 누이와 혼인하지 않으려 한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오?” 발드르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왕세자가 부디 그의 침묵을 오해하기를 바라면서. 그는 풀숲에 숨어 사냥감이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숨을 죽였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기에 그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나라고 왜 사랑하는 이의 머리에 왕비의 관을 씌워 주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왕세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발드르의 심장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왕관의 권위는 의무에서 나오는 법이지. 내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소. 내 나라, 랑시스의 일이오.” 왕세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발드르를 쏘아보듯 응시했다. “그대는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예, 전하.” “망설이지도 않는군. 그대의 확신이 부러워. 좋소, 결혼을 허락할 테니 그대가 혼인으로 마땅히 얻었어야 할 것보다 사랑이 가치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결국 허가가 떨어졌다. 발드르는 환희에 찬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그가 가져온 청원서를 벨트의 주머니에서 꺼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전하, 제가 가져온 청원서에 서명해 주십시오.” 왕세자는 시종을 불러 펜과 잉크를 가져오게 했다. 발드르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으나 왕세자는 청원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인했다. 다음 날, 발드르는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해 잠시 자리를 빛낸 뒤 연회가 시작될 즈음 자취를 감추었다. 따지고 보면 발드르는 왕세자의 결혼식 날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훔치고 달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발드르가 돌아온 뒤, 그는 잔느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예정되어 있던 날짜에 제때 거행되었다. 왕세자의 결혼식이 있은 지 두 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평소 과묵한 그였지만 결혼식 날의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설명하려 하면 종일 떠들어도 질리지 않을 터였다. 발드르는 행운아였다! 얼굴을 붉힌 채 잔느가 춤을 출 때, 그는 잔느에게 춤을 배우게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잔느의 춤은 무척이나 우아했으니까. 그리고 잔느와 함께한 첫날밤은 그간 발드르가 애끓고 인내했던 나날들이 모두 보상될 정도로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첫날밤이 시작되기 직전, 발드르의 가슴은 설렘과 기쁨으로 시작도 전에 터질 것만 같았다. 목욕을 마친 뒤 준비된 신방의 침대 가에 앉아 발드르는 미친 듯이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는 잔느를 사랑하는 내내 잔느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 왔다. 너무 간절히 바란 나머지 꿈에 잔느가 나온 때도 있었다. 그는 꿈에서보다는 자신이 좀 더 정중하기를 바랐다. 잔느가 짐승처럼 변한 그를 보고 실망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욕망에 지배된 나를 보고 내게 환멸이 나면 어쩌지?' 잠시 후, 목욕을 마친 잔느가 신방으로 들어왔다. 신방의 촛불은 어슴푸레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지만 발드르는 어둠 속을 활보하는 짐승처럼 환하고 또렷하게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잔느는 살짝 몸을 떨고 있었고 무릎이 드러나는 얇은 재질의 속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걸 본 것만으로도 발드르의 얼굴이 굳으며 육체는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반, 그대로 침대에 눕혀 성난 자신의 것을 들이밀고 싶은 욕망이 반이었다. 짐승 같은 욕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해 왔는지 아시오?” 밤은 길었고,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발드르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잔느에게 말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했을 때 너무도 갈망한 나머지 꿈에 나온 적도 있었소.” “⋯⋯.” “그대도 나만큼 이 일을 원하고 있소?” 그의 질문에 잔느는 겁먹은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발드르는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자신만큼 잔느는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쩌지? 하지만 그의 마음에 의구심이 차올랐을 때, 잔느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발드르는 잔느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며 두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허락의 신호였다. 그는 잔느와 키스했다.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달콤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는 잔느에게 키스하면서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는 두 손으로 잔느의 가냘픈 몸을 어루만졌다. 너무도 작고 부드러운 나머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잔느를 끌어안아 들어 올렸다.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발드르는 잔느를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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