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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화


01. 전쟁 중에 그곳은 야전 병원이었다.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전쟁 중 그곳에서 목숨을 잃거나, 혹은 건졌고 제러드의 부하들 역시 그곳에서 목숨을 잃거나 혹은 부지하였다. 그는 한때 도첸 공화국에서 쏘아 올린 미사일에 상흔이 고스란히 보관된 병원의 별관을 주시했다.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가장 마지막에 간다는 그곳이 지금은 소아 병동으로 제 쓰임을 다하고 있었다. 어두운 그믐달 밤, 제러드가 피우고 있는 시가가 제 새끼손가락만큼 짧아질 무렵 소아 병동에서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사내의 안내에 따라 나오고 있었다. 제러드는 시가의 꽁지를 잘라 내고 남은 것을 도금된 케이스 안에 넣어 다시 코트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곧 딸깍, 문이 열렸다. “타.” “…….” 여자는 그가 누구인지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밤인 데다가 차 안은 겨우 형체만 식별할 정도로 어두웠고 또 그는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제러드는 사람이라기보다 달빛에 반사된 그림자처럼 보였다. 결국 쭈뼛거리던 여자를 누군가가 밀어 넣었다. 그녀는 작게 신음을 하고 차 안으로 엎어지듯 앉았다. “오랜만이네. 사샤 양.” “……아.” 그녀는 한참 만에 제러드의 형체를 식별했다. 그즈음 그가 운전석의 시트를 두어 번 두드렸고 차는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프랭크야. 내 오래된 운전수지.” 사샤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제러드는 웃으며 그녀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뒷말을 덧붙였다. “애석하게도 전쟁 통에 청각을 잃고 나서는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지. 그래도 운전 솜씨는 뛰어나다네. 신이 주신 재능이지.” “네. 그렇군요.” “병원 생활은 지낼 만한가?”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빅토르의 청혼을 거절했다더군.” 사샤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제러드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내 부하네.” “아.” “더그의 청혼도 거절했다고.” “……더그라면…….” “더글러스 소위를 말하고 있네.” “아.” “구걸하기엔 지나치게 예쁘다고 생각은 했네만, 설마 내 요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될 줄은 몰랐어.” 사샤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재밌다기보다는 더없이 곤란한 듯한 미소였다. 그러자 제러드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선뜻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잘 자랐군. 사샤 양. 그대로 두면 한 해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았는데 말이야.” 빅토르 하사가 소아 병동의 스무 살 처녀에게 반해 열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 전까지만 해도 제러드는 사샤와 10여 년 전 자신이 병원에 맡긴 그 인형 같은 소녀를 연결 짓지 못했다. 그러나 소아 병동에 아프로디테의 화신 같은 여자가 근무한다는 소문이 가시지 않고 돌자 제러드는 곧 그녀를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망울로 저의 이름이 ‘사샤’라고 말했던 그 녹색 눈동자의 소녀를 말이다. 과연 그녀는 사내의 마음을 훔칠 만한 미인으로 자랐다. 어두운 그림자가 가려도 퇴색되지 않을 만한 미모였다. 제러드는 새하얀 앞치마 위로 가지런히 모은 그녀의 두 손을 보았다. 핏물을 묻히는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곱고 깨끗한 손이었다. “사샤 양. 아직 모국어 기억하나?” “…….” 사샤의 고향인 네르아는 남과 북의 경계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나뉜 두 대륙은 서로 쓰는 언어가 달랐다. 아주 오래전 서방의 나라들이 세를 넓히며 땅따먹기 하듯 땅덩어리를 하나씩 지배해 나갈 때의 유산이 천년만년 이어져 온 것이다. “Kiom vi memoras la Esperan lingvon(얼마큼 기억하지)?” “Mi memoras tiom multe kiel mi lernis. ?enerala(배운 만큼이요. 장군님).” 사샤의 차분한 목소리에 그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Mi bezonas iun. Kiel trankvila kaj diskreta virino, kiu scias bone uzi la lingvon(사람이 필요해. 북반구 언어를 구사할 줄 알고 침착하고 신중한 여자).” 사샤의 미간에 옅게 금이 갔다. 그녀는 무구한 녹색 눈을 들어 제러드의 형체를 살폈다. 그의 의도는 아무리 해도 유추할 수 없었다. “?i estas por la estonteco kaj sekureco de via lando. Mi bezonas muelon por infiltri la Respublikon de Doi(조국의 미래와 안전을 위한 일이지. 도첸 공화국에 잠입할 첩자가 필요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러드는 사샤가 자신의 말을 모두 이해했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사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그는 묘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어. 공화당 의원의 비서 노릇만 해 주면 되네. 적으면 2주, 길어도 한 달이네.” “잠시만요, 지금…… 그 말씀은…….” 사샤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며 망설였다. “저보고, 지금 다시 국경을 넘어 도망쳐 나온 곳으로 돌아가란 말씀이세요?” 도첸의 군사들은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모조리 멸살했다. 구덩이 앞에 세워 놓고 총으로 쏴 장작더미처럼 쌓인 시체더미 위에 흙을 덮는 것은 간신히 살아남은 동족들이었다. 사샤는 오빠와 함께 손으로 흙을 긁어 부모의 시체 위를 덮었다. 부르터진 손가락보다 더 아픈 것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제 나라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사실. 죽음이 두려워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뒤로하고 도망쳐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이제 사샤의 기억 속에 조국 네르아란 도첸인들에게 점령당해 사람을 가축처럼 죽이는 공포와 절망의 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째서요?” “자네의 고향 아닌가.” “아니요. 그곳은 제 고향이 아니에요. 제 고향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거긴 도첸의 소굴일 뿐이에요.”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해.” “언어에 능통한 사람은 아주 많아요. 우리 병동만 해도 북반구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해.” “…….” “젊고, 아름다운 여자면 더 좋지.” “…….” 제러드는 사샤의 새싹처럼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슬프고, 신비해 보이면 금상첨화고.” “…….” 사샤는 할 말을 잃었다. 함께 국경을 넘어 도망친 오빠 역시 연합군에 징병되어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던 사샤를 병원에 취업시켜 준 것이 바로 제러드였다.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고 있던 그녀에게 제러드는 동전 한 닢을 던져 주는 대신 깨끗한 옷과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사샤는 왜 그가 그날 생면부지인 저를 병원에 취업시켰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 되리란 것은 예감했다. 설마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준비는 다 되어 있네. 새 신분, 새 이름, 새 옷도 모두 다 준비되어 있어. 자네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 공화당 의원의 비서 노릇만 하면 돼. 그게 다야.” “못 해요.” 사샤는 넋이 나가 대답했다. 못 한다. 당연하다. “할 수 있어.” 그는 단언했다. 대책도 없이 자신감에 찬 말투였다. 그런 태도에 사샤는 기꺼이 자신을 변호했다. “전 못 해요. 아시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기껏해야 핏자국을 닦고, 붕대를 감고, 침대를 치워 주는 정도라고요. 그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전 군인이 아니에요! 그저 천애 고아에 병원의 잡부일 뿐이라고요!” “그래서야.” 제러드는 격앙된 사샤의 목소리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네?” 결국 다시 당황한 것은 사샤였다. “사샤 양.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지. 하지만 아니야. 국경 너머, 도첸의 군사들은 아직도 이곳을 겨냥하고 있네. 다시금 피땀으로 일군 자네의 터전을 잃고 싶진 않겠지. 그렇지?” 신문을 통해, 라디오를 통해 그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스파이, 첩보, 보이지 않는 칼날, 서로를 겨눈 미사일. 병동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건물이며, 파편들이 수두룩했다. 도첸의 진군은 멈추었어도, 남과 북으로 경계를 나누어 선을 긋고 거친 철망으로 성벽을 세웠어도 갈라진 땅 위의 긴장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러드의 말이 맞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긴 전쟁 끝에 염세적으로 변한 사람들은 더 이상 미래를 꿈꾸거나 그리지 않는다. 그저 망나니처럼 하루하루,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 뿐이다. “나라의 운명이 자네의 손에 달렸네. 자네가 도첸인 손에 부모와 오빠를 잃었듯 또 누군가 자신의 가족을 잃는 비극은 더는 없어야지.” “…….” “결심이 서면 이 번호로 연락 주게.” 제러드는 쪽지를 한 장 내밀었다. 사샤의 파리한 손이 머뭇거리다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는 여기서 내리지. 프랭크가 자네를 병원까지 데려다줄 거야.”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러드는 코트 깃을 세우며 한적한 거리 위로 사라졌다. 프랭크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했다. 사샤는 침묵 속에 제 손 안에 구겨진 쪽지를 폈다. 그 어떤 이름도, 명칭도 없이 건성으로 쓴 전화번호 한 개. 눈앞에서 꽃잎처럼 떨어진 부모를 떠올렸다. 곧 망명국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며 군장을 하고 눈앞에서 사라진 오빠를 떠올렸다. 사샤는 비껴가는 풍경 속에 저 혼자 중얼거렸다.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렇지……?” *** 제러드 로너는 전쟁 중에도 그리고 지금도 야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한때는 움막이, 한때는 지하 벙커가 그의 자리였고 지금은 UN 정보기관의 4층 사무실이 그의 자리였다. 제러드는 햇빛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건물의 입구를 살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가 바라는 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그는 고단함에 제 주머니를 뒤져 시가를 꺼냈다. 지난번 사샤를 만날 때 피우던 것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가에 막 불을 붙이는데 그의 자리에서 전화가 울렸다. 제러드는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제러드 씨. 대외 전략 팀의 짐 마이어 씨가 오셨는데요. “들여보내.” ―네.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혀 제러드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제 손가락을 튕기며 긴장감을 해소하려 했다. 딸깍 문이 열리고 사내가 중절모자를 벗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러드.” “짐.” 커다란 사무실에 그의 구둣발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아주 애매한 자리에 멈춰 섰다. 채 벗지 않은 장갑은 그가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빅 파이가…… 생포됐습니다.” “누구에게?” “남자는 폰 윌렌도르프…….” 짐은 제러드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죽였고 제러드는 시가를 든 손으로 책상을 쾅 내려쳤다. “빌어먹을 파시스트 놈들.” 빅 파이는 연합군 전략 사무국에서 가장 공들여 키운 첩보 요원이었다. 10년을 키워 10년 동안 제 아래에서 헌신하던 가장 뛰어난 동료이자 부하, 그리고 제 손으로 키운 가장 마지막 제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요원이 누구지?” “스노우 맨입니다.” 요원들은 모두 별칭을 붙였다. 이름은 늘 바뀌었고, 본명은 보안을 위해 가능하면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연합군 내부의 방침이었다. “믿을 만한 자인가?”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잔잔한 물 밑에서 서로를 속고 속이고, 먹고, 먹히는 냉전의 시대. 3년 전 방첩부 내부에 스며든 도첸의 쥐새끼가 발각된 이후 제러드는 제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모두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살얼음판이었다. 방첩부는 물론 저가 몸담은 전략 사무국도 대외적으로 신임을 잃어 그 역시 끈 떨어진 신발 신세였다. 다시 연합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성과를 내는 동시에 매사에 신중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빅파이의 거처를 알아내라고 해.” “네. 거처를 알아내서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구출하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 구출은 불가능하다. 윌렌도르프라면 서기장 라을의 아래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자. 그에게 걸려 자백하지 않는 요원은 없었다. 전쟁 중이던 때를 포함해 도첸의 정부에 스며들어 이토록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자는 주도면밀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므로 빅파이가 윌렌도르프에게 발견되었다면 구출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란. “죽여.” 고통스럽지 않게 천국의 땅을 밟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 사샤는 기침을 할 때마다 아이가 내뱉는 붉은 피를 닦아 주었다. 손을 마주 잡고 고열에 들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의 젖은 이마를 식혀 주느라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몰랐다. “사샤. 가슴이 너무 아파.” 아이는 제 생명줄보다 더 가는 목소리로 뜨문뜨문 말했다. “약을 먹었으니 나아질 거야. 조금만 참아.” 이제 겨우 아홉이 된 바비는 사샤와 처지가 같았다. 그녀는 홀로 남겨졌고 바비는 홀로 버려졌지만 어쨌든 둘 다 고아였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행인이 이 병동으로 데리고 온 후, 그는 온전히 사샤의 몫이 되었다. 그의 간호, 병원비, 약값까지 사샤는 자신의 월급으로 충당했다. 그마저도 아레사 수녀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나 죽는 거야?”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다. 좁아진 기도 탓이다. “아니. 넌 아직 안 죽어. 아레사 수녀님이 그랬잖아. 하나님이 네 차례가 아직 아니라고 하셨다고.” “거짓말이야.” 사샤는 삽시간에 뜨거워진 수건을 다시 찬물에 헹궈 바비의 이마에 올렸다. “아레사 수녀님은 거짓말 안 해.” “아니야. 어른들은 모두 다 거짓말을 해.” “…….” “사샤는 아직 몰라서 그래.” 이제 겨우 아홉 살이면서 마치 아흔은 된 것처럼 소년이 말했다. 사샤는 아이의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넌 아직 어려, 바비. 너에게 기적이 일어날 시간은 차고 넘치게 많아. 너 나랑 약속했잖아. 언젠가 바다 건너 새로운 곳에 나를 데려간다며.” 바비는 늘 사샤와 결혼을 해 바다를 건너 먼 곳으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도 없고, 전쟁도 없고, 거짓도, 죽음도 없는 곳. 지천에 꽃과 열매가 있고 비옥한 땅에 무엇을 심어도 풍성하게 자라나는 곳으로 말이다. 다분히 공상에 지나지 않는 그 이야기를 사샤는 매번 진지하게 들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자들은 누구나 그렇듯 사샤 역시 유토피아를 꿈꿨다. 어딘가 고통 없는 곳이 존재하기를 그녀 역시 매일 바랐다. “그러려면 넌 아직 10년은 더 살아야 하잖아. 그래야 나랑 결혼하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곧 전쟁이 난다며?” 점심때 병원 마당을 산책하다 들었다. 도첸 병사들이 국경의 바로 앞에 모여들고 있다고. 이를 알고 있는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각 나라의 대사관들은 이미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고 했다. “헛소문이야. 종종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잖아.” “전쟁이 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어. 군인들은 무서워.” “…….” 아이는 저 혼자 중얼거리다가 졸린 듯 눈을 감았다. 사샤는 바비의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그의 병상을 떠났다. 곳곳에 아이들의 기침 소리가 났다. 보호자와 간호사는 널따란 병동을 빠르게 도느라 땀을 흘렸다. “사샤.” 막 모퉁이를 도는데 아레사 수녀가 손등을 들고 그녀를 불렀다. 손에는 누군가의 땀과 오물을 닦아 냈을 천 뭉치를 들고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을 했다. “바비는 좀 어떠니.” 사샤는 막막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오늘만 잘 넘기길 바라고 있어요.” “심지가 굳은 아이니 잘 넘길 거야.” “아레사 수녀님.” “응?” “곧 전쟁이 나나요?” 사샤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그 이후 다시 전쟁이 터질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된 적은 무수히 많았으나 지금처럼 진지한 적은 없었다. “정말로 각국의 대사관들이 이곳을 떠나고 있나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짐을 꾸려 남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전쟁보다는, 먹고 살기 힘드니 살 만한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겠니. 이곳은 폐허와 다름없으니 말이다.” “…….” 아레사 수녀는 사샤의 어깨를 다정하게 문질러 주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사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복도에 비치된 간이 의자에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다시 전쟁이 날 리 없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에 물자를 퍼붓는 바람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힘들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지금 다시 전쟁이 나면 어쩌란 말인가. 그때에는 살아남을 자가 없다. 단어의 뜻 그대로 멸망하는 거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지. 하지만 아니야. 다시금 피땀으로 일군 자네의 터전을 잃고 싶진 않겠지. 그렇지?’   불현듯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 사샤는 주머니를 뒤져 그가 건네준 쪽지를 꺼냈다. 차마 버리기엔 불안해 늘 지니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하면서도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 이 폐허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한순간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기가 무서웠다. 지켜야 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미쳐 버리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처럼 사는 것이 나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사는 것. 구겨진 종이를 펴 전화번호를 쓸어내리는 사샤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분명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 사는 것은 왜 이토록 고통인가. *** 제러드의 감색 세단이 다시 한번 소아 병동 앞에 섰다. 새까만 밤길에 이미 드리워져 있던 작은 그림자는 차가 정차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사샤 양.” “제러드 장군님.” 차는 곧장 소아 병동 앞을 벗어났다. “영영 연락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어요.” 지난번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그녀는 멀어지는 병원 건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불안해서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자꾸만 불안해서요.” “…….” “장군님이 제게 건네신 건 심지에 불이 붙은 시한폭탄과 다름없어요. 버릴 수도 없고, 내가 들고 있을 수도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다른 이에게 건네줘야겠죠. 죽어 마땅한 사람에게요.” 제러드는 그녀의 대답이 흡족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가진 게 터지는 폭탄이긴 한가요?” “사샤 양이 하기에 달렸지.” “장군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제겐 무엇을 주실 건가요?” “국적을 취득하게 해 주겠네. 자네 오빠가 전선에 뛰어든 이유도 국적을 얻기 위해서였다면서. 전쟁 피난민들이 국적을 얻기 위해서 택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지. 전쟁에 참전해 영웅이 되거나, 아니면 백골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나는 그보다 빨리 해결해 줄 수 있네. 사샤 양이 돌아오는 즉시 피난민이 아닌 이 땅의 주인으로서 주권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준비해 두지.” 운이 좋으면 20년, 운이 나쁘면 평생. 전쟁을 피해 도망 나온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정착촌에서 새로운 국가와 신분을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랬다. 전쟁에 참전하여 멀쩡한 사지로 돌아오든, 유골로 돌아오든, 아니면 달랑 군번줄 하나로만 돌아오든 신분이 확인된 자의 혈연에게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망명인의 자격과 국적을 주었지만 그 외의 수많은 피난민, 사샤처럼 고아이거나 아니면 가족이 행방불명되어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국적을 새롭게 취득하면 안정된 거주지에서 살 수 있다. 매번 검문 때마다 줄을 서 검사를 받고 매번 신분을 보증해 줄 보증인을 내세워 새로운 서류를 작성할 일도 없었다. “저뿐만 아니라, 저의 혈연까지도 가능한가요?” 전쟁터에서 행방불명이 된 오빠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까. 10년이 지난 지금은 돌아올 가능성보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한번 잡아 볼까 해서.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지.” “돌보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바비. 제가 없으면 그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돈도, 인력도 충분히 공급하지. 내가 약속해.”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세요. 신변을 정리해야 해요.” “그럴 필요 없어. 자네의 신분은 우리 쪽의 방침대로 알아서 정리될 거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UN 정보기관 전략 사무국으로 오게. 자네는 일주일 안에 도첸 국경을 넘어야 하네.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지.” 일주일? 그렇게 빨리? 제러드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사샤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중절모 아래로 그림자 진 그의 눈은 무겁고 차가웠으며 소름이 돋을 만큼 평안했다. “저는 아직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어요.” 제러드는 소리 내 웃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도 쾌활하여 오히려 숨 막히게 무서웠다. 그는 흘러내린 웃음을 채 닦기도 전에 말했다. 너무도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거야. 사샤 양.” “…….” “나는 자네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네.” “…….” 제러드는 마침내 차에서 내렸다. 사샤를 태운 차는 분수대를 돌아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그녀는 침묵에 휩싸인 채 제러드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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