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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화


02. 도첸의 짙푸른 국기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위조 신분증에 그녀의 이름은 ‘엘가 슈미트’였다. 도첸의 수도 네피란에서 나고 자란 공화당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당 보번 의원의 새로운 비서. 그것이 사샤가 가질 새로운 이름과 신분이었다. “색이 잘 나오지 않아 두 번이나 다시 들였어요. 생각보다는 꽤 괜찮게 나왔네요.” 사샤는 제 머리를 붉게 염색해 준 그치의 이름이나 신분은 알지 못한다. 다만 깐깐하고 다분히 신경질적인 성격이며 제러드와 함께 일하는 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피부가 너무 깨끗한 게 좀 마음에 걸리는군.” 제러드는 시가를 문 채 사샤를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하얀 앞치마와 잿빛 원피스 대신 붉은 머리가 돋보이는 진녹색의 스커트에 패플럼이 달린 짧은 소매의 재킷을 입은 그녀는 화보에 나오는 여배우처럼 근사했다. 무엇보다 가녀린 체구와 청아한 눈빛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제러드는 새삼 그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운명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간호사가 아니라 배우나 가수가 되었다면 지금과는 삶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녀에게 좀 더 빛나는 재능이 있었다면 근사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네르아로 넘어가서 햇빛을 많이 보기를 바라야죠. 그러면 주근깨 정도는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러드는 제 부하의 말에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르아는 사시사철 해가 뜨는 날보다 안개가 낀 날이 더 많고 마른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 더 많은 땅이었다. 그 덕에 도첸국에 의한 파괴와 개발은 덜 되었지만 볕을 받아 살이 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저는 보번 의원의 행적을 감시하고 기록하면 되는 건가요? 다른 지시가 올 때까지?” “그래. 프랭크가 국경까지 데려다줄 거야. 국경을 통과하면 우리 측 요원이 자네를 네르아 보번 의원의 당사까지 데려다줄 거고.” “그 사람은 어떻게 알아보죠?” “알아볼 필요 없어. 그쪽에서 사샤 양을 알아볼 테니까.” 제러드의 태도는 침착하다 못해 다소 심드렁했다. 시가를 문 채 휘적휘적 문서를 넘기는 손길이 그랬다. 마치 이제는 그녀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위아래로 훑은 이후엔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저를 찾아와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손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고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제러드가 문서에 서명할 동안 여자는 미리 준비해 둔 짐 꾸러미에 제러드가 내놓은 위조 신분증을 챙겨 넣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제러드 씨.” 제러드는 짙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막 사인을 마친 서류를 덮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의 눈매에 선연한 주름이 졌다. “행운을 비네. 사샤. 아니, 엘가 슈미트 양.” 사샤는 그의 인사에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작스레 모든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막연히 이 여행의 끝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정보기관의 일이란 언제나 짙푸른 밤에 시작해서 짙푸른 밤에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을씨년스러운 그믐달 아래에서 사샤는 국경을 넘었다. 미리 이야기된 듯 국경의 검문 초소에는 그 어떤 불빛도 없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프랭크는 사샤를 철창의 바로 앞에 세웠다. 그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작별의 인사는 초라하고 너무나 무심한 것이었다. 선을 넘은 것은 분명 그녀의 의지였으나 걸음은 마치 떠밀리는 듯했다. 사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똑바로 발을 내디뎠다. 좁은 도로를 따라 어두운 길을 한참을 걸어도 보이는 것은 지나온 것과 같은 어둠뿐이었다. 사샤는 오른손에 들었던 짐 가방을 왼손으로 바꾸어 들고 차갑게 얼어 가는 제 손을 입가로 가져가 호호 입김을 불었다. 아직 가을의 초입이건만 몸을 휘감는 냉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져만 갔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이대로 저 혼자 네르아에 도착하는 것은 아닐까.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마중 나오는 것은 맞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이 작전은 벌써 실패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여기서 그만두고 돌아갈까. 돌아가려면 기회는 지금뿐인 것 같았다. 멈칫멈칫, 앞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꾸만 망설일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엘가 슈미트 양.” 난데없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사샤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는 대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코트의 앞섶을 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엘가 슈미트 양. 맞습니까?” 그래. 내 이름이 엘가 슈미트였지. “……네. 제, 제가 엘가…… 엘가 슈미트예요.” 영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사샤는 어색한 어투로 위조된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내뱉고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요원…… 요원이신가요?” “입을 다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슈미트 양.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면요.” “…….” 사내는 차가운 음성으로 경고했다. 앞으로도, 라는 말은 보반 의원의 사무실에 잠입한 이후에도 쓸데없이 입을 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제러드의 사람이라면 분명 같은 편일 텐데 그 음성이 너무도 엄격하여 사샤는 풀이 죽어 버렸다. 조금 더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면 어때서.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 칠흑 같은 어둠은 모든 것을 음영 속에 감추고 선명하게 보여 주질 않는다. 눈이 먼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듯, 이 일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저 희미하기만 하다. 사샤는 사내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흙길은 가는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고 밟히는 곳마다 찌걱거려서 새 스커트와 부츠는 금세 엉망진창이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의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네르아다. 자욱한 안개와 이슬 맺힌 숲의 공기가 언제나 신비로웠던 곳. 물과, 숲과, 짐승과, 사람이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던 곳. 제 앞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군인이 탐욕스러운 정복자인 줄도 모르고 그의 목에 꽃으로 만든 목걸이와 화관을 씌워 주던 곳.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요?” 짐 가방에 질퍽하게 젖은 스커트까지 두 손으로 부여잡고 사샤는 더는 참지 못해 물었다. “거의 다 왔어요.”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답했다.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그를 놓치지 않으려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젖은 발에 축축 늘어지는 스커트 자락도 복병이었고 남자의 빠른 걸음도 그 못지않은 악재였다. 벌써 이 일이 질리기 시작했다. 고생스러운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궁금한 것을 참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나, 안전과 관련이 있다면 말이다. “이봐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목적지도 모르고 쫓아갈 수는 없어요. 게다가 나는 그쪽의 이름도, 신분도, 심지어 얼굴조차 모른다고요.” “스노우.” “뭐라고요?”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죠. 스노우.” “좋아요. 스노우…… 씨.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그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가 딸깍 차 문을 열었다. 국경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 남에게 발각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곳에 그는 차를 숨겨 두고 있던 것이다. “타십시오.” “어디로 가는 건데요?” “당신이 묵을 장소로 갑니다.” “…….” “가능하면 진흙은 시트에 묻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세차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 사샤는 여봐란 듯이 치마를 들어 똘똘 뭉친 후에 차에 올랐다. 스노우란 사내는 흡족한 얼굴로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얼마나 가야 도착하나요?” 차가 숲을 빠져나간 지 얼마 안 돼 사샤가 물었다. 사내는 나지막이 웃었다. “당신은 참 질문이 많군요. 슈미트 양. 보반 의원은 호기심 많은 비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내 처지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그래요. 보반 의원에게 내가 언제쯤 그의 행적을 제러드 장군님께 보고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국경 너머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언제쯤 내가 국적을 취득할 수 있을지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보반 의원은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당신에게 묻잖아요.” “글쎄요. 이렇게 대답하죠. 당장은 눈과 귀는 열고 있되 입은 닫고 있으세요. 그러다가 가능한 때가 오면 귀도 막고, 또 언젠가는 눈도 감아야 할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네요.” “우리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요. 익숙해질 겁니다. 슈미트 양.” 그는 백미러를 보며 웃어 보였다. 그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사샤는 그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천진한 눈매를 하고 있으나 따듯하거나,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 어느새 현대식 건물이 층층이 올려져 있는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비록 숲에서 벗어났어도 사샤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0년 전 분명 도첸의 손에 부서지고 파괴되었을 시가지의 건물들은 국경 너머와는 달리 전쟁의 상흔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여기가, 여기가 네르아가 맞나요?”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고 있어요. 도첸인들은 이곳을 도첸국 남부 빅토리아라 부르고, 몇 년 전부터 군에서 이곳의 도로와 건물을 정비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죠. 그리고 우리는 지금 빅토리아 시가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 사샤가 막연히 상상하던 도첸국은 회색 석벽의 건물에 온통 잿빛으로 빛이 바랜 나라였다. 길거리 곳곳에 탱크와 대포가 놓여 있고, 총을 든 군인들이 끔찍한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곳, 사샤가 기억하는 도첸의 이미지란 그랬다. 자유와 개성이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곳. 그러나 노란 벽 등 아래 드러난 도첸의 도시는 마치 전쟁을 모르는 듯 깨끗했고, 건물에는 낭만이 스며 있었으며, 또한 우아했다.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르죠?” 많이 다른 정도가 아니야. 아예 정반대라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호화롭게 살고 있는 거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엄마 아빠를 쏴 죽인 그 새까만 군복, 국경을 넘어 도망칠 때 어깨 너머 보았던 그 시뻘건 불길과 잿더미. 그래서 살기 위해 도망쳤다. 이제 이 땅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악마 같은 도첸군을 피해서. “여전히 시가지를 벗어나면 시골 깡촌의 풍경이지만 머지않아, 이곳은 네피란 못지않게 도시화될 겁니다.” “…….” “이상한 일이죠? 국경 너머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손가락을 빨며 살고 있는데 그 반대쪽은 오히려 이렇게 사치스럽게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째서예요?” 어째서? “어째서, 전쟁을 일으킨 쪽이, 사람들을 학살한 쪽이, 남의 땅을 빼앗은 쪽이, 이토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죠?” “…….” 스노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키는 침묵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어느새 차는 회전목을 돌아 붉은색 벽돌집 아래에 정차했다. “제가 한 말을 명심하세요. 슈미트 양.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고 싶다면 침묵을 지키십시오. 이곳에서도, 이곳이 아닌 곳에서도.” “…….” “내리세요. 문을 두드리면 주인이 나올 겁니다. 네피란에서는 기차를 탔고 여기까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도착했다고 하십시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스노우는 별다른 작별 인사 없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조심하라거나 행운을 빈다는 인사도 없다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까. 정보부의 요원이라면 분명 오랫동안 고도화되고 정밀한 훈련을 받아 왔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사흘 전까지만 해도 소아 병동에서 아이들의 자장가나 불러 주던 여자와 동지가 되고 싶지는 않으리라. 사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코트를 털어 주름을 펴고 틀어 올린 머리를 한 번 쓸었다. 망설이다가 똑똑똑, 빠르게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Kiu vi estas(누구세요)?” “Pardonu min. ?i nomas Elgar…… Elgar Schmidt(실례합니다. 엘가…… 엘가 슈미트라고 합니다).” ‘오, 이런’ 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단단한 목재 대문이 열렸다. 하얗게 센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고상한 이미지의 노부인이 숄더를 어깨 위로 올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슈미트 양. 안 그래도 연락이 없어 걱정하던 참이랍니다.” “실례합니다.” “막스! 이리 나와 봐요! 슈미트 양이 도착했어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 주방에서 노부인과 똑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그러나 그 풍채만은 건장한 남자가 제 입가를 훔치며 다가와 사샤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세요. 슈미트 양. 저는 이 집의 주인 막스 다윈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집사람 로나 다윈이고요. 짐은 이리 주십시오.” 막스는 사샤의 짐 가방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차를 타고 오셨나요?” “아니요. 기차역에서 내려서 트럭을 얻어 타고 왔어요.” “저런. 안 그래도 언제쯤 도착하실지 연락을 드렸는데 답이 없어 걱정했습니다. 연락이 닿았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어디로 연락을 하셨나요?” “예?” 막스가 되묻자 사샤는 당황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고 싶다면 침묵을 지키십쇼.’ 스노우의 말이 번개처럼 머리에 스치면서 괜한 것을 질문했나 싶어 안색이 돌연 굳어 버렸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사샤의 표정이 굳자 막스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나 싶어 신중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슈미트 씨 댁에 했습죠. 몇 번이고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시더군요. 무슨 일이 난 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 스노우일까? 그의 인상착의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공연한 오해만 사겠지. 더욱이 스노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샤 본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물어봤자 이로울 것이 없었다. “아마…… 아마, 집을 비운 때에 전화하셨나 봐요. 오라버니가 볼일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저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난 후에요.” “아, 그러시군요. 어쨌든 무사히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묵을 방은 2층입니다. 제가 안내하죠. 따라오세요.” 사샤는 막스를 따라 2층 계단을 올랐다. 기다랗게 나 있는 복도에 방문은 고작해야 두 개였다. 세를 많이 놓지 않는 집이구나. “방 하나는 저희가 쓰고, 나머지 하나는 손님방으로 비워 두고 있어요. 세를 놓은 방은 슈미트 양의 방 하나뿐이니 쓰기 편하실 겁니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일이 드물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안전할 테고 말이다. 막스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사샤가 묵을 방문을 열고 그 키를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슈미트 양. 욕실은 복도의 가장 끝에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나 집사람을 부르세요.” “저 혹시.” “네.” “오늘 자 신문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막스는 잘 정리된 침대 위에 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사샤는 코트를 벗으며 아담하고 깔끔한 방을 둘러보았다. 두 겹으로 겹쳐진 밤색 리넨 커튼, 아라베스크 무늬가 새겨진 푹신한 카펫, 모서리가 닳아 해진 나무 가구들. 그리고 화려한 꽃들이 수놓인 푹신한 침대 시트. 그녀는 침대에 앉아 보드라운 시트의 천을 매만졌다. 그러며 소아 병동의 뻣뻣하고 새하얀 침구와 철제 침대를 떠올렸다. 방 안에서 어스름히 커피 향과 꽃향기가 났다. 병원의 동굴 같은 기숙사에 비교하면 이곳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넓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곳에 와서 꽃의 향기를 맡으니 말이다. 이곳에 와서야 누군가 저를 위해 마련한 깨끗한 방과 침대를 얻게 되니 말이다. 잠시 후, 막스는 신문과 함께 따듯한 차와 쿠키를 들고 왔다. 빅토리아는 일교차가 심해 밤이 되면 추울 것이라며 자기 전에 따듯한 우유나 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고 일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샤는 처음 받아 보는 따듯한 친절에 당황하였다. 그녀는 다윈 부부가 어디 출신인지 궁금했다. 네르아의 토박이들은 대부분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노부부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 있으니 그것으로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설사 살아남은 네르아인이라고 해도 믿고 싶지 않기도 했다. 도첸인의 손에 모든 것이 섬멸되어 이름마저 빼앗긴 땅에서 도첸의 보호를 받으며 이렇게 호젓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사샤는 책상에 앉아 신문의 맨 앞장을 살폈다.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 위원장, 도첸 자유 청년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다.]   인쇄된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다른 치들에 비교해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 호리호리하고 곧은 몸매, 유난히 하얀 피부에 은발인지, 금발인지 모를 화사한 머리색이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그다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사의 하단에 작게 인쇄된 도첸의 서기장 라울 호네커의 얼굴이었다. 일면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서기장보다 요한이라는 이 남자가 더 중요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대중에게 훨씬 더 인기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사샤는 1면에서부터 신문의 마지막 장까지 인쇄된 활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개중 사샤가 감시해야 하는 인물인 ‘보반 의원’에 관한 기사도 나왔다.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이 수도인 네피란을 떠나 빅토리아로 몰려든다는 이야기. 신문은 사설을 통해 연합국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파괴된 도시를 재건은커녕 버려두어, 길거리에 굶어 죽는 이들이 허다하다며 우리에게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있다면 하루속히 총과 칼로 연합군에 의해 핍박받고 굶주린 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운이 감도는 이야기였다. 사샤는 신문을 접으며 찻잔을 들었다.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정말로 전쟁인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인 걸까. 연합국이 모두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것도 사실일까. 전쟁에서 이겨 도첸의 진군을 막아낸 것은 그들인데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패배한 자들로 보이는가. 아니 그럴 리가. 이곳의 정보는 믿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의 입맛에 맞추어 뭐든 왜곡하고 뒤틀며 거짓을 말하는 곳이다. 그것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빅토리아 시가지의 멋들어진 건물, 잘 꾸며진 도시도 보여 주기 위한 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려면 밝을 때 시가지를 벗어나 보면 될 것 같았다. 사샤는 다음 날 보반 의원의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생전 가져 본 적 없는 깨끗한 이불과 따듯한 잠자리에도 그녀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길고도, 어두운 밤이었다. *** 아침 일찍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다윈 부인이 문을 두드리며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층계참을 내려가 주방으로 가니 부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잔에 막 따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슈미트 양, 간밤에 잠은 잘 잤나요?” “네. 덕분에 푹 잤어요. 감사합니다. 부인.” “댁에서 드시던 것에 비해서 차린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맛은 좋을 거예요.” “아니요. 이 정도면 훌륭한데요.” 진심이었다. 다윈 부부는 사샤가 돈 많은 집의 딸이라 짐작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거리에서 구걸했을 때에는 쓰레기를 뒤졌고 병원에 들어가고 나서는 매일 딱딱한 빵과 다 식은 스프를 삼시세끼 먹었다. 따듯한 커피와 신선한 샌드위치는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갖는 음식이었다. 돌이켜 보니 참 불쌍한 인생을 살았다. 다윈 부인은 사샤가 샌드위치를 열심히 베어 무는 것을 흡족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개수대로 돌아가 새벽 나절 남편이 먹고 나간 빈 접시를 물에 씻어 냈다. “부인, 혹시 보반 의원의 사무실이 어디쯤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여기서 아주 가까워요. 저기 옷가게 보이시나요?” 부인은 개수대 앞 창문을 가리켰다. 검은 벽돌집 1층에 커다랗게 알버트 의상실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네. 보여요.” “그 가게 모퉁이를 돌아 바로 다음 건물이에요. 갈색 벽돌에 창문이 아치형이죠.” 갈색 벽돌에 창문이 아치형인 집. 사샤는 다윈 부인의 말을 몇 번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동틀 무렵 잠깐 내린 이슬비 덕인지 막 나선 거리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사샤는 핸드백 안에 열쇠를 잘 챙겨 넣고 다윈 부인이 일러 준 대로 의상실을 끼고 돌아 바로 보이는 건물을 찾았다. 그녀의 말처럼 하얀 아치형 창문이 달린 갈색 벽돌집이 보였다. 입구에는 수많은 명패가 보였는데 개중 ‘로버트 보반 의원 사무실’이라 쓰여진 명패도 보였다. 출입구는 출근하는 인파로 붐볐다. 대부분 중절모를 쓰고 서류 가방을 든 남자들이었고 몇몇 중년 여성들도 보였으나 사샤의 나이 또래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인파에 섞여 건물로 들어갔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파도 북적였는데 아마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사람들을 따라 정신없이 3층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며 말을 걸었다. “슈미트 양?” 사샤는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몸을 돌렸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두꺼운 서류철을 든 채 그녀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네.” 사샤가 대답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이리로 오라는 신호였다. “다행히 제 시간에 맞춰 왔군요. 들어와요. 자리를 안내해 주죠.” “네.” 남자는 다정한 인사나, 예의를 갖춘 통성명 따위는 하지 않고 돋보기안경 너머 사샤를 위아래로 훑었다. “올해 스물이라고요?” “네.” “어디가 고향이라고 했죠?” “네피란이요.” “아. 역시. 네피란에는 미인들이 참 많죠. 올 때는 기차를 타고 왔나요?” “네.” 사샤는 긴장되어 핸드백을 바짝 당겨 잡았다. 자꾸 묻는 그의 저의가 못내 불안했다. “멋진 도시죠, 네피란은. 물론 이곳도 나쁘지 않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도시예요. 무엇보다 지역민들의 수준이 그곳과는 하늘과 땅 차이죠, 뭐랄까, 이곳 사람들은 좀 지저분하고, 게으르달까. 아무리 개화를 해도 뿌리는 못 속이죠. 미개한 네르아의 피가 어디 가겠어요.” “그런가요?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신가요?” “아.” 그는 돋보기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 간신히 바지를 지탱하고 있는 멜빵의 끈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네피란에서 태어나셨죠. 어머니는 네르아에서 자라셨지만 네르아인은 아니에요. 어머니는 갈색이라기보다 금발에 가까우시니까요.” 사샤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짙은 갈색 머리를 보았다. 그의 생김새는 네르아 토착민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피는 그다지 물려받지 못했나 보다. “지난 휴가 때도 네피란에 다녀왔어요. 친척들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거든요. 보반 의원님이 원래 네피란에 계시다 온 것도 알고 있겠죠? 지금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곳에 계시지만, 정말이지 우아한 분이죠.” 사샤는 그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기예요. 슈미트 양.” 그는 보반 의원의 집무실 바로 앞에 있는 철제 책상과 의자를 가리켰다. “의원님은 9시 정각에 출근하세요. 늘 30분 일찍 출근해 사무실을 청소해 두는 것 잊지 마세요. 도착하시면 홍차에 꿀과 우유를 섞어 드리고, 그분이 사무실에서 벨을 울리면 비서를 호출하는 것이니 즉시 일어나 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가도록 하세요.” “네.” “전화기와 타자기, 메모지. 의원님의 스케줄이 적힌 달력도 있고요.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매한 후 영수증을 제출하세요. 지출 결의를 해 줄 테니까요.” “네.” 남자는 가벼운 묵례를 한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반 의원의 집무실을 바라보고 놓인 각각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다섯 개. 그중 한 자리를 빼고는 모두 다 차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류를 뒤적이고 전화를 하는 것이 몹시도 분주해 보였다. 사샤는 핸드백을 내려놓고 제 앞에 놓인 타자기와 메모지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퇴근길에 보반 의원에 대해 기록할 수첩과 펜을 사야 할 것 같았다. 사무실의 집기로 그것을 기록하기엔 꽤나 은밀한 일이니 말이다. 9시 정각, 검은 중절모에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사샤는 국경을 넘기 전 그의 사진을 본 일을 기억했다. 제러드가 유일하게 알려 준 정보였다. “안녕하세요. 의원님.” 그는 중절모를 벗어 넓게 벗겨진 이마를 쓸었다. 장수처럼 길고 멋들어지게 관리한 턱수염과는 대조적이었다. 위로 가야 할 것이 모두 코 밑에 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 그는 사샤를 보며 반색했다. “새로운 비서로군.” “엘가 슈미트입니다. 의원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좋군. 아주 좋아.” 좋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사샤가 희미하게 미소 짓자 그는 사샤의 뺨을 두드렸다. 그것은 마치 마음에 드는 암말의 콧등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제스처였다. “그 예쁜 손으로 탄 차 한 잔 부탁하네. 슈미트 양.” “네. 의원님.” 사샤는 꿀과 우유를 탄 홍차를 접시에 받쳐 보반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막 파이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정열적인 붉은 머리는 누구에게 물려받았지?” 사흘 전에 연합군 지하 수괴에게서. “분명히 어머니의 것일 거야. 그렇지? 어머니도 슈미트 양처럼 아름다웠겠지?” 분명,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햇살을 받으면 눈부시게 빛나는 갈색 머리, 신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붉은 입술. 사샤는 아직도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죽기 직전 온몸을 떨며 구덩이 앞에 무릎 꿇고 있던 그녀의 뒷모습까지도. “네.” 보반은 찻잔을 내려놓는 사샤의 손을 스치듯 매만졌다. 두툼하고 기름진 손은 그의 배에 달라붙은 비곗덩어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퇴근 전에 알버트 의상실에 다녀와야 할 거야. 맡겨 둔 옷이 있거든.” “네.” “그리고 이 문서는 모두 파쇄해 주고.”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철을 내밀었고 사샤는 서둘러 그가 책상에 밀어 놓은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이건, 타이핑 좀 부탁하네.” “……네. 의원님.” 거기에 더해 종이 한 장을 맨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 뭉치가 제법 묵직했다. “그리고 퇴근 이후에는 뭘 하지?” 사샤는 눈을 좌우로 돌렸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집에서 쉬겠죠. 의원님.” “잘됐군.” 그는 반질거리는 책상을 매만지며 음흉하게 웃었다. “오늘 나와 저녁을 먹는 게 어때?” “…….” 그녀에게 함께 식사하자거나, 함께 영화를 보자거나, 함께 걷자거나, 아니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사샤는 한 번도 그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네. 좋습니다. 의원님.” “좋아. 아. 의상실은 내일 다녀오도록 해. 퇴근길에 손이 거추장스러울 테니.” “네.” 첫 승낙의 상대가 대머리에 배 나온 중년의 노신사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사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 떠올렸다. “……미치겠네.” 없었다. 그녀는 파쇄기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타이핑을 하는 법도 몰랐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빨래, 청소, 붕대 감기, 씻겨 주기 따위의 허드렛일뿐. 그나마 가능한 것은 알버트 의상실에 가 옷을 찾아오는 잔심부름 정도인데 당장 급하지도 않은 일이다. 사샤는 하는 수 없이 지출 결의가 필요할 때나 찾아오라던 사내의 책상 앞에 서고 말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파쇄…… 파쇄가 뭔가요?” “……나랑 농담하자는 겁니까?”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반쯤은 혹시나 유머일까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샤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말했다. “타이핑…… 타이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이런 젠장, 슈미트 양.” 그는 넋이 나간 듯 욕을 내뱉고 한동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당신을 누가 뽑은 거지?” “…….” 그거야 사샤 본인도 몰랐다. 보반 의원이 뽑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이름 모를 사내가 뽑은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제러드는 어떤 연줄로 자신을 이곳에 밀어 넣을 수 있었을까. 비서라는 직종은 잘 모른다. 그러나 많은 여자가 이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하는 걸 안다. 주부나, 아이 엄마, 그게 아니면 봉사, 그 외에는 사샤처럼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여자들에게 비서란 남자들과 대등하게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했다. 남자는 투덜거리며 파쇄기와 타자기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보반 의원이 적어 준, 단 다섯 줄을 타이핑하느라 하루 반나절을 소비했고 퇴근할 무렵에는 완전히 진이 빠졌다. *** “죄송해요. 의원님.” “괜찮아. 괜찮아. 그깟 일이야 천천히 하면 되지.” 단골 레스토랑에 온 보반이 사샤의 의자를 빼 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외투와 모자를 벗어 종업원에게 건네는 손길이 여유롭고 느긋했다. 그는 수국이 멋들어지게 장식된 테이블 위에서 물 잔을 집으며 미소 지었다. “…….” “그 사람이 자네를 추천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 사람? “그 사람이요?” “뭘 먹을 텐가? 여긴 송아지 안심 요리가 일품이야. 와인?” “…….” “아니면 위스키?” “그냥, 물이요.” “섭섭하게 그러지 말게. 슈미트 양.” 그가 손을 뻗어 사샤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씩 웃었다. 사샤는 기름진 콧수염 사이로 색 바랜 그의 금니를 처음 보았다. 그것은 그의 웃음을 꽤나 저급하게 만들었다. “그럼 딱 한 잔만.” “앙큼하긴.” 보반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가 사샤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메뉴를 주문할 동안 사샤는 보반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만 골몰했다. 그러느라 보반이 저를 부르는 줄도 몰랐다. “엘가?” “네?” “엘가라고 불러도 되겠지?” “……네.” “혹시 남자 친구는 있나?” “아니요.” 그는 제 콧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그렇군. 그럼 가족은?” “저는 고아…… 아니, 오빠가 한 명 있습니다.” 사샤는 자신이 엘가 슈미트임을 상기시키고는 더듬대며 말을 바꿨다. 그것이 우스웠던 것인지 보반은 키득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웃음은 한동안 멈출 줄을 몰라 마치 조롱을 받는 것 같았다. 사샤는 물 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요, 의원님?” “아니야. 그저…….” 그는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로 말이다. “자네가 퍽이나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 보반은 웨이터가 가지고 온 와인을 사샤의 잔과 자신의 잔에 차례로 따르더니 곧 저의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엘가 슈미트, 내 순진한 아가씨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사샤는 어색하게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그의 뜻 모를 웃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사샤는 내내 보반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그는 술이 들어갈수록 더욱 벽창호에 목소리만 커져 질문은커녕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런 보반을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은 매우 익숙하게 다루었다. 그의 모자와 코트를 챙겨 레스토랑 앞에 있는 택시에 태워 보내며 그의 주소를 대는 것조차 말이다. 보반과 헤어진 사샤는 잡화점이 닫기 바로 직전 가까스로 작은 수첩과 연필을 구했다. 그리고 제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날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하게 굴었는지에 대한 기록뿐, 제러드가 원하는 종류의 수확은 없었다. *** 사샤는 아침 일찍 의상실에 들러 보반의 옷을 찾았다. 익숙하지 못한 타이핑에 온종일 매달려 혹시나 시간이 없을까봐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업무 미숙을 이유로 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피하고 싶은 것은 잘릴 수 없어 보반 의원의 정부로라도 그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경을 넘어왔고 이곳에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제러드의 연락이 올 때까지 그녀는 꼼짝없이 이곳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갈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으리라. 잘 포장된 옷상자를 들고 어제와 똑같이 모퉁이를 돌아 보반 의원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 정말 가을이 다가왔는지 스산한 아침의 추위가 얇은 코트를 뚫고 피부에 닿았다. 가을용 레인 코트 한 벌을 장만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40바크. 도첸의 화폐 단위를 잘 몰랐던 그녀는 어젯밤, 레스토랑에 가서야 40바크의 가치를 알았다. 그것은 그녀가 먹은 스테이크 한 끼의 가격이었다. 그 레스토랑이 비싼 감도 없진 않지만, 그것에 비해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의 돈이었다. 그러니 레인 코트는 꿈도 꿀 수 없지. 코트 안에 겹겹이 블라우스를 받쳐 입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사샤는 보반 의원의 옷상자를 그의 집무실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 그녀는 자연스럽게 집무실의 창문부터 열어 내부를 환기했다. 병동에 있으면서 생긴 오래된 습관이었다. 전날 해 두지 못했던 설거지를 하고 타이핑 연습을 하고 있으니 하나둘 사무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후, 9시 정각이 채 되지 않아 보반 의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엘가~ 오늘도 아름답군~” 그는 자신의 가방과 코트를 받기 위해 일어서 있는 사샤의 볼을 한 번 매만지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코트를 벗었다. “오늘 저녁엔 같이 영화라도 보는 게 어때?” “…….” 사샤는 망설였다. 그의 정보를 얻기 위해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좋지만 적정선을 지키지 못하면 머지않아 그의 아래에 누워야 할까 봐 겁이 났다. “천천히 생각해 봐. 귀여운 엘가.” “…….” 그는 다시 한번 사샤의 볼을 만지고 윙크를 했다. “내가 조언 하나 해 줄까?” 보반의 코트와 중절모를 정리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네?” 여전히 통성명하지 않은 그 사내였다. 안경테를 올리는 눈빛이 퍽이나 적대적이었다. 사내는 얼굴을 더 가까이 대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전임 비서는 바닷가에 있는 별장을 꿰찼지. 그전 전임 비서는 바다 건너, 신대륙의 금광을 받았고 말이야.” “…….” “상사와 놀아나기 위해 비서가 된 멍청한 여자들은 지긋지긋해. 당신이 네피란에서 왔는지, 자네 부모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나는 상관 안 해! 엘가 슈미트 양! 일하러 왔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보반 의원에게 가랑이를 벌려 돈을 얼마나 뜯어낼 수 있는지 계산하기 전에! 자음 모음 타이핑이나 제대로 치라고! 내가 정신 나간 여자들 때문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기나 해! 젠장할!” 사샤는 그가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과중한 업무에 관한 스트레스를 저에게 풀고 있겠거니 막연히 유추할 뿐이었다. “보반 의원님은 결혼한 유부남이야! 이 멍청한 여자 같으니! 보반 부인이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우신 분인 줄 알아!” 아니. 보반 부인에 대한 경외심인가……? 그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을 때쯤, 난데없이 쾅쾅쾅,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듯한, 그보다는 조금 더 신경질적이고 농밀한 소음이 울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책상 밑으로 엎드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샤는 그 현실감 없고 아득한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총소리. 사내는 붉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격발. 그의 뒤통수를 뚫고 나온 선혈이 사샤의 얼굴에 낭자하였다. 사내는 벼락을 맞은 가로수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어졌다. 사샤는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피.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색이었다. 남의 숨소리마저 제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기민한 청각과는 달리 눈앞의 모든 것은 흐렸다. 저벅저벅, 무겁고 둔중한 워커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마치 새까만 늑대 같은 군인들. 어깨에 찬 완장과 기관총의 무거운 쇠붙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들, 사샤는 한껏 예민해진 귀를 두 손으로 막고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채 파쇄하지 못한 문서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쾅!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군홧발로 차고 들어갔다. 보반 의원의 고함이 들렸다. 사내들끼리의 고성, 그리고 둔중한 난타 소리. 저 사람은 죽을 거야. 그러니 도망쳐야 해. 예고 없던 급습이었고, 그들은 도첸군이었다. 뭔가가 발각된 거야. 그게 나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도망쳐야 한다. 사샤는 덜덜 떨며 바닥을 기어갔다. 최대한 몸을 납작 엎드려 의자와 의자 사이로, 책상과 책상 사이로 숨어서 기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런 때에는 심장 박동도 멈춰 주었으면 싶었다. “쥐새끼가 있네.”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다음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들어 올렸다. “아아악!” 아홉 살, 그녀의 코앞에서 포탄이 터진 이후 처음으로 사샤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어딜 그렇게 몰래 가시나? 쥐새끼 양?” 그는 각이 잡힌 군복을 잘 차려입은 군인이었다. 낭떠러지 앞에 제 부모를 세우고 총알을 갈겨대던 모습이 망막에 고였다. 도첸의 군복만 봐도 사지가 떨리고 진저리가 났다. 겁이 나서 소변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가슴에 수놓인 계급장이 보였다. 야전 병원에서 일한 덕분에 군인의 계급장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대령이었다. 군사 국가인 도첸의 소령. 사샤는 두려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새파란 벽안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사샤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벽으로 처박았다. 쾅, 이마를 부딪치고 사샤는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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