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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화


#2 난나는 팔코메르의 황후였다. 본래부터 그같이 귀한 신분은 아닌 탓에 그에 어울릴 만한 지위와 고상함을 갖추지 못했다. 난나는 어쩌다가 저 같은 계집이 황후라는 고귀한 지위에 올랐는지 기억을 되감았다. 매일 그 이유와 사정을 되짚어도 본래의 미천함을 생각하면, 그러니까 미비한 신분과 너저분한 과거를 떠올리면 기가 막혀 웃음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난나 같은 계집이 황후로 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고 그녀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난나는 팔코메르의 황후이며 황제의 처였다. 비록 계후이며 황제가 영총하는 것은 정후이자 조강지처였던 스타테이라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프지는 않으신가요?” 난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화장대에는 화장품 대신 상처에 바르기 위한 알코올과 솜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녀의 물음에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아까 보니 가슴에 멍이 지셨던데요.” 그랬나? 난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젖무덤 근처에 파르스름한 멍이 돋아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하녀는 ‘그렇죠?’ 하고 물었다. 난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알코올에 젖은 솜으로 상처를 톡톡 두드리던 하녀가 연고의 뚜껑을 열었다. 난나는 가시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저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나는 마른 입술을 달막거렸다. 가슴에 멍이 박힌다고 한들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차분히 연고를 발랐다. 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통이 극심했다. 황제와 동침을 하고 나면 항상 이런 근육통에 시달렸다.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도 황제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자를 모르는 계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제가 저를 다루는 방식에 적응할 수 없었다. 무참하고 가끔은 통렬하기도 했다. 찢어질 것 같은 근육통보다 너덜거리는 심장이 더 아팠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보다 눈물을 참는 게 더 힘든 법이니까. 난나는 삐걱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반듯하게 난 회랑을 사뿐사뿐 걸었다. 고전적인 양식의 기둥 사이로 번지는 노란 볕이 따끈했다. 진홍색 백일홍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난나는 고개를 돌려 꽃잎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백합의 방엔 어린 황자들과 황녀들이 머물고 있었다. 본래는 벨테모어 제국의 황제가 총비를 위해 마련한 방이라고 들었으나 팔코메르가 건국된 후 황제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장소로 바뀌었다. 난나는 한때 황제의 사랑받는 후궁, 혹은 총비가 머물 만큼 아름다운 방을 황자와 황녀에게 주기에 내심 기대했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같이 아름답고 화려한 방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테아가 그리하고 싶어 했어.’ 난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맞다. 테아가, 그러니까 스타테이라가 그리하길 원했었다. 팔코메르에는 더 이상 후궁이 없으니까. 황제가 지나치게 신실한 탓이었다. 그리 뵈지 않아도 난나는 그처럼 신앙이 깊은 사내도 보지 못했다. 시선이 바닥을 한 뼘 한 뼘 더듬었다. 문득 한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 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눈썹 아래로 삐죽 자란 은색 머리카락이 그녀를 닮았다. 난나는 엷게 웃으며 어린 아기를 들어 올렸다. 허리를 굽히고 자그마한 아기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도 허리가 뻐근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마마-” 아기가 벙긋한 입술을 움직였다. 빨갛게 무르익은 입술이 앵두 같았다. 그녀는 장밋빛으로 물든 통통한 뺨에 키스했다. 아기가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뭉갰다. 그녀는 ‘알렉시스’ 하고 불렀다. 어린 강아지가 귀를 쫑긋하는 것처럼 아기가 몸을 들썩였다. 난나는 야트막한 등을 토닥거리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피아노의 건반을 제 오라비와 함께 누르고 있던 스텔라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잽싸게 달려왔다. “엄마.” 스텔라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스텔라의 뒤로 총총 걸어오던 슬란 역시 그녀의 앞에 섰다. 난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술을 뗐다. “잘 잤어?” “엄마는?”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난나는 삼 남매와 함께 밤을 보냈다. 처소가 따로 있지만 꼭 황제가 배정한 처소에 머물지 않아도 괜찮았다. 동침을 하지 않는 밤이면 황제는 그녀가 어디서 머물든 개의치 않았으니까. 슬란과 스텔라는 어릴 때부터 분리 수면이 수월했으나 막내인 알렉시스는 조금 남달랐다. 잠귀가 예민하고 순했던 형, 누나와 달리 다소 까칠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프레야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난나는 프레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늘 아이들과 함께 지내려고 했다. “잘 잤어. 슬란과 스텔라는 어땠어?” “어제 알렉시스가 이불에 오줌을 쌌어.” 스텔라가 콩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만 막내를 흘겨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난나는 조금 놀라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어린 아들을 보았다. 한 살도 안 된 아가이니 배변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데 기저귀를 찼다면 오줌을 이불에 싸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 슈발렌 자작 부인을 만나 보아야겠다.” 난나는 다소 어두운 얼굴로 삼 남매의 보모를 떠올렸다. 광대가 도드라진 여자를 생각하자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것처럼 폐부가 따끔거렸다. 난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여자가 난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황후 폐하를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당연한 일이긴 하지요. 피가 섞인 애들이 아니니까.’ 뼈가 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입술을 다문 채 어린 딸의 기저귀를 가는 자작 부인을 응시했다. 슈발렌 자작 부인은 황실의 신하였다. 그러니 황후의 신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작 부인에게 그녀는 황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문장 속에 황후도 그녀가 아니었다. 난나는 이제 서글픔도 느끼지 않았다. 그 무례함과 무자비함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눈물을 흘릴 주제가 되지도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런 처지가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부디 태어난 아이들에게라도 잘해 주길 바랐다. 모두가 어여쁘게 여기길. 그녀가 낳은 아이들은 어엿한 황손이고……. ‘네가 할 일은 내 딸을 대신하여 황제의 자궁이 되는 일이지.’ 그래. 그녀는 황제의 자궁이었으니까. * * *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깨질 것처럼 맑았던 오월의 볕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난나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어둑했다. 천둥이 번쩍거릴 때마다 검은 먹구름이 몸을 뒤트는 것처럼 보였다. 회랑의 끝에서 고개를 젖힌 채 비가 쏟아지길 기다리던 난나는 빗방울이 한 방울씩 땅을 적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저녁이 되려면 일렀으나 오늘은 황제와 저녁 만찬이 있는 날이었다. 기실 만찬이라 할 것도 없이 황가의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당연히 황제의 어린 자식들 또한 참석해야 했고 난나 역시 빠질 수 없는 자리다. 난나는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죽을상을 한 채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하녀의 손이 풍성한 머리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은사처럼 곱고 가느다란 머리칼을 빗살이 촘촘한 녹단 나무 빗으로 빗기 시작했다. 문득 두피가 욱신거렸다. 급하고 거칠게 틀어잡던 손길이 떠올라 오한이 돋았으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당장이라도 두피가 뽑힐 것 같은 감각을 참아 냈다. 하녀는 다행히 빗질을 금방 그만두었다. 대신 낮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남은 머리칼을 맵시 좋게 땋아 진주와 다이아몬드 장식의 헤어피스로 우아하고 단아하게 단장해 주었다. 귀걸이 역시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길게 늘어트린 형태였다. 그녀는 황제가 물고 뜯은 목덜미를 부드럽게 훔치는 하녀의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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