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7화
#7
다음 날 오후에는 에버하르트 공작과의 접견이 있었다. 그녀가 먼저 요청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그를 찾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난나는 반듯하게 예를 올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흔 중반의 나이치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젊고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라 이르기도 전이었다. 난나는 본능적으로 호흡을 굳혔다. 가닥가닥 마르는 숨이 녹색 장미 넝쿨에 돋아난 가시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막거리다가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접견을 받아 주어 감사해요, 공작.”
“황후께서 부르시는데 달리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공작이 단정하게 대답했다. 난나는 시선을 들지 못한 채 착석을 권했다. 궁정의 화려한 정원이 보이는 테라스는 스타테이라가 잠들어 있는 황후의 처소와 달리 무척이나 간소하며 단정했다. 그녀의 처소는 구제국의 후원 중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조차 총애받던 후궁을 위해 마련한 별궁은 아니었다.
“이리 바쁘신 공작을 뵙자고 한 이유는…….”
“서궁으로 떠나라는 황명 때문입니까.”
“……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난나는 아직도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는 제가 한심하다 여기며 낯을 굳혔다.
하지만 황제의 뜻을 그대로 따를 수가 없어서. 그래서 누구든 필요했다. 평소라면 황태후를 찾아갔을 테지만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황제는 그녀의 고견 또한 듣지 않았다. 분명 신하들 핑계를 댈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에버하르트 공작을 설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실제로 그는 스타테이라의 아버지이며 관료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거목으로 인정받는 남자였다.
난나 또한 그를 통해 미천한 시녀의 신분에서 황후가 되었고. 게다가 어쨌든 명목상 그녀의 양부이기도 했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아가들이 너무 어려요. 특히 딸아이는 정말로 슈발렌 자작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고. 알렉시스 또한…… 그렇고요.”
난나는 이제 막 8개월이 된 아기의 발목에 남은 멍을 떠올렸다. 손톱자국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꼬집은 게 분명했다. 난나는 그늘진 얼굴을 숨길 수가 없어 입술 끝을 비틀어 물었다.
“아직, 아직 너무 어리니까…….”
“2황자께서는 아직도 단유하지 못하셨습니까?
“예?”
“젖을 계속 먹이시는지 여쭌 것입니다.”
고저 없는 물음이 짤막했다. 난나는 공작의 날카로운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스타테이라와 달리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다만 칠흑처럼 검은 황제와 달리 빛을 받으면 살짝 푸른빛이 돌았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스타테이라와 달리 이목구비 자체가 시원스러우며 화려했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이 황제처럼 금욕적이며 성직자 같은 인상이라, 딸과 닮은 점이라면 서느런 녹색 눈 정도가 전부였다.
난나는 그를 어둑하게 보다가 다시 시선을 떨어트렸다. 볼이 홧홧하게 데워지더니 이내 빠르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이런 것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것을 꼭 물어야 아기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젖을 직접 먹이시는 것보다 유모를 고용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건,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난나는 더듬더듬 입술을 뗐다. 아이들에 관한 것이라면, 특히 알렉시스에 관한 것이라면 그녀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에버하르트 공작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니까. 명목상의 외조부라 한들 그가 황태자나 황녀에겐 무관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직 알렉시스에게만……. 그러니까 그 애가 제 아들이라고. 아니, 친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황후께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시니 드리는 말입니다.”
“……공작.”
난나가 신음을 토해 내듯 그를 불렀다. 오팔 귀걸이가 매달린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든 난나는 분이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는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의 아이도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게 그녀에게 유의미한 일도 아니니까. 그래, 무소용한 일이다. 그건 사고에 불과했고. 그도 ‘사고’라고 말했었다. 황제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그가 문제를 삼는 순간 아이는 에버하르트 가문으로 돌려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 황제가 모르는 체하는 게 나은 것이고. 난나는 입술을 사리물다가 고개를 들었다.
“부탁을,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공에게 제 부탁이 얼마나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인지 알아요. 하지만 한 번쯤은 재고해 주실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난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듯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스타테이라의 시녀였고 그래서 에버하르트 가문의 솔정이었다. 기실 말이 시녀이지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이 제대로 거느리는 시녀도 아니다. 에버하르트 가문 정도라면 기수 가문의 어린 아가씨들을 불러들여 시녀로 삼을 수 있었으니까.
스타테이라 또한 오촌 조카를 비롯한 하급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을 시녀로 삼았던 적이 있었다. 난나를 일방적으로 총애하며 그녀들이 가문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정이 그러하니 난나는 공작에게 비는 일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황후라는 자각도 없었고 언제든 시녀, 아니, 하녀의 신분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때 황후였던 여자가 하녀로 전락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면 궁 밖으로 내쳐져 유폐되는 일도 괜찮았다. 뭐가 되었든 그녀는 일정한 시기 동안 아이들의 옆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영영 제가 데리고 있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폐하께 황후의 뜻을 전달드려 보겠습니다.”
난나의 눈가에서 물기가 떨어져 내릴 때였다. 공작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난나는 반색하여 그를 보았다. 공작은 그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선을 돌리는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어렸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난나는 그 모습에 눈가를 닦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 * *
“느닷없이 서궁이라니. 그게 유폐와 다를 리가 있겠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동방의 꽃차를 한 모금 삼킨 조피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외아들을 응시했다. 황후의 거처를 서궁으로 옮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그녀는 조금의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계후를 미워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 미워하다 못해 염증을 내며 증오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한번 마음을 준 사람에 대한 의리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스타테이라에 대한 사랑이 지고지순하니 재혼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아니, 필히 노여워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황제다. 그것도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제국 팔코메르의.
후계에 대한 열망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강했다. 그런 면에서 스타테이라는 처음부터 황후라는 자리에 어울릴 만한 재목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으나 타고나길 몸이 약했으니까.
당장 그 애의 생모만 해도 그 애를 낳자마자 세상을 떴다. 출산을 한 지 사흘만이라고 했나. 젖도 채 물려 보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두었다는 말은 다소 냉소적인 그녀라고 해도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도 황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후계 생산이다. 한데 스타테이라가 ‘깊은 잠’에 빠질 무렵. 그들 내외에겐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었다. 구제국처럼 후원이라도 채우라 하였으나 그것은 신제국을 강력히 지지하는 교단의 규율상 승낙이 어려운 일이었고…….
하여 계후를 발탁해야 했다. 그러니 누구든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오레스터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다.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