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12화
#12
‘밤을 기다려.’
머리채를 틀어잡았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나붓한 등을 툭 쳤다. 마치 가 보라는 듯 손으로 미는 것 같았다. 난나는 공작을 향해 인사 한번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마침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본궁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바닥을 툭툭 적시기 시작하던 빗방울이 이내 소낙비처럼 거세지기 시작했다.
난나는 칼을 든 강도에게 쫓기는 여자처럼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달음박질쳤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발목이 드러날 때까지 들어 올린 채 뛰어다니는 꼴이 흉했으나 난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는 모양새가 보기 좋았던 날이 있었나. 언제는 뭐 그리 우아하고 점잖았나.
“중요하지 않아.”
난나는 잇새로 들끓는 울음을 흘렸다. 문득 발이 꼬이며 순간 발목에 힘이 풀렸다. 우스꽝스럽게 엎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악!”
날카로운 비명이 붉은 입술 밖으로 흩어졌다. 손바닥과 무릎에 생긴 생채기가 따끔거렸다. 그녀는 붉게 긁힌 상처들을 보다가 정수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풍채가 거인 같은 남자였다. 황제만큼이나…….
골격이며 체격이며. 그와 흡사하리만치 유사한 사내는 하나밖에 없었다. 난나는 젖은 뺨을 파르르 떨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고개를 들자 에버하르트 공작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숱한 목숨을 거두고도 우아한 손이 날렵했다. 그가 난나의 턱을 쥐었다.
“울고 있구나.”
“고, 공작님.”
“수치에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나직한 물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난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공작의 말대로 수치로 눈물을 떨어트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모욕이 괴로웠나. 그러나 무의미한 물음이다. 난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난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창부일지도 몰랐다. 과거에는 주인 아가씨의 시중을 들며 그녀 몰래 아가씨의 부친과 동침했으니까.
난나를 덮치는 사내는 매음굴의 여자를 품는 남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를 삼키는 황제와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난나는 이제 황제나 공작이 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타테이라에겐 매양 친절하며 한결같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들이라고 해도 그녀에겐 달랐다.
그녀였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난나는 결코 스타테이라가 될 수 없으니까. 그녀의 자리를 메꿀 수도 없고 그녀 같은 여자가 될 수 없다. 생김새도 신분도 달랐다. 한데 그들이 같은 태도를 취할 리가 없었다.
알고 있는데도 눈물이 났다. 스타테이라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가 받았던 존중을 손톱만큼이라도 받아 보고 싶었다. 난나는 소리 내어 우는 대신 입술을 피 나도록 깨물었다.
“네가 서궁에 유폐되는 것은 기실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다.”
“…….”
“네가 폐출되면 나는 또 다른 계집을 양녀로 만들 테니까. 황제는 나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싶어 해. 야합이라면 결국은 결속의 또 다른 말이지.”
난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난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알고 있었으므로 본론만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녀가 무얼 하면 되는지.
“하나 알렉시스를 내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너를 도와줄 수 있어.”
턱을 쥐고 있던 손이 그녀의 젖은 뺨을 닦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녀의 손목을 쥐거나 목뒤를 움켜잡을 때와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난나는 오한을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달막거렸다.
알렉시스를 생각했다. 프레야처럼 그녀만을 닮은 애였다. 그래서 황제는 가끔 그 애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한들 그 또한 무슨 의미가 대단히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친자인 슬란과 스텔라 모두에게 황제는 무관심했다. 알렉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애의 아버지가 누구라 한들 그게 왜 중요한가.
난나는 천한 계집이므로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바닥을 짚어 보다가 대답하라는 공작의 음성에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그 애의 아버지가 왜 중요한가요.”
난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알렉시스가 누구의 슬하에서 자라는 게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공작은 알렉시스를 공작저에서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보는 눈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면 소유가 왜 중요한가. 그 애의 아버지를 가르는 일을 왜 해야 하나. 어차피 알렉시스는 황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
슬란이 황위를 잇지 못하게 되면 황제는 스텔라를 황태녀로 만들 것이다. 건국 초기에 여자가 황위를 잇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 생각되면 그녀에게서 또 다른 자식을 보거나 혹은 그녀가 아닌 여자의 배를 빌릴지도 몰랐다.
한데 알렉시스, 그 애를 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 젖먹이의 평화를 그렇게까지 깰 이유가 있나. 난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 애가 어디서 자라는지가 왜 중요해요. 공작님의 아이라 한들……. 공작님은 테아 아가씨가 아닌 자식은 필요하지 않잖아요.”
“…….”
“저에게 분명 그리 말씀하셨어요. 필요하지 않다고.”
난나는 그 밤을 기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공작의 얼굴 말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난나의 눈물 앞에서 그는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난나는…….
“알렉시스는 폐하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애를 내버려둬요. 그 애의 평화를 깨지 마세요. 그 애는 저의 아이예요. 제 배에서 자라 제 다리 사이에서 건져 내었어요. 그 외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 배에서 자란 애는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 * *
문이 열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난나는 보폭이 큰 다리를 생각했다. 길고 탄탄한 황제의 두 다리 말이다. ‘거인족’이라 불렸던 ‘에다’인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답게 황제와 공작은 모두 키가 190cm를 훌쩍 넘었다.
스타테이라는 키가 조그마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나는 그들 앞에 서면 언제나 숨이 막혔다. 그림자만 보아도 머리털이 쭈뼛 섰다. 낮에 있었던 일을 되짚고 있던 난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음울한 시선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황제는 등나무 시렁에서 보았을 때와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이불을 쥔 손에 힘이 조금씩 들어갔다. 그녀는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일어나라는 말 대신 안락의자에 털썩 몸을 묻었다. 시종이 준비해 둔 호박색 술을 각얼음이 든 글라스에 부었다. 그런 다음 익숙하게 파이프를 물었다.
“공작이 또 같은 소리를 하던?”
붉은 입술이 우아하게 물었다. 난나는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황제는 이따금 난나에게 알렉시스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슬란과 스텔라 모두 저를 닮았는데 말이다. 유독 그 애만이 저를 닮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황제는 아이들을 그리 눈여겨보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시스 위의 두 아이가 스텔라가 황제를 유난히 빼닮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오만할 정도로 까탈스러운 애가 여러모로 저를 닮았노라고. 그러니 더욱 수상한 것이다. 황자로 명명된 아이가 황제의 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이었다.
아주 두렵고 끔찍한 일이기도 했다. 난나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적도 없다고. 황제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는 칼날을 차근차근 밟는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뇨.”
“그가 너를 찾는다면 그 애의 소유를 두고 왈가왈부할 일밖에 더 있나.”
“그렇지 않아요, 폐하.”
난나는 참았던 호흡을 터트렸다.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황제의 앞에 설 때면 이렇게 숨을 가누는 게 힘들었다. 자꾸만 엇박자로 호흡을 뱉어 내고 심장도 이상하리만치 불편하게 뛰었다. 두려워서 그랬다. 난나는 그가 두려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끔찍했고 때로는 이토록 그를 두려워하는 자신이 징그러웠다. 못마땅한 게 아니라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스타테이라를 흉내 낼 수 없는 걸까. 왜 손톱만큼도 비슷해질 수 없어 그녀의 발치도 따라갈 수 없는 걸까. 그러나 이제 난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두 부질없고 어리석은 의문일 뿐이니까. 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