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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화


#13 “그 애가 누구의 아이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 “그 애는 황궁에서 자랄 테니까.” 단조롭고 무심한 저음이었다. 그가 ‘그걸 바라지?’ 하고 물었다. 난나는 고개를 퍼뜩 끄덕여야 했으나 순간 아니오, 라고 대답할 뻔했다. 난나는 간신히 그 순간을 참았다. 겨우 모면하고 나니 낯이 더워졌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난나는 아이가 황궁에서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폐를 말했을 때 계속해서 함께 출궁하길 원했던 것은 사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이 남자의 옆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남자의 옆에서 그녀의 아이들을 도려내고 싶기 때문에. 그것은 그녀가 죽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이나 크고 매혹적인 사실이었다. 난나는 잘게 떨다가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그저, 그저 제 옆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 “제가 어디에 있든……. 제 아기들이 평화롭기를 원해요.”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주 쉽게 금방 입술 사이로 고여 들었다. 황제는 난나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바닥을 헤아릴 수 없고 무엇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눈동자가 아주 검고 새카매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눈은 밝은 호박색 눈동자였다. 때때로 그를 비추는 불빛의 세기에 따라 그 환한 눈동자는 세차게 타오르는 주황빛이 되었다가 혹은 따뜻한 개암색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절대로 검은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데 난나의 시선에 그의 눈은 언제나 아주 완벽하게 검었다. 포식자의 눈동자처럼, 날카롭고 흉흉하게 느껴졌다. 하여 그녀는 시선을 금방 내리깔았다. 난나가 어떤 모습으로 울든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감정을 지닌 사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어 껄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어나.” 난나는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종아리 아래가 저렸다. 수백 개의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가 무엇을 명령할지 알고 있었다. 드레스를 걷으라 하거나 혹은 벗으라 하겠지. 난나는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녀를 경멸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을 욕정하여 더욱 경멸하는 것이다. 그는 순애와 욕정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스타테이라를 사랑했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욕정과 순정을 선 그어 놓지 못했다. 그러니 난나를 범하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 자신에 대한 좌절과 절망 끝에 그는 이렇게 뒤틀린 사내가 되었다. 포악하고 무도한 짐승이 되어 난나를 언제나 괴롭히고 증오했다. “벗어.” 글라스를 들어 술을 삼킨 남자가 말했다. 난나는 망설임 없이 드레스를 벗었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벗은 몸이 되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반투명한 네글리제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한이 돋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깨물었다. 괜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나에게 이런 일은 이제 별것 아닌 일이어야 하는데…….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지를 못해서. ‘아둔한 년.’ 난나는 눈물에 흠뻑 젖은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왜 이렇게 한심할까. 따지고 보면 난나가 대단히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그녀가 죽지 못한 것은 그녀 또한 아쉬웠다. 그러니까 스타테이라를 대신하여 죽지 못한 것 말이다. 그때 살아남지 않았다면 지금껏 이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후가 되는 일은 그녀에게 행운이 아니었다. 쥐뿔도 없는 계집이 당치도 않은 자리에 올랐으니 그 무슨 불행일까. 이름만 황후일 뿐 난나는 그저 공작이 황제에게 상납한 자궁일 뿐이었다. 그가 숱하게 바쳤던 공물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황제는 물론 귀부인들에게도 조롱을 당하는 것이다. 난나는 황제의 밤 시중을 드는 것보다 귀부인들의 조롱과 무시가 익숙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 일일 수가 없었다. “왜 웃지?” “제, 제가 웃었나요?” 난나가 물었다. 그녀는 황급히 도리질 쳤다. 그가 오해할까 두려웠다. 난나는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낯빛을 굳힌 다음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그를 두고 여유롭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보일까 무서웠다. “그냥, 그냥…….” “뒤로 돌아.” 난나의 말허리가 잘렸다. 그녀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깨를 웅크린 채 뒤로 돌았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난나는 처음에 이유를 몰랐으나 차츰 그의 마음도 이해하게 되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라도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녀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도 죄스러워하는 남자인데……. 사실은 그녀도 이게 편했다. 그녀 또한 섹스를 하는 중에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정감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이 그녀 또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를 수시로 경멸한다는 듯 낯을 일그러트리는 것 또한 그랬다. 그러니 가능하면 얼굴을 안 보는 게 낫다. 난나는 제 가슴을 움켜쥐는 손을 보았다. 몹시도 커다란 손이었다. 에버하르트 공작의 것만큼이나 길고 날렵한 손은 마디마디가 굵었다. 힘을 주지 않는데도 손등의 핏줄이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어 난나는 그의 손마저 무서웠다. “공작에게 서궁으로 가지 않도록 해 달라 매달렸다지?” “그게…….” “그가 그것을 들어줄 줄 알고.” 황제의 음성이 마른 사포 같았다. 버스럭거리는 속삭임은 특별히 조악하지 않았으나 난나는 그의 숨소리마저 두려워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입술을 달막거리다 그저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흘렸다. 머리채가 움켜 잡힐 것 같았다. 그러다 잘못하면 따귀를 맞을 수도 있었다.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그녀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황제는 그녀 자체가 거슬리는 남자라……. “그래서 공작의 좆도 빨았나.” “그렇지 않아요.” “밑구멍을 팔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렉시스가 태어날 수 있어?” 그가 웃었다. 그 일이 재미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난나는 일그러진 채 헐떡거렸다.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말투보다, 그가 공작에게 범해진 일을 우스운 가십이라도 되는 양 지껄이는 태도가 충격적이었다. 난나는 벌벌 떨면서도 모욕감과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해 봐.” “흐, 흑, 으윽…….” 깨문 입술 사이로 긴 울음이 흘렀다. 눈을 감은 채 그저 그를 견디고 있는데, 머리채가 홱 하고 틀어 잡혔다. 그대로 돌려져 그와 시선이 엉켰다. 남자는 웃고 있었으나 뒤틀려 있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만큼. “……폐하.” 물기 어린 음성이 젖은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는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난나는 그게 가장 두렵고 슬펐다. 황제는 그녀의 고통을 외면했다. 가끔은 도리어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난나의 비명과 신음이……. 그녀의 두꺼운 몸 아래서 내지르는 모든 것들이 그의 욕정을 돋우는 것 같았다. 문득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익숙한 행위였으나 고통은 조금도 적응되지 않는다. 난나는 머리채가 우악스럽게 뒤로 꺾여진 채 눈물을 떨어트렸다. 신음하며 헐떡이는 목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그런 적 없어요.” 난나는 거짓말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그녀는 화간한 게 아니니까. 좋아서 공작과 한 게 아니었다. 어느 때고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비참했다. 그가 움켜잡았던 머리채를 침대에 내던졌다. 벗은 몸을 한 난나가 눌린 신음을 흘리며 침대를 짚었다. 그대로 그가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봉긋하게 솟은 하얀 달덩이 같은 살이 짓뭉개졌다. 젖은 눈을 깜빡거렸다. 스타테이라가 그렇게 되고 황제는 생각보다 쉽게 그녀를 허락했다. 그리고 쉽게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던 좆은 이제 아주 금방 발기되었다. 임신은 체질이라고 했던가. 스타테이라가 연금술사에게 비술까지 얻어 가며 하려 했던 임신을 그녀는 아주 쉽게 했다. 특별한 행위 없이도 그녀는 금방 아이를 가졌다. 그게 비참한 일인 줄 몰랐으나 난나는 사정이 그리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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