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드리워지는 그림자
Chapter 2. 드리워지는 그림자
‘진짜로 겨울에 둑이 얼었다가 녹으니까 허물어지는구나.’
처음부터 부실하게 지어서인 건지, 아니면 여기 토양이 원래 그런 건지.
하여간 란은 말을 타고 꼼꼼하게 살피는 시늉을 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본다는 걸 보여 주면 확실히 신경을 쓰겠지!
게다가 관리인이 특별히 농부를 직접 불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줬다.
‘높은 분이라고 눈도 못 마주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옷도 좀 더 검박한 것으로 입으려고 했는데, 디모디아가 기겁하고 반대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영주님이 허름한 옷을 입는 걸 누가 좋아해요?”
하며 말이다.
“어, 친근해 보이지 않아?”
“평민과 친해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보라색 눈을 크게 뜨면서 갸웃하고 물어와 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평민의 감각에 가장 가까운 루미에에게 화려한 옷차림에 대해서 물었고, 루미에는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모시는 분이 초라한 건 싫습니다.”
그야말로 문화 충격.
란은 신분제는 역시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뚜렷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영지민들도 “우리 영주님 예쁘고 옷도 진짜 멋있지!” 하는 편을 원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물으니 루미에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물론 그보다는 얼마나 구휼을 베푸는가에 달렸지만요.”
하고 답해 주었다.
란은 “그건 확실히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치아는 겨울이 길어서, 식량 부족은 만성적이었다. 작년에 돈으로 대량의 식량을 구매해서 나눠 주기도 했고, 봄이 되자마자 시작한 것도 식량을 빌려주는 일이었다.
‘공짜로 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대신 이자를 낮게 책정해서…….
유스타프는 고리대금업자들을 손가락으로 개미 누르듯이 제거해 버렸고, 란은 ‘그, 그렇게까지?’ 하고 생각했는데 현대의 사채업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리에다가 악덕업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엘리자벳조차도 속 시원하다는 어투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루미에도 그런 축 아닌가.’
노예로 팔릴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서 사채업자란 정말로 엄청난 존재인 거겠지.
하여간 그래서 너무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화려한 옷으로 차려입고 순시를 나섰다.
나서는 길마다 영지민들이 나와서 ‘라치아 만세!’를 외쳐서 란은 그건 도무지 참을 수 없다고 금지했다.
“어떤가요? 올겨울은 지낼 만했나요?”
란의 물음에 농민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영주님 덕분에 아무도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보냈습니다.”
“혹시 얼음수정이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충분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란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줘요. 제가 공작님께 청원하겠어요.”
그러자 갑자기 농부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바라면 제가 욕심쟁이지요.”
그러며 엉엉 울어서 란은 정말로 당황했고, 중간에 있던 관리자가 그를 달래며 말했다.
“이렇게 높으신 분께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이 감격스러운가 봅니다.”
아니, 그 무슨 위대한 수령 동무 같은 이야기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 억지로 말하고 있는 건가? 강제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캐물었고 그러자 농부는 정색하며 넙죽 엎드렸다.
“아닙니다!! 정말로, 저는, 이렇게 풍족한 겨울을 보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게다가 저 같은 놈에게 그리 친절히 대해 주시니……!”
하며 감격했다는 대사를 늘어놓아 란은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앞으로 불편한 일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 줘요.”
그러고는 재빠르게 일행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말에 올라타고 그곳을 벗어나 란이 나란히 달리는 루미에에게 속삭였다.
“진짜 깜짝 놀랐어.”
“그런가요?”
루미에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 농부의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되었다.
“혹시 누가 협박하거나, 내 칭찬을 하라고 한 게 아닐까?”
그녀가 눈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물어서 그는 작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저도 주인님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걸요.”
그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란은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지만, 그래도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암행이라도 해 봐야겠는데.’
괜히 왕이 암행을 하거나 암행어사를 보낸 건 아닌 것 같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지 끝에서 끝까지 순시를 하고 싶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가신들의 봉토를 직접 둘러보는 것도 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할 수는 없지.’
공작인 유스타프가 직접 순회하는 건 모두가 상당히 기뻐할 듯했다. 하지만 백작인 란에게 그럴 권한은 없었다. 총관이며 가주 대리라고 해도, 그건 선을 넘는 일이다.
‘공작 부인이라면 모를까.’
생각하자 란은 저절로 뺨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쓰며 말을 좀 더 빠르게 달렸다.
“그럼 이제 슬슬 순시도 끝이네.”
그녀의 말에 뒤에서 따라오던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늘까지는 외부에서 묵고, 내일은 하늘 저택으로 돌아가는 일정입니다.”
“아, 드디어 가는구나.”
하늘 저택이 완전히 ‘나의 집’이라는 감각이 되어 버렸구나, 하고 란은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전에 오늘은 별장에서 묵겠지만요.”
블레인이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더해서, 일부러 이렇게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란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살짝 미소 지었고, 블레인이 화급히 덧붙였다.
“물론 뭐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외부 순시는 힘든 일이니까요.”
“알아요. 하지만 유스― 아니, 가주님이 맡기고 가신 거니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블레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따로 가신들을 모아서 한 이야기가 있었다.
“란에게 청혼했어.”
마치 ‘오늘은 빵을 먹지.’ 하는 것 같은 평이한 말투여서 모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게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와일드 남작이었다.
“청혼하셨다고요! 로미아 백작님께?!”
“그래.”
그러자 일루미니티 백작이 느릿하게 물었다.
“그래서 성공하셨습니까?”
“아니.”
드물게 유스타프가 쓴웃음을 머금고 말하고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쪽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군.”
“란 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가?”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그를 빤히 봐서 일루미니티 백작은 “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짤막하게 답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서 가신들 사이의 분위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공통적으로 ‘괜찮은데?’ 하는 느낌이었다.
엘리자벳만이 후에 “란 님을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이익 때문에 혼인하시는 걸까요?” 하고 말했지만, 블레인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일단 거절하셨다고 하셨고.’
블레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란을 물끄러미 보아, 란이 물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화급히 블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란은 의아해져서 눈을 깜박였다가 말했다.
“오늘은 별장이라고요?”
“네, 예전에 지어 둔 라치아 가문의 별채나 별장이 여기저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관리 상태가 나쁜 곳도 많지만― 오늘은 괜찮은 곳이랍니다.”
“그렇군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시도 일주일째였다. 진흙탕 길을 마차로 달리는 건 말을 달리는 것보다 어려워서 란은 말을 타고 있었고, 그래서 저녁에 말에서 내려서 침대에 몸을 던지는 순간은 항상 행복했다.
“얼른 도착하면 좋겠네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별장은 깔끔하게 지어져 있었다. 2층짜리 작은 저택을 별장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란은 생각했지만 뭐 별 상관은 없겠지.
마지막이니 기분도 느슨해져서 란은 완전히 흐물흐물 녹초가 되어 버렸다.
이제 마지막 순시도 끝, 집에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니 긴장이 풀렸다고 해야 할까.
디모디아가 소파에 녹아내린 양초처럼 붙어 있는 란을 보고 말했다.
“란 님, 그렇게 계시지 말고 일단 씻으세요.”
“어? 씻을 수 있어?”
“그럼요. 욕조도 있고, 물은 기사분들이 퍼다 주셨어요.”
그 말에 란은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욕조를 채울 만큼 물을 퍼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도 충분히 끓여 놨고요.”
“고마워.”
란은 그렇게 인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끓인 물을 담은 냄비와 찬물을 담은 통이 놓여 있었다.
‘아껴서 잘 써야겠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물을 섞기 시작했다.
✥✥✥
유스타프는 따끔따끔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한쪽 무릎만 꿇고 있는 자세는 편한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리에서 멋대로 일어나면 일이 더 귀찮아지겠지.
요즘 새로 황제가 된 루스가 하고 있는 짓이 이거였다. 정식으로 작위를 승인해 준다고 불러 두고, 알현실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에 그대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방치해 두는 것.
모욕감을 느끼기보단 지루했고, 시간이 아까웠다.
‘어떻게 할까.’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알현실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공작.”
유스타프가 고개를 드니 방긋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은 올리비아였다.
“황후마마.”
그가 고개를 숙이자 올리비아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자, 일어나요. 혹시 다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그녀가 싱글싱글 웃으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나며 말했다.
“마마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그녀가 보라색 눈에 반짝임을 담으며 물었다. 유스타프가 이어 말했다.
“전 폐하를 알현하러 온 거니까요.”
“폐하께서는 지금 바쁘세요. 남작 부인을 만나러 성을 나가신 지 오래랍니다.”
“아.”
유스타프는 짧게 소리를 내고도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젊은 공작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와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보라색 눈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한 점의 그늘도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목이 마르군요.”
“좋아요.”
올리비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스타프는 에스코트 요청을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올리비아가 이미 다과를 준비해 놓은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고, 유스타프는 자리에 앉았다.
올리비아는 그의 찻잔을 직접 채워준 후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무례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죄하지요.”
“마마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올리비아가 순진한 얼굴로 갸웃했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그럴까요?”
올리비아는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어린 젊은 공작은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치운 건 잘되었어.’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리게 케이크를 포크로 잘랐다.
사실은 자신의 남편―루스를 없앨까 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는 루스를 없애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독을 황제에게 내주었다. 말썽부리는 황태자와 그의 짝인, 마음 아픈 손가락인 황태자비가 내민 음식을 별 감식 없이 납죽납죽 삼키고, 황제는 어느 날 그냥 심장마비로 명을 달리했다.
잔소리꾼인 황태후 역시 뒷방으로 치워 버리자 황제인 루스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영리한 황후인 자신뿐.
올리비아는 루스가 마음껏 밖으로 돌게 내버려 뒀다.
그리고 거기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저에게 와서 호소하는 걸 내치지 않았다.
깊게 들어주고, 그리고 때때로 힘도 써 주었다. 루스는 황제가 된 후에도 국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녀가 서류를 보고 대신 결재하는 것도 몰랐다.
‘멍청한 놈.’
야금야금 올리비아는 황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라치아 공작에게도 충분히 빚을 지우고, 얻어낼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더불어서.’
올리비아는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내 취향이기도 하고.’
“제가 공작을 도울 수 있을 것 같군요.”
“마마께서요.”
“네, 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폐하와의 화해의 자리요.”
“그래요. 물론, 어떻게 해야 할지 공작도 잘 알겠지요. 전 라치아 공작이 더 이상 라치아가 아니게 되었다는 건 들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올리비아는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곧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백작 위를 주었다는 걸 들었고, 올리비아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1. 유스타프가 란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2. 유스타프가 란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아니면 둘 다일지도.’
하지만 그래 봐야, 한 사람.
가치는 그렇게 높지 않다.
“그녀를 수도로 오게 하는 게 어떤가요? 화해의 장소에 그녀가 함께하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고, 일도 잘 마무리가 될 거예요. 라치아는 별문제 없이, 예전처럼 황실의 존중을 받게 되겠지요.”
한마디로 란을 황제에게 바치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네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렇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차를 마셨다. 찻상을 차려 놓은 지 오래되었는지, 찻물은 미지근했다.
유스타프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이건 폐하와 저 사이의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유스타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승인을 받지 않는다고 라치아가 라치아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 오만한 말에 올리비아는 움찔했다. 그녀가 굳어지는 얼굴에 재빠르게 웃음을 덧칠했다.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공작님은. 반역죄가 될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석 요청도 하지 않은 무례함이었다.
“그럼 전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황후마마, 고견은 새겨듣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인사한 후에 자리를 떴다. 그가 나가자 올리비아의 얼굴이 굳었다.
흥!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래, 제힘으로 얼마나 하는지 한번 보자고.’
그녀는 입을 비죽였다.
유스타프가 궁전을 나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차와 함께 로스가 다가와 험악한 얼굴을 했다.
“오늘도 자리에 없었습니까?”
“남작 부인과 놀러 갔다는데.”
유스타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로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화가 나서 그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 “씨!” “아오!”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그가 말했다.
“계속 이렇게 치졸하게 나올 거랍니까? 그래서 어쩌려고요?”
“그러게, 어쩌려는 걸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라바트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하며 말했다.
“벌써 더워지는군.”
“수도의 여름은 빠르니까요.”
“그래, 그렇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황궁을 둘러봤나?”
“네?”
느닷없는 물음에 로스는 눈을 꿈벅였다. 황궁을 둘러보았냐니?
유스타프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마법 세공품을 아주 많이 쓰고 있더군.”
✥✥✥
루미에는 피가 튀는 걸 슬쩍 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블레인이 마지막 한 놈을 해치우는 게 눈에 들어왔다.
루미에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누굴까요. 습격한 놈들은.”
블레인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시체를 걷어차며 말했다.
“한 놈은 살려 놓을 걸 그랬군.”
“그랬으면 자살했을걸요.”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고 머리가 없어진 시체 몸뚱이를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딱히 신분을 알려 줄 만한 건 없네요. 이런 한밤중에 습격이라니. 게다가 우리가 오늘 밤 여기서 묵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죠?”
블레인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란 님의 순시 일정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어.”
“저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죠. 저도 그렇습니다. 라치아에서는 칭송받는 분, 그 자체 아니던가요.”
비꼬는 건지 아닌 건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시체의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안쪽에 뭔가 액체가 들어 있었다.
“비싸 보이는 유리병과 정체불명의 약이네요.”
루미에가 뚜껑을 열고 향을 맡더니 눈을 찌푸리며 뚜껑을 도로 닫았다. 그걸 블레인에게 던지며 그가 말했다.
“수면제입니다.”
“수면제?”
“일종의 마취제지요. 납치가 목적이었던 걸까요?”
“그런가.”
블레인은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 납치는 중죄였다. 루미에가 시체의 옷을 벗기며 말했다.
“주인님이 소수 인원을 데리고 나왔으니까요, 전원 죽여 버리고 납치할 자신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실제로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고.”
블레인은 루미에가 옷을 벗겨 내는 걸 보며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다고 대여섯 명의 인원으로 습격을 해 왔단 말인가?”
“이렇게 쉽게 발각될 줄은 몰랐던 것 같네요.”
루미에의 말에 블레인은 움찔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지고 있던 건 수면제만은 아닌 것 같네요.”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 블레인과 루미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디모디아가 짜증 난 얼굴로 다가와 블레인에게 솜뭉치 같은 걸 내밀었다.
“난로에 이런 게 설치되어 있던데요.”
“솜?”
“수면향이에요. 모르고 난로를 피웠다면 다들 그걸 마시고 곯아떨어졌겠지요.”
디모디아의 말에 블레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루미에가 알몸이 된 시체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훈련을 받은 놈들이네요. 암살자 길드?”
중얼거리고 루미에는 혹시 제 과거와 연결된 놈들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방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백작 납치를 할 만큼 배짱 있는 놈들은 아니다.
“주인님은?”
루미에의 말에 디모디아가 웃었다.
“아가씨는 잘 주무시고 계세요. 피곤하셨겠지요.”
루미에는 그 말에 웃었다.
“피곤하시겠지.”
그리고 디모디아가 말했다.
“둘 다 먼저 가세요. 여기는 제가 치우지요.”
블레인이 “혼자?” 하고 물었다가 얼른 정정했다.
“알았네.”
루미에 역시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저택으로 사라지자 디모디아가 뒤를 돌아보았고, 어둠 속에서 녹영이 한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 말고 더 있었나요?”
디모디아의 물음에 녹영 중 한 명이 대답했다.
“한둘 정도.”
“살아 있나요?”
“물론.”
디모디아가 피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체도 같이 가지고 가서 연구하면 되겠네요.”
그녀의 말에 녹영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체를 자루에 넣고, 핏자국을 치우기 시작했다.
디모디아는 제 입술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녹영의 역사는 길다.
청염과 녹음.
이 둘의 역사는 라치아의 시작과 같이했다.
전면의 청염 기사단이 생긴 것보다 후면의 녹영이 생긴 게 좀 더 후의 일이지만 말이다.
원래는 이름이 녹음이었지만, 후에 녹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 ‘녹음’이었던 초기에는 공작 부인 소속의 집단이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후로 공작이 직접 통솔하게 되면서 이름도 녹영이라고 바꾸었고 말이다.
유서 깊은 집단인 만큼, 녹영은 자부심도 컸다.
‘그만한 능력도 있고.’
디모디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누군지 몰라도 싸움을 건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란은 이튿날 아침 콧노래 소리에 잠이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디모디아가 웃으며 인사해 왔다.
“일어나셨어요?”
“응…….”
하품과 함께 중얼거리고 란이 디모디아를 보았다. 뭔지 몰라도 디모디아는 한껏 신이 난 듯이 보였다.
‘돌아가는 날이라서 그런 걸까.’
녹영이라고 해도, 이런 곳까지 시녀로 따라오게 하고. 힘들기는 하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안함을 담아 그녀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늘 저택으로 돌아가면 휴가를 줄게. 디아만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디모디아가 “어머?” 하고 웃었다.
“란 님을 위해 일하는 게 제 기쁨이지요. 자, 얼른 일어나세요. 오늘 날씨가 좋아요.”
란은 기지개를 길게 쭉 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여니 정말로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라치아도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오늘은 집에 가는 날이다!’
란은 들떴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낮은 탁자가 넘어졌다. 루스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실패해? 네놈들에게 준 돈이 얼마인 줄 알아? 어?!”
“송구합니다.”
납작 엎드린 상대에게 다가가 루스는 마구 발길질을 해 댔다. 황태자 때부터 안하무인이었던 성격은 황제가 되자 더욱 꽃을 피웠다.
“내가 뭐 어려운 걸 말한 것도 아니고! 힘없는 여자 한 명 데리고 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냐!”
루스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몇 번 더 그가 발길질을 하고 씩씩거리자 그의 애첩인 코르티잔 새러가 다가가 루스의 팔에 붙었다.
“폐하, 마음을 푸세요, 네? 또 기회가 있겠지요.”
그녀는 창녀답게 비위를 살살 잘 맞출 줄 알았다.
“이걸로 폐하의 위엄을 그도 알았을 겁니다. 그렇지요?”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떠는 새러를 보자 루스의 마음도 풀렸다. 제 위대함을 알아주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새러의 알랑알랑하는 말에 남자는 더더욱 납작 엎드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흥, 내가 관대해서 봐주는 줄 알아라. 다음에는 꼭 그 여자를 봐야겠어.”
“물론입니다.”
말하고 푸아킨은 재빠르게 물러났다. 방을 나오며 그는 이를 갈았다.
할 수만 있다면 길드장의 목을 따 주고 싶었다. 이런 일을 받아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길드장이 높은 연줄을 잡았다고 시시덕거릴 때만 해도 보통의 귀족이라고 생각했지. 설마 황족, 그것도 황제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자신같이 미천한 신분이 그런 높은 자와 얽히는 게 뭐가 좋단 말인가?
푸아킨은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암살자 길드라고 하면 ‘누구든 돈만 내면 죽여 주는 무서운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런 실력자를 키우는 데는 돈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고, 당연히 실력이 좋을수록 몸값도 높아진다.
‘그런데 그런 실력자들이 전부 다 죽어 버렸잖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길드 최고의 실력자들을 전부 보냈는데,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라니.
푸아킨은 못 한다고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자신이 먼저 제거될지도 모른다.
‘길드장이 알아서 하라지.’
푸아킨은 그렇게 생각하며 걷어차여 아픈 등을 문질렀다.
✥✥✥
란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연락이 없어.’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벌써 5월 초입. 이제 유스타프에게서 편지가 도착해야 할 시점이었다.
아니, 자신이 얼마나 많이 편지를 보냈는데?
읽씹인가요?
‘어째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란은 자신이 열심히 편지를 써 보냈던 유스타프의 아카데미 시절을 생각했다. 그때도 답장 한 통 없었지.
‘적어도 내가 백 통은 보냈을 텐데!’
그리고 또 이런 상황이라니.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제 더럭 겁이 났다.
황제가 유스타프에게 뭔가를 한 게 아닐까? 루스는 멍멍이니까 뭔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유스타프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리가 없다.
예전이라면 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아도 ‘또 이러네.’ 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 유스는 날 좋아한다고 했고!’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그리 생각하니 란은 초조해졌다.
그래서 란이 ‘당장 수도로 찾아가 봐야겠어!’ 하고 결심할 때쯤 유스타프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받자 안도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란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찢었다.
그 안에는 수도에서의 일이 상당히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얼음수정의 황궁 출하를 막아 달라고?’
란은 유스타프의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이거 빨리 레버리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쭉 편지를 살폈다. 황제가 유스타프에게 한 짓에 저절로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걱정하실까 봐 연락을 못 했다, 하는 그의 말에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하는 편이 덜 걱정한다고.’
그리고 마지막 덧붙임을 보고 란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P.S. 보고 싶습니다.
유스타프의 글씨체는 예뻐서,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보고 싶다니, 갈까.’
란이 그런 생각을 하며 갸웃거리는데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란이 고개를 들자 그가 얼른 말했다.
“드워프분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마침 그녀는 서재에 있었으므로, 란은 격의 없이 드워프를 서재로 불렀다.
이미 드워프 기술자들은 얼음수정 광산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었고,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채굴량 역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서재로 들어온 것은 검은 산에 남아 있었던 제투라였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제투라,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그 말에 제투라가 큰 소리로 웃으며 제 다리를 쳤다.
“편지보다 내 다리가 더 빠르다고.”
란은 그 짤막한 다리를 보며 의구심에 빠졌지만 하여간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며 말했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나디움으로 만든 물건이 완성되어서 그렇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고 시종 둘이 나란히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제투라가 투덜거렸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들어올 수 있는데 말야. 인간은 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참, 나.”
“그게 우리의 예의니까.”
란이 웃으며 말하고 시종에게 상자를 내려놓게 했다.
검은 산의 문장이 낙인찍힌 나무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졌다. 하나는 길쭉한 것이 검 같은데, 다른 하나는 뭘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바라보았고, 참지 못한 제투라가 먼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이건 란에게 주는 선물이야. 우리의 친구에게.”
에헴 하며 제투라가 상자 안의 옷을 꺼내 보였다.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광물로 옷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진줏빛의 아른아른한 민소매 웃옷은 가운데에 보석까지 박혀 있었고, 짤 때부터 문양을 넣은 건지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특별히 마법 세공까지 한 물건이지.”
제투라가 씨익 웃었다.
“입고 나면 어떤 칼도 창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거야?”
“아니, 나디움 자체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거기에다가 마법 세공을 한 것뿐이지. 입고 나서 꼭 그 보석을 반 바퀴 돌려봐.”
“고마워. 잘 입을게.”
란이 조심스럽게 옷을 받아 들었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라 금속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다.
란은 연신 감탄하며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역시나 검이었다.
검막과 검손잡이는 단순하게 딱 떨어지지만, 보통 금속이 아닌 게 느껴졌다.
새까만 금속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란은 침을 삼키고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렁하는 차가운 소리와 함께 검은빛 검신이 뽑혀 나와 그녀는 작게 찬탄했다.
“그 빌어먹을 숲지기 놈들의 제품보다 훨씬 더 나을 거다! 나디움으로 만든 검이니까.”
제투라가 제 수염을 잡아당기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신경 쓰고 있었구나.’
유스타프의 검이 엘프제라는 걸, 하고 생각하며 란이 웃었다.
“고마워. 잘 쓸게.”
“별말을. 그 광천수에 나디움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제 우리 검은 산은 드워프들 중에서 최고가 될 거야.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싸지.”
제투라가 손사래를 쳤다.
14개의 대가문 중에서 제 산의 이름을 붙인 최고의 광물을 가진 가문은 자신들뿐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검은 산 일족에게 큰 은인이라 제투라는 은근히 말했다.
“뭔가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 얼마든지 만들어 줄 테니까.”
란이 싱긋 웃었다.
“고민해 볼게.”
그러다 그녀는 ‘아.’ 하고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말야, 드워프 쪽에는 이브리아나 빙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대현자 말이야?”
제투라는 의외의 질문에 눈을 끔벅였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라치아가 가장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겠지만, 그래도 그쪽은 수명이 길잖아?”
드워프의 수명은 300년.
인간과 시간이 다르니 기록도 훨씬 뚜렷하지 않을까.
제투라는 수염을 잡아 뽑을 듯이 두툼한 손으로 당기며 말했다.
“글쎄. 한번 물어보기는 해 보지. 어쩌면 서고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 주면 고맙겠어.”
란이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생각난 김에 나중에 하레쉬에게도 물어봐야겠다.
라치아의 서고는 여전히 살펴보고 있지만, 요즘은 일이 바빠서 통 들어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쪽 일도 보통이 아닌데.’
란은 끙끙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발 동동 구르지 말고 눈앞의 일 하나부터 하나씩.’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제투라에게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때 문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녀가 말했다.
“참,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지.”
제투라의 말에 란이 작게 말했다.
“루미에라고 내 호위기사 본 적 있지? 혹시 그 사람을 위해서 검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제투라가 “드디어 들어줄 만한 부탁을 하는구만!” 하고 제 가슴을 탁탁 두들겼다.
“좋아, 맡겨만 두라고!”
“정말? 고마워.”
란이 웃자 제투라는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가 진짜 좋은 검을 만들어 주지. 일단 그 호위라는 자와 이야기해 봐도 되겠나?”
“물론이야.”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투라는 당장 찾아가 보겠다고 말하며 쉬었다가 가라는 란을 뿌리치고 밖으로 향했다.
“아니, 루미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시종을 한 명 불러서 제투라를 쫓아가서 루미에가 있는 기사단까지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드워프나 엘프나 참.’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시종에게 맡겨서 올려 보내게 했다. 그러고서 그녀는 레버리에게 연락했다.
얼음수정의 판매는 전부 골든로즈 상단에 위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화권 밖이라 레버리에게는 바로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란은 메시지를 남겼다.
‘황실에 납품을 중단해 달라’는 내용을 남기자 받는 직원은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공손하게 “전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란은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깃펜을 들고 유스타프에게 답장을 쓰려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비죽였다.
‘저쪽 답장이 늦어서 내 속을 다 태웠는데 난 왜 바로 답장을 보내야 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흥, 하고는 펜을 도로 꽂아 넣었다.
당분간 답장은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란은 엘리자벳과 블레인을 불러서 유스타프에게 답장이 온 것과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역시 둘 다 걱정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연락이 안 되면 걱정될 만하다. 그리고 란이 이어서 황실에 얼음수정 납품을 중단했다고 하자 둘은 입을 떡 벌렸다.
엘리자벳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블레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좋은 성과가 날까요? 아무리 마법 세공품에 익숙해졌다 해도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잖습니까?”
그걸로 타격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런 물음이라 엘리자벳이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의 핵심은 다른 사람은 모두 마법 세공품을 즐기고 있다는 겁니다.”
“맞아. 여름에 다들 냉풍기를 틀고 시원하게 지내고 마법 램프를 켜는데, 자기들만 양초를 켜고 부채를 부친다고 생각해 봐.”
그것도 황궁이.
마차를 타고 다닐 때 말의 날개를 펼칠 수도 없다.
블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지?”
란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게 있는데 말야.”
이어 말하며 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유스타프는 녹색 아치에 처박혀 있는 중이었다.
황제에게 미운털이 박혔다고 해도, 라치아는 라치아.
여기저기서 사교 시즌의 초청장이 날아왔지만, 녹색 아치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점점 따뜻해졌고, 화창하다 못해 더운 날이 이어졌다.
녹색 아치의 집사 롤프는 드물게도 걸음을 빨리했다.
“가주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이?”
유스타프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초대장도 없이 바로 들이닥치다니, 어지간히 무례한 손님이다 하는데 롤프가 얼른 덧붙였다.
“키릭스 후작 부처이십니다.”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 알현실로 모셔라.”
“네.”
롤프가 지시를 듣고 빠르게 돌아가자 유스타프는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지?’
그러면서도 키릭스 후작의 성격상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알현실로 들어가니, 두 부부가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로크.”
“라치아 공작님.”
싱긋 웃으며 카로크가 일어나 제법 예를 갖추자 유스타프가 손을 저었다.
“그냥 유스타프라고 부르면 돼.”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그럼 유스타프.”
카로크는 그렇게 말했고, 엘리제도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펴며 인사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란은 같이 오지 않은 건가요?”
“네.”
유스타프는 엘리제에게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엘리제가 입을 비죽였다.
“아쉬워요. 그보다 란을 라치아에서 쫓아냈다는 게 사실이에요?”
엘리제의 호박색 눈이 가늘어져서 유스타프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엘리제가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저는 란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백작이고요.”
“백작이라고요?”
엘리제의 얼굴에서 약간 화가 빠져나갔다. 유스타프는 그녀에게 작위를 줬다고 설명했고, 그러자 엘리제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수도에 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위를 승인받으려면요. 아무리 라치아가 천 년 가문이라고 해도―”
“네, 그래서 폐하와의 일이 좀 풀리면 그녀를 부를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엘리제는 갸웃하고는 빙긋 웃었다.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찾아왔으니 같이 나가지 않겠어요?”
유스타프는 의아해졌다.
“같이 말입니까.”
“말을 타고 외곽 산책이라도 하죠. 요즘 그러기 딱 좋은 날씨니까요.”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저택 안에 있는 건 확실히 지루한 일이었고, 키릭스 후작 부처와 가깝다는 걸 알려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유스타프가 키릭스 후작 부처와 함께 말을 타고 나가겠다고 하자 롤프는 무척 기뻐했다.
“빠르게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손님용 말도 함께 준비하지요. 도시락도 준비할까요?”
잠시 고민하다가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서 손해 볼 일은 없으리라.
유스타프는 엘리제가 옆 안장으로 앉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엘리제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란은 분명히 옆 안장으로 타지 못할 겁니다.”
엘리제가 “어머? 정말요?” 하고 눈을 크게 떴고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 안장으로도 간신히 타게 되었는데, 옆 안장으로 탈 수 있을 리가.
“그럼 다음에 가르쳐 줘야겠네요.”
엘리제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감사하군요.”
마지막으로 유스타프가 말에 올라타 세 사람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가자 그걸 배웅한 롤프가 빠르게 시종을 불렀다.
“지금 나가셨다고 전해 드려라.”
그의 속삭임에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재빠르게 저택 밖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삼나무 길을 경쾌하게 달렸다. 날씨는 눈부신 초여름 날씨였고, 모두가 산뜻한 차림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 날개 달린 말은 상당히 흔해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말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어차피 환상 마법이라 날개끼리는 겹치거나 닿아도 상관없으므로 통행에 문제도 없었다.
그래도 거슬리는 사람들은 걸을 때는 날개가 보이지 않다가, 달릴 때만 날개가 펼쳐지는 세공품을 선호했다.
엘리제가 그늘을 따라 말을 몰며 말했다.
“란이 백작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한겨울에는 라치아에 도무지 편지가 가지 않네요.”
“이제 슬슬 편지가 오고 갈 때죠.”
유스타프의 말에 엘리제가 씩 웃었다. 그녀의 모자에 달린 최신 유행 장식이 반짝였다.
“티파티에서 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들 ‘쫓겨난 전 라치아 공작’ 이야기를 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어쩜 그 소문만 그렇게 쏙 퍼진 걸까요.”
엘리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란이 어떻게 될지는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으니까. 작년 사교 시즌에 너무 이목을 끌기도 했고.”
카로크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귀족 계승도를 살펴봐야 하지.”
귀족 계승도는 황실 서고에 보관되고 있는 커다란 책으로, 각 귀족의 직계와 방계 계보도를 그려 놓은 책이었다. 혹시 모를 상속 싸움이나 몰래 신분을 세탁하는 걸 막기 위한 장치였다.
물론, 그 계보로 신분 세탁을 하는 작자들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매해 새로 간행되는데, 귀족들 사이의 필수품이었다.
그해에 나온 귀족 계승도를 보고 신분을 암기하는 것이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게다가 내가 계승도를 수정한 건 수도에 도착해서였으니까.”
“누군가가 그 계승도를 살펴보고서 말을 퍼트렸다는 거네요.”
살짝 엘리제가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황후마마일 것 같아요.”
말은 추측이지만 어조는 확신이었다. 엘리제가 콧방귀를 흥 뀌고 말했다.
“소문이 일단 여자들 사이에 먼저 퍼졌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분은 항상 란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으니 말이죠.”
“그야 제 남편이 그러면 그럴 만하지.”
카로크의 말에 엘리제는 눈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게 란의 탓은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새 황제 폐하는 이제 란에게서 손을 뗀 겁니까?”
카로크가 갸웃했고 유스타프는 차갑게 말했다.
“아닐걸.”
“황제가 뻣뻣하게 나오는 게 결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군요.”
카로크가 씁쓸하게 말했다.
새 황제가 라치아 공작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역시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결투 때문일 것이 뻔해서 모두가 황제는 명예도 모른다고 수군거렸지만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는 없었다.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키릭스 후작 부부와 라치아 공작을 발견한 귀족들은 말 위에서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카로크가 말했다.
“내일이면 우리가 라치아 공작과 산책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겠군요.”
“어머? 설마요.”
엘리제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오늘 저녁 시간에 이미 파다할 거예요.”
그 말에 유스타프는 질린 기분마저 느끼며 물었다.
“사교계의 소문이 원래 그렇게 잘 퍼지는 겁니까, 아니면―”
“라치아가 지금 화제의 중심이어서냐고요? 물론 양쪽 다지요.”
엘리제의 말에 유스타프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카로크가 말했다.
“이러다가 이제 길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사람이 나오겠군요.”
“어디로 들어갈까요?”
엘리제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그럼 제가 적당한 곳을 알아요.”
엘리제가 싱긋 웃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삼나무 길을 한 바퀴 돌아서 엘리제가 안내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골든로즈 상회에서 출자해 만든 이 찻집은 부띠크가 아닌, 다른 만남의 장소로 요즘 유행 중이었다. 귀족의 저택 못지않게 화려하게 지어진 내부는 마법 세공품들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 어떤 자리든 쾌적했다.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의 1층은 귀족이면 다 들어갈 수 있었고, 2층은 백작 이상의 귀족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을 맡기고 올라간 2층은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넓고, 높은 파티션으로 적절하게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이스티를 주문한 뒤 엘리제가 눈을 감고 냉풍기 바람을 음미하며 말했다.
“얼음수정 덕분에 여름에도 살기 편해졌어요.”
“란 덕분이죠.”
유스타프의 말에 엘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소문인데― 황궁에 공급되는 얼음수정이 전부 끊어졌다고 하던데요.”
유스타프가 그 말에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엘리제는 오싹 등을 따라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카로크는 ‘진짜였나.’ 하고 그 놀라운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공작령도 아닌, 미승인된 영지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마력이 깃든 광물을 황궁에 마구 들여놓으면 안 되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렇지 않나?”
“그야 그렇지요.”
카로크는 맞장구를 치고 잠시 황실이 얼마나 난리가 날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 역시 얼음수정이 없는 생활을 상상하면 답답한데―
게다가 이제 사교 시즌.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리는데 마법 세공품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어떤 꼴이 될지 뻔했다.
‘잘못하면 황실과의 전면전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그 황제가 과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까?
카로크는 루스를 떠올렸다. 황제가 된 그가 얼마나 엉망인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해서 ‘인자하신 황후마마가 얼마나 고생하시는가’에 대해서도.
카로크가 낮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 것 말입니다만.”
유스타프가 시선을 들어 카로크를 바라보았다.
“자연사일까요?”
엘리제가 움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여보!’ 하고 외칠 뻔한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유스타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그가 말을 골랐다.
“정정하신 분이셨지.”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물론 그렇지만.”
카로크가 눈을 찌푸렸다. 마침 파티션 뒤에서 가볍게 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시종이 차를 가지고 다가와 테이블 위에 차 세트를 늘어놓고는 물러났다.
유스타프가 차가운 냉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하지만 동의해.”
엘리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쾌하게 말했다.
“예전에 저에게 피비린내 어쩌고 하시더니 두 분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이런 장소에서 하시네요.”
카로크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뺨에 키스했다.
“내 아내가 무섭다면 그만두지.”
“제발 그래 줘요.”
엘리제가 입을 비죽였다.
그 뒤로 셋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대화는 평범한 주제로 흘러갔다.
유스타프는 엘리제가 전해 주는, 란에 대한 악의 가득한 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란의 거취를 모르는 작자들은, 란이 라치아 계승도에서 지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갖 상상을 부풀려 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스타프가 누구와 혼인할까 하는 것 역시 소문이 무성해요. 일단 가장 큰 후보는 우슬라 공작 영애랍니다. 그리고 나미아 후작 영애도 있지요.”
유스타프의 입가에 비소가 서렸다.
“안 그래도 몇 번이나 초대장은 받았습니다. 어쩐지 끈질기다 싶더니만,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까?”
“그래요. 젊고 돈도 많고, 심지어 라치아라고요? 물론 겨울이 싫기는 하지만 그건 녹색 아치에 나와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니까요.”
사정없지만 정당한 평가였다.
“저는 생각이 없는데 말입니다.”
“젊은 남자들이 다 그렇죠.”
엘리제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그를 넘겨다보았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시선에 말을 덧붙였다.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 말에 엘리제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누군지는 묻지 않겠어요.”
“그거 감사하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답했고, 카로크는 “난 궁금한데?” 하고 중얼거렸다가 아내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그렇게 가벼운 티타임이 끝나고 유스타프는 녹색 아치로 돌아왔다.
당연히 키릭스 후작 부부도 함께 돌아올 줄 알았는데, 둘은 다른 일이 있다며 빠져 버렸다.
충분히 무례한 일이었지만, 이미 말없이 쳐들어온 일부터가 그런 거라 유스타프는 별말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모습이 싫지도 않았다.
녹색 아치로 돌아오니 저택의 분위기가 밝아져 있었다.
‘내가 없어서 그런 건가.’
유스타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싱글벙글 웃는 롤프에게 겉옷을 벗어 주었다.
“하늘 저택에서 연락은 없나?”
유스타프의 물음에 롤프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아직 없습니다.”
“그래.”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편지를 보낸 게 한참 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란에게서 답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진흙탕 길을 지난다고 해도 너무 늦는다.
‘화난 건가?’
자신이 편지를 너무 늦게 보내서?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함이 살짝 몰려와서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딱히 란에게 숨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뭐라고 써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그가 쓰다가 버린 편지가 한가득이었다. 유스타프는 편지를 쓰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결국, 그가 보낸 것은 사건을 나열하기만 한 보고서 같은 편지였다. 할 수 있는 것은 추신으로 보고 싶다고 덧붙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란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렇다고 편지를 쓰다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획 눈을 가렸다.
“누구게~?”
경쾌한 물음에 유스타프는 너무 놀라 순간 몸이 경직했다.
더듬더듬 제 눈을 가린 손을 더듬고 유스타프는 그 손목을 붙잡으며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란……?”
란은 ‘누님’이 아니라 ‘란’이라고 불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란’이었다. 그녀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손을 떼고 웃었다.
“정답입니다.”
“여기는 어떻게―”
“보고 싶다며? 그래서 달려왔지요.”
씩 웃으며 말하고 물러나려는데 유스타프가 손목을 놓아주지 않아서 란이 말했다.
“유스, 놓아주지 않으면 소파를 돌아갈 수가 없어.”
그 말에 유스타프는 그녀의 손을 놔 주었다가 그녀가 팔걸이 부근을 돌자마자 재빠르게 그녀를 당겨 자리에 앉혔다.
“유스타프.”
짐짓 눈을 찌푸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가 란은 그와 눈이 마주쳐서 저도 모르게 눈을 떨궜다.
“보고 싶었습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간질간질해지는 목소리에 란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왔지요. 도대체 편지를 그렇게 늦게 보낸 이유가 뭐야?”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중얼거리고 유스타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루스와의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유스타프가 라치아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봄철 주요한 일들은 끝났고, 이쯤에서 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모두 찬성해 줬고.”
“그렇습니까.”
그의 대답이 애매하자 란은 저도 모르게 샐쭉해졌다.
“내가 온 게 좋은 거야? 싫은 거야? 하나만 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웃었다.
“싫을 리가 없지요.”
그 말에 란은 곧 기분이 풀어졌다. 그가 물었다.
“그럼 오늘 키릭스 후작 부부가 온 것도―”
“리제에게 부탁했지. 유스를 잠깐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그사이에 후다닥 들어왔답니다.”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가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로 란을 이길 수가 없네요.”
“이길 생각이야?”
란이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설마요.” 하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란은 얼굴을 붉혔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태연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황궁에 들어가는 얼음수정은 중단됐어. 이제 슬슬 재고가 떨어질 때야. 레버리의 말에 의하면 황실의 항의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는데.”
“그게 저희가 원하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일 년 더 독점을 주고 있으니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요.”
그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시는 길이 위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응, 괜찮았어. 위험할 게 뭐가 있어?”
란은 방긋 웃었다. 유스타프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호위는요?”
“루미에를 데려왔어.”
말하며 란은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왜인지 루미에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건 란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랬군요.”
하지만 유스타프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란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유스타프에게 새 검을 가져왔지.”
“새 검이요?”
“응, 전에 검은 산에서 드워프들에게 넘겨줬던 금속 기억나? 나디움이라고 말야.”
“납니다.”
“그걸로 만든 검을 제투라가 가지고 왔더라고.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훌륭한 검이니까, 유스타프의 마음에도 들 거야.”
그 말에 유스타프는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바꾸고 싶지는 않은데요.”
“어? 그래?”
“누님의 선물이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말없이 서 있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받아 둘까요? 이 검은 누님의 선물이고, 그 검은 란의 선물이니까.”
“뭐, 뭐야, 그게―”
간신히 말문이 트여 괜스레 투덜거리고 란은 시종을 불러 검을 가져오게 했다.
상자를 열어 검을 확인하고 유스타프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엘프의 검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엘프가 검을 만들며 숲의 기운과 예술혼을 불어넣었다면, 드워프제 검은 뭐라고 해야 할까.
살의가 있었다.
베고 상처 입히고 죽이는 것에 지독하게 충실한 데서 오는 날카로운 기운과 아름다움에 유스타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스타프가 검을 도로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란의 말이 맞습니다. 훌륭한 검이네요.”
“그렇지?”
란이 싱긋 웃었다.
그때 롤프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딱딱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유스타프의 물음에 롤프가 말했다.
“황궁에서 사신이 와 있습니다.”
“곧 가지.”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란에게 물었다.
“여기에 란이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시종들이랑 리제 외에?”
“네.”
“음, 아니. 없어.”
몰래몰래 왔으니까.
일부러 공작가 문장이 붙지 않은 마차를 골라서 타고 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유스타프에게 들킬까 봐 말이다.
“좋습니다.”
유스타프는 “얌전히 계십시오.” 하고 덧붙이고는 방을 떴다.
그와 롤프가 방을 떠나고 나서 란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서 양 뺨을 감쌌다.
이런 때에, 이런 감정이라니.
‘나 유스 좋아하나 봐.’
항복하듯이 란은 인정했다.
그의 손길이, 눈길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눈을 마주치고 싶고, 좀 더 만져 줬으면 했고, 좀 더 붙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을 붙여가며 뒷걸음질 치는 자신이 있다.
‘시나가 오면.’
그게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유스타프가 좋은데, 만약 연애라도 하면 더더욱 그가 좋아지겠지.
그러다 만약 시나가 오면.
유스타프는 그녀가 좋아진다고 해도 그걸 란 앞에서 티 내거나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무서웠다.
‘그리고 그걸 신경 쓰게 될 나도 싫어.’
란은 문득 상자를 떠올렸다.
하늘 저택 자신의 방, 서랍 깊숙이 아직도 존재하는 상자.
‘시나가 오면 떠날까?’
란은 그런 생각을 한 후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도망칠 곳’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그녀에게 퍽 위안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한 곳, 도망쳐서 쉴 수 있는 곳을 원하는 거다.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유스타프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녹색 아치에 있는 제 방을 찾아갔다. 롤프에게 가신으로서 새 방을 배치해 달라고 말했는데, 그는 공녀일 때 사용했던 방을 그대로 쓰시라고 권했다.
란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가 ‘쓰시던 물건도 그대로 있으니, 그게 편합니다.’라고 재차 말해서 결국 항복했다.
방은 이미 시녀들이 부산을 떨어서 환기를 시키고 시트로 새로 간 후였다.
기다리고 있던 루미에와 디모디아, 그리고 카라가 입을 모아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응, 갔다 왔어.”
란은 그렇게 말하고 빙글 한 바퀴 돌아 일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수도는 진짜 덥다.”
그녀의 말에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 아래 서 있으면 땀이 날 정도예요. 올해는 유난히 덥네요.”
“그러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고 그러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비스듬히 팔걸이에 기댄 후 소파 위로 양반다리를 했다. 그 자세를 처음에 시녀들은 무척 신기해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디모디아가 물었다.
“어때요? 가주님이 좋아하시던가요?”
“응.”
란은 그렇게 대답하며 저도 모르게 뺨을 붉게 물들였고, 그걸 디모디아는 흐뭇하게 보았다. 카라 역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살금살금 온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의 표정이 좋지 않아 란이 그에게 손짓하자 루미에는 얼른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얌전히 눈을 내리까는 자세에 란은 저도 모르게 웃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작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사락사락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루미에가 말했다. 이 손이 있다면, 괜찮다.
란이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도에 와서 신경 쓰이는 거 아냐?”
신경? 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루미에를 보고 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니라면 됐어.”
그제야 루미에는 그녀가 빈민굴의 조직 때문에 자신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완전히 잊고 있었군.’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이런 생활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바닥을 굴렀던 것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신경 쓰이는 건 황제지요.”
그녀의 무릎에 기대며 루미에가 말해서 란은 쓰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저번 습격에 대해서 말할 뻔했다. 그 뒤로 블레인에게도 물어봤지만, 블레인도 그 후로 녹영에게 보고받은 게 없다고 알려주었다.
순순히 알려 주어 루미에는 약간 놀랐지만, 곧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렇다면 유스타프는 보고를 받았을까?’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카락 좀 잘라야겠다.”
그때 제 머리를 만지던 란이 말해서 루미에는 살며시 웃었다.
“잘라 주시나요?”
“안 돼, 안 돼. 내가 자르면 쥐가 파먹은 것처럼 되어 버릴걸.”
란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카라가 말했다.
“그럼 제가 잘라 드릴까요?”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카라가 머리카락 잘 잘라. 내 머리도 잘라 줬는걸.”
예전에 카라가 상한 부분을 살살 쳐내고,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잘라 준 적이 있었다.
그 솜씨를 생각하면 루미에의 머리를 다듬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거다. 루미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라 님에게 부탁하지요.”
“어차피 마음먹은 거 지금 자를까요?”
카라가 그렇게 말하자 루미에가 “좋습니다.” 하고 대답해, 도구를 챙겨 두 사람은 함께 베란다로 나갔다.
둘이 나가자마자 잽싸게 디모디아가 말했다.
“너무 가까우신 거 아닌가요.”
“응?”
“루미에 경과 백작님 말이에요. 두 사람 너무 가까워요. 보통 남녀 사이의 가까움을 훌쩍 뛰어넘었다고요.”
“나도 알아.”
“아신다고요? 알면서도 그러시는 거예요?”
“루미에는 심적으로 불안한 부분이 있으니까, 안정될 때까지 나에게 좀 기대는 것뿐이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게 벌써 1년 아닌가요. 언제까지 응석을 받아 주실 거예요?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요.”
그 말에 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루미에를 어딘가로 보내 버릴 수는 없었다.
‘시나가 오면―’
오면 어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시나와 루미에는 이어지지 않는다. 시나와 유스타프가 이어지는 이야기지. 그런데 굳이 루미에를 여기 묶어 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란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접니다.”
“아, 들어와.”
유스타프의 목소리에 란은 반색하고 말했다.
들어온 유스타프를 향해 란은 질문을 퍼부었다.
“사신이 뭐라고 그래? 알현하러 오래? 아니면 승인해 주겠대? 그것도 아니면 막 뭐라고 그랬어?”
“입궁하라고 하더군요.”
“흐음.”
“당장이요.”
“진짜?”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팍 얼굴을 찌푸렸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 자식이네. 원래부터도 그런 놈이기는 했지만.”
“일단 가 봐야지요.”
“괜찮을까?”
더럭 겁이 나서 란이 중얼거렸다. 상대가 상식인이라면 모를까, 비상식인인 만큼 어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예를 들어 무력으로 겁박한다든가…….
“괜찮을 겁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깊게 숨을 들이켠 후에 말했다.
“청염을 맡기고 싶지만―”
“절대 안 돼.”
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제 키가 유스타프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아서, 그녀는 그가 얼마나 컸는지 실감했다.
“청염은 최후의 보루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나에게 맡기고 가다니 말도 안 돼.”
정령이 있다면, 어지간한 무력시위는 타개하고 나올 수 있다.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해서, 란을 위해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이런.’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지금 라치아의 후계자는 자신뿐이고, 자신이 죽고 나면 끝이다. 정말로 린드버그 남작에게―숙부에게 라치아가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언제나 제 목숨이 최우선.
그랬는데, 자신의 목숨보다 이제 란의 목숨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유스타프가 양손을 뻗다가 멈추고 슬쩍 물었다.
“끌어안아도 됩니까?”
그 말에 란이 먼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묻지 않고 안아도 괜찮아.”
유스타프는 그녀를 마주 안았다.
루미에는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카라가 마지막 가위질을 한 후에 말했다.
“다 잘랐어요.”
“감사합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루미에가 그녀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카라는 그제야 방 안을 보고 “어머?” 하고 웃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지 않아요?”
카라의 말에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고, 루미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잘 어울리십니다.”
란과 자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란의 마음이 유스타프를 향해 기울어지는 건, 루미에에게 너무나도 투명하게 보였다.
‘만약.’
만약 내가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
루미에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약하고 다정하니까, 유스타프는 모든 걸 가졌지만, 난 당신 하나뿐이라고 말하면 곤란한 얼굴로 알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둘이 멀리멀리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적어도 유스타프의 고백은 거절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루미에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다.
문소리에 란이 얼른 유스타프를 놓아주려는데 유스타프가 한 번 더 그녀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루미에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 거야.
그런 얼굴로. 표정으로.
그래서 루미에의 기분은 썩 나아졌다. 유스타프가 자신을 아예 견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기분 나빴으리라.
“유스? 숨 막혀.”
제 품 안에서 란이 버둥거려 그제야 유스타프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란이 휴 하고서 돌아보고는 웃었다.
“루미에, 머리카락 깨끗하게 잘렸네.”
“보기 좋은가요?”
“응.”
“주인님이 보기 좋다면, 저도 좋아요.”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란은 “정말이지.”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루미에도 나에게서 심리적인 독립을 해야 할 텐데.’
릴리가 돌아오면 잘되지 않으려나.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 하고 말했다.
“유스, 루미에 데려가라.”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싫습니다.”
“싫어요.”
그리고 멀뚱히 서로 바라보았다가 당황한 란을 보았다.
“아니, 나는…… 루미에도 강하니까. 호위로 가면 좀 낫지 않을까 하고…… 물론 로스 경도 강한 걸 알지만―”
임기응변에는 루미에가 좀 더 강하지 않을까, 하는 게 란의 생각이었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루미에는 누님 곁에 있는 편이 낫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밖을 한 번 보았다가 말했다.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계셔 주세요.”
란은 어깨를 으쓱했고 유스타프는 그녀에게서 “알겠어.” 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바라보았다.
가는 유스타프를 배웅하고 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까?’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굴러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
루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황궁 안은 더웠다.
예전이라면 부채로 이 더위를 식혔겠지만, 냉풍기를 맛본 사람에게 부채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얼음수정을 주지 않겠다고!’
씩씩거리며 루스는 그럼 강제로 골든로즈 상회에서 수정을 강탈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근위대장은 난색을 표했다. 그런 약탈은 할 수 없단 거다.
아니, 황제의 명령인데 왜 안 된단 말인가?
이 제국의 모든 건 다 내 것 아닌가?
시종관과 올리비아를 통해 얼음수정이 떨어져 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랴 한 귀로 넘겼다. 그런데 정말로 얼음수정이 다 떨어져서 초로 불을 켜고, 부채로 바람을 부치고, 심지어 마차를 끄는 말에 위풍당당한 무지개 날개도 펼치지 못하게 되었다.
‘쓴맛을 보여 주마.’
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올리비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화급히 대알현실로 향하다가 반대편 복도에서 자신과 같이 당황한 얼굴로 오고 있는 라벨을 발견했다.
라벨은 형수와 마주쳐 정중히 인사했고, 올리비아가 물었다.
“소식은 들었나요?”
“폐하께서 라치아 공작을 부르셨다는 일 말입니까?”
“그래요.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올리비아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지요. 저하께서는 잠시 후에 상황을 보고 들어와 주십시오.”
라벨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알현실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황제의 복장을 하고 평소에는 쓰지 않는 화려한 대관식용 관까지 꺼내서 쓴 루스가 서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올리비아는 그 모습이 어릿광대 같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인사한 후에 물었다.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뭘?”
“라치아 공작 말입니다.”
그 말에 루스가 이를 갈았다.
“공작은 무슨 공작! 내 그 작위를 몰수하고 반역죄로 가둘 것이야! 그리고 라치아령은 황실이 다스리겠다.”
그 말에 올리비아는 뒤통수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라치아령에는 빙벽이 있습니다. 빙벽은 라치아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고 청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들이 존재합니다.”
“그 청염도 뺏으면 되지.”
“라치아의 가주가 아니면, 청염은 모든 걸 태워 버립니다.”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어!”
루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말했다.
“가서 궁정 마법사를 불러와라. 그 청염이 그렇게 대단한지 직접 물어봐야겠으니까.”
올리비아는 더더욱 초조해졌다.
정말로 라치아와 척질 생각이란 말인가?
역대 황제 중에 그런 멍청하다 못해 뇌가 해파리인 것 같은 생각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멍청한 행동에 화가 나기보다는 이제 어이가 없었다.
“폐하, 그럼 라치아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루스는 움찔했다.
사실 그는 유스타프가 무서웠다.
결투에서 그렇게 당한 이후로 분노도 있었지만, 그 시퍼런 눈이 생각나면 섬뜩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권위로 눌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말문이 막힌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폐하, 그런 공작 따위에게 무슨 신경을 쓰십니까? 라치아는 어차피 변방, 제국의 위광이 미치지 못하는 촌구석이죠. 얼음수정으로 돈 좀 벌었다고 해봐야 졸부나 다름없습니다.”
올리비아가 사근사근하게 하는 말에 루스는 코웃음을 쳤다.
“너 따위가 뭘 알아? 다들 라치아, 라치아 하는 걸 너만 모르지.”
“그래 봐야 제국 황제 폐하 앞에 서면 모두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올리비아는 애써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는 말을 지껄였다. 지금 루스가 죽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아직, 아직은.’
적어도 자신이 궁정을 장악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때 부름을 받은 궁정 마법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긴 지팡이를 짚은 궁정 마법사는 새하얀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고 있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법사’의 표준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정중하지만 위엄 있게 궁정 마법사가 물었다. 루스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라치아의 청염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게 사실인가? 내가 그걸 착용할 방법은 없는 건가?”
상상치도 못한 질문에 순간 마법사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라치아와 황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머리를 굴렸다.
라치아와 마법사 협회는 서로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이다.
제국의 황실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협회는 절대로 그 싸움에 참전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빙벽 근처에는 다가갈 수도 없는 것을.’
게다가 수틀리면 그 잔혹한 라치아의 새 가주가 마법사들이 폐인이 되게 습격하고 다닐 수도 있잖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궁정 마법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어리석은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정령은 인간의 법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생물입니다. 마법으로는 정령과 싸울 수 없지요. 태풍을 향해서 칼을 휘두르는 자는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마법사에게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궁정 마법사는 제국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직위 명에 ‘궁정’이라는 말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황실이 협회에 부탁해서 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즉, 언제든지 떠나도 상관없는 사람인 거다.
게다가 마법사들과 척지는 건 루스가 생각해도 안 될 말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좀 더 황실 살림을 잘 꾸렸다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아!”
그래서 불똥이 황후인 올리비아에게 튀었다. 엉뚱한 분풀이에 마법사는 당황했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능한 것!”
그리고 그가 마법사에게 말했다.
“석녀를 고치는 마법이 있으면, 내 아내에게 사용해 주면 좋겠군.”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폐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마법사가 저도 모르게 말하자 올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아수라장 사이로 시종이 들어와 말했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님께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병사들을 불러들여라.”
루스는 재빨리 관을 고쳐 쓰며 말했고, 올리비아는 뒤로 물러났다. 루스의 말에 시종은 뒷문으로 나갔고, 곧 황실근위대 병사들이 줄줄이 들어와서 알현실의 붉은 카펫 양옆에 나란히 도열했다.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 있는, 평소에는 쓰지 않고 행사 때에나 쓰는 대알현실을 일부러 고른 것 역시 루스의 의향이었다.
루스가 옥좌에 앉으며 말했다.
“들라 해라.”
그 말에 알현실 끝에 있는 문이 열리고, 유스타프가 들어왔다.
짙은 남색 망토를 가볍게 나부끼며, 그는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병사들 사이를 가볍게 지났다.
적당히 걸어와서 유스타프는 걸음을 멈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무릎 꿇는 대신 그는 가볍게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이어 그가 허리를 똑바로 펴며 말했다.
“이리 절 부르시니,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 루스는 그걸 눌러 참으며 팔걸이를 꽉 쥐었다. 위엄을 찾으려 애쓰며 그가 말했다.
“그대는 제국에 충성하는가?”
“라치아는 정복 황제이신 라이언 님께 공작 위를 받았고, 그 후 300년간 우정이 변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 폐하께서도 그러십니까?”
“우정이라고!”
루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놈을 붙잡아라!”
그러자 병사들이 칼을 뽑았고, 놀란 마법사가 루스를 만류했다.
“폐하!!”
그때 푸른 불꽃이 유스타프를 휘감았고, 병사들은 작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날름거리는 불꽃은 그들이 한 치라도 다가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카펫이나 대리석 바닥에는 그을린 자국조차 생기지 않았다.
“청염…….”
마법사는 신음을 흘렸다.
유스타프는 남은 걸음을 걸어와, 옥좌 밑 계단에 한 칸 올라섰다. 루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 무례한―”
“폐하.”
유스타프의 어조는 흥분되어 있지도 않았고, 차분했다. 올리비아의 보라색 눈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는 폐하의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것을 건드리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평행선이 될 수 있겠지요.”
가까워지지도 않겠지만, 멀어지지도 않는.
“제국의 것은 모두 황제의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루스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유스타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을 깨는 그 미소는 지독히 차가웠다.
“그럼 나와 싸울 텐가? 제국의 모든 걸 걸고?”
푸른 불꽃이 그의 발치에 원을 그리며 춤추듯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루스의 얼굴이 굳었다.
마법사도, 올리비아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루스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은 없으실 겁니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벌컥 문을 열며 라벨이 소리쳤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라벨은 빠르게 걸어오며 태연하게 루스를 보고 웃어 보였다.
“형님,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라치아 공작도 무슨 농담을 그렇게 받아들이나? 안 그렇습니까?”
루스는 순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놈이 무슨 말을 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올리비아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정말로 폐하께서 라치아와 싸우려고 그러는 줄 알고 공작이 놀랐잖습니까?”
유스타프가 비소를 지으며 계단에서 도로 한 걸음 내려가며 말했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폐하.”
라벨이 말했다.
“자네에게 작위를 승인하려고 부른 거였다네. 물론 로미아 백작의 작위 역시 함께 승인하겠네.”
“감사합니다, 저하.”
인사하고 유스타프가 루스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유스타프는 알현실을 나섰다. 자신이 나가고 나면 라벨이 곤욕을 치르겠지만,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할 때 미리.’
라벨과 자신이 손을 잡았다면, 지금쯤 모든 것이 훨씬 더 수월했을 터였다.
생각하다가 유스타프는 올리비아에게로 시점을 돌렸다.
‘그 멍청이가 독살이라는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 같지는 않아.’
게다가 올리비아는 이미 피임약을 구해서 먹고 있는 전적이 있다. 그런 약을 황궁에서 몰래 구입해서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그런 쪽과 연관이 있다는 걸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독약도 다룰 수 있겠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청염을 끼고 가라고 했던 란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강하게 나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설마 자신을 정말로 붙잡을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면서 라치아와의 전면전은 할 배짱도 없는 놈이다. 차라리 라치아와 전면전을 할 각오를 했다면 이렇게 어설픈 일도 없었겠지.
전 제국과 라치아와의 싸움을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면서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다.
‘저놈도 얼마 남지 않았군.’
올리비아를 떠올리며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
녹영의 첫 번째는 두 번째를 바라보았다.
“암살자 길드라고?”
“네, 수도에 존재하는 암살자 길드였어요. 그런 짓을 하는 나부랭이 뒷골목 놈들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네요.”
“의뢰인은 알아냈나?”
“이제 알아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의 말에 첫 번째는 한숨을 내쉬었다.
“느려.”
“그러네요. 전부 다 죽어 버려서 단서를 찾기가 힘들었지요.”
“살려 둔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첫 번째의 말에 두 번째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빠르게 자살했어요. 불쌍해라.”
두 번째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남장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란을 만나러 갔었던 녹영이 바로 그녀였다. 첫 번째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가주님이 란 님의 신변에 대해서는 민감하시니까.”
“그래서 배후를 알아낼 때까지는 보고를 미뤘던 게 패착이지요. 이렇게 오래 미루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깔깔 두 번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첫 번째는 “네가 혼나는 게 아니라고.” 하고 중얼거렸다.
“디모디아 말고도 다른 호위를 더 붙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기존 시녀 대신에?”
“란 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두 번째의 말에 첫 번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보고하러 다녀오겠어.”
“무운을.”
두 번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첫 번째는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녹영의 역사는 길고, 자부심은 남다르다.
하지만 이런 녹영이라고 해도 자금난을 견딜 수는 없다. 산지사방에서 녹영의 첩자들이 일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돈이 들어간다. 제국과의 300년 평화 동안 라치아 가문은 녹영에 주는 예산을 착실하게 줄여 왔고, 마지막 자금난이 큰 타격을 가했다.
지금에 와서야 대대적으로 금화를 퍼부어서 녹영을 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뿌리가 있으니 새로 이런 집단을 세우는 것보다는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미흡한 건 미흡한 거다.
그렇다 해도 최초 보고가 늦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 첫 번째는 제 선택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
란은 생각보다 유스타프가 빨리 돌아와 기뻐하며 마중을 나갔다.
“유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달려 나가던 란은 주춤했다.
“유스? 괜찮아?”
유스타프는 주춤한 란을 보고 미소 지으며 슬쩍 팔을 벌렸고 란은 마저 달려가 그를 꽉 안았다.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황제가 뭐라고 했어? 아니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녹색 아치로 돌아오는 길에, 마차에 올라탄 녹영에게서 들은 보고는 유스타프를 분노하게 하기 충분한 얘기였다.
란에 대한 납치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늦게 전해듣다니. 어째서 그 이야기를 진작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아직도 의뢰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니.
녹영에게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고,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했다.
유스타프가 양손으로 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란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황제가 역시 작위 승인을 해 주지 않았어?”
“아뇨. 승인받았습니다. 란의 것도요.”
“그럼 뭐가 문제야?”
유스타프는 그녀를 노리던 암살자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말하기로 했다.
그는 그녀를 짝으로 택했고, 그렇다면 정직해야 하니까.
란은 아직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얼른 이야기하라고 추궁하려던 란은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헛기침을 했다.
“음, 여기서 이러는 게 아닌데. 일단 옷 갈아입고 쉰 다음에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물러났다.
란은 서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산뜻한 연노란색 실내복을 입고,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중이라,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온통 장엄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란은 깊게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비가 굵어질까요?”
질문에 란은 고개를 돌렸다. 유스타프가 문가에 서 있는 걸 보고 그녀는 웃었다.
“왜 왔다고 말 안 하고?”
“생각에 잠기신 것 같아서.”
“응, 생각을 좀 했지.”
란은 그러게 말하고 창가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그냥 부슬비고, 굵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유스타프가 소파를 권해 란은 자리에 앉았고, 그는 그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어?”
유스타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그와 루스와의 대화, 라벨이 끼어든 이야기, 결국 그런 식으로 승인을 받아 낸 것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은 시시각각 바뀌었고, 마지막 말까지 마치자 란이 외쳤다.
“미친 거 아냐?!”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하고 물었다.
“어느 쪽이 말입니까?”
“당연히 루스 쪽이지!”
란은 크게 대답하고 팔짱을 꼈다.
“라치아랑 전면전이라도 하려고? 아니, 게다가 병사들에게 널 잡으라고 했단 말야? 말도 안 돼.”
이어 그녀는 다시 이마를 양손으로 눌렀다.
“아, 게다가 라벨이 그렇게 말리면― 나중에 저하께 불똥이 튀게 될 텐데. 그리고 황후마마랑.”
말하고 란은 다시 팔짱을 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만 있어도 즐겁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알 바는 아니죠.”
“그야 그렇지만.”
란이 미간을 좁혔다.
“난 도무지 황후의 생각을 모르겠어.”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단순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뭐라고 생각하는데?”
갸웃하며 란이 물었다.
“제 생각에 황제를 죽인 건 올리비아 같습니다.”
그 말에 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난 오히려 황태자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술술 무서운 소리를 늘어놓는 란을 바라보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황제를 죽여서 얻는 이득은 별로 없잖아? 그에 비하면 황태자는 쓰레기고.”
“하지만 황후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궁에서 착실하게 지지 기반을 쌓아 가고 있더군요.”
“지지 기반을?”
“네. 여차해서 황제가 죽으면 충분히 국정을 이끌어 나가며 섭정할 수 있는 황후로요.”
“아.”
란은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금 말했다.
“하지만 아이가 없잖아?”
자손이 없다면, 황위는 라벨에게 넘어갈 확률이 컸다.
“저도 그 점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란,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습니다.”
“뭔데? 황제가 다른 억지라도 썼어?”
“란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순간, 란은 벙쪘다. 멍하니 유스타프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물었다.
“언제?”
“라치아에서 순회를 다니셨을 때, 별장에서 묵으신 마지막 날에요.”
“전혀 몰랐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왜?!”
“저도 사실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정말이야?”
“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유스타프가 그렇다면.”
란은 그렇게 말하고 물었다.
“그럼 누가 배후인지도 알아?”
“그건 아직 조사 중입니다.”
“그래…….”
란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납치할 만큼 원한에 차 있는 사람은…….”
“캐머론 후작과 황제.”
유스타프가 손가락 두 개를 꼽았다.
“제 생각에는 이 정도군요.”
“린드버그 남작은?”
“요즘 도박에 푹 빠졌답니다.”
“그래.”
일단 뭘 하는지 알고 있다면, 유스타프의 시선 안에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가 배후는 아니겠지.
“우리 은근히 적이 있구나.”
중얼거린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란은 얼굴이 붉어져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유스타프는 그녀의 뺨에도 입 맞췄고, 여전히 란은 뭐라고 하지 않은 채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란.”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제가 착각해 버립니다.”
그 말에 란은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유스타프가 다가오는 게 싫지 않아.
나는―
“……데…….”
그녀가 아주 작게 말해서 유스타프는 갸웃하고 말했다.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차, 착각 아닌데…….”
간신히 내뱉고 나자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란은 제 손끝을 쏘아보며, 그가 뭔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더 확실하게 말해야 하나? 내가 뭐 잘못 이야기했나?’
그녀의 머릿속이 휙휙 돌아가는데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유스타프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뒷목과 머리를 감쌌고 란은 눈을 꽉 감았다.
생각보다 한참 뒤에, 살며시 입술이 와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닿았다가 떨어졌고, 그것만으로도 란은 목덜미를 타고 저릿저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터질 것 같아.
그녀가 파르르 숨을 내쉬며 눈을 뜨고 슬쩍 유스타프를 보았다가 고개를 떨궜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뭔가 말하기 전에 란이 손을 들었다.
“내, 내가 먼저 말해도 돼?”
“물론이지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해서 란은 슬쩍 유스타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음, 일단 결혼은 하지 않을 거야.”
순간, 유스타프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고 란이 계속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하, 하지만 연애하는 건…… 괜찮아…….”
“연애요.”
“응.”
“약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입니까?”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시나가 오기까지 잠시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다음에, 시나가 오면 그 상자와 함께 멀리 가 버리면 되지.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겁하다고 비난하거나,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상처받는 건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의외로 산뜻하게 유스타프가 대답했다. 란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네. 그럼 연애하지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당기고 물었다.
“그럼 한 번 더 해도 됩니까?”
“묻지 않고 하는 거야.”
진부한 대사지만, 그 대사 말고는 생각나지 않아 내뱉자 유스타프는 다시 키스해 왔다.
아까보다 더 길고, 더 달콤한 키스였다. 버드키스를 끝내고 유스타프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란은 그를 마주 안았다.
유스타프에게 폭 안겨서 그의 심장 소리를 듣는 건, 상상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유스, 심장 빠르게 뛴다.’
유스도 나처럼 두근거리는구나, 하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간질간질 달짝지근한 기분이 흘러넘쳐서 그녀는 그를 꽉 안고 말했다.
“유스.”
“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유스타프는 이게 키스 전 대화의 연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떻게 말입니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묻고 그녀의 머리에 키스한 후에 말했다.
“계속 이렇게 안고 다니면 좋을 텐데요. 제 품 안에서 떼어 놓지 않고 말입니다.”
그 말에 란이 웃었다.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웃어서, 그의 몸이 울리는 감각에도 유스타프는 떨리는 걸 느꼈다.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거칠게 밀어붙이고 싶다는 생각과 유리 세공품처럼 아주아주 소중하게 다루고 싶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섞여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아직, 아냐.’
좀 더, 좀 더.
그녀가 완벽하게 제 것이 될 때까지는 밀지 않으리라.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매끄러운 밀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란이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생각해 보니 캐머론 후작은 날 납치하지 않을 것 같아.”
“아. 확실히.”
“물론 날 납치해서 고문해 죽이겠다, 하는 복수심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단순하게 날 죽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 그편이 훨씬 더 편하고.”
“그리고 캐머론 후작답지요.”
바로 영지전을 벌인 그 멍청한 후작다운 짓이었다.
“그러면 황제의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외에는 잘 모르겠는걸. 물론 녹영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태워 버릴 걸 그랬나 봅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고, 그 감각에 란은 부르르 떨며 “힉.”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목덜미가 이렇게나 민감한 곳이던가?
유스타프가 몸을 떼자 란은 목과 어깨 사이 오목한 곳을 문질렀다. 아직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태우다니, 황제 살해 같은 걸 했다가는 맘 편하게 라치아에 머물지 못하잖아.”
“그건 그러네요.”
유스타프가 순순히 대답해 란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말했다.
“게다가 이제부터가 걱정이야. 어쨌든 정면으로 유스타프를 굴복시키려던 게 실패했으니까, 이제 뒤에서 뭔가 할지도 몰라.”
“이미 한 거 아닙니까.”
란을 건드리려고 했으니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란의 얼굴 윤곽을 훑었다.
“유스타프.”
“네.”
“전에 스킨십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뭐죠?”
“란에게 하는 건 좋아하지요.”
당당한 말에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스타프가 덧붙였다.
“란이 해 주는 것도 좋아합니다.”
란은 입을 떡 벌렸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에 대며 말했다.
“싫다면 싫다고 말하세요.”
“시, 싫지 않아.”
란이 작게 말하자 그는 웃고서 손바닥에 입 맞췄다.
“우리는 아주 잘 맞을 것 같군요.”
✥✥✥
란은 완전히 흐늘흐늘해져서 제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앞까지 유스타프가 데려다 주고, 작별의 키스도 잊지 않아서 어딘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발과 땅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 같은, 이렇게나 몸이 가벼운 기분이라니.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란은 제 방으로 들어왔다.
디모디아와 루미에가 돌아보며 인사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란은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여운에 젖어 있다가 디모디아의 물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루미에는 묻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게―”
란이 웃었다.
“유스랑 사귀기로 했어.”
그 말에 디모디아는 들고 있던 수건을 던져 버리고 달려왔다. 소리도 없이 그녀는 열심히 란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고,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귀기로만 한 거야. 결혼이나 약혼은 아직 아니야.”
“그거야 시간문제죠.”
디모디아의 말에 란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침실을 정리하고 나온 카라가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묻자 디모디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가주님과 교제하기로 하셨답니다.”
“어머나?”
카라의 뺨이 붉어졌다.
“축하드려요.”
그녀의 인사에 디모디아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 대사는 가주님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디모디아도, 참.”
카라가 그렇게 말하며 후후 웃었다. 디모디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요?”
“나중에, 나중에.”
란이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어 그녀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디아랑 루미에에게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디모디아를 남기는데도 카라는 섭섭한 기색 없이, 허리를 숙인 후 조용히 다른 방으로 물러갔다.
란이 두 사람을 제 침실로 불러들이고 말했다.
“날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서?”
디모디아는 눈을 크게 떴고, 루미에도 움찔했다.
“유스타프에게 들었어.”
“주인님, 저는―”
당황한 표정으로 루미에가 화급하게 변명을 시도해 란이 손을 저었다.
“아냐,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둘 다 고생했고, 다음에는 나에게 숨기지 말아 줬으면 한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래야 나도 조심하니까.”
“알겠습니다.”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루미에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나도 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도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할 테니까. 어쩌면 시녀가 바뀔지도 모르겠어. 소다랑 카라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그러네요.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디모디아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스는 과보호라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뺨에는 옅은 홍조가 감돈다.
“좋으시면서.”
디모디아가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며 말했고, 란은 새침하게 “꼭 그런 것도 아니거든?” 하고 대답했다.
“하여간 이야기하려는 건 이게 다였어.”
싱긋 웃으며 란이 마무리하자 디모디아가 치맛자락을 우아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루미에가 그때 작게 란을 불렀다. 란이 그를 바라보자 루미에가 말했다.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녀가 눈짓하자 디모디아가 휙 돌아서서 루미에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침실을 나갔다.
란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뇨. 다름이 아니라.”
루미에는 가만히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만일, 만약에―”
루미에는 말을 쥐어짰다.
제가 당신을 연모하고 있다면―
말은 혀끝에 걸린 듯이 나오지 않았다. 루미에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뭔데. 부담 가지지 말고 이야기해.”
란이 눈을 크게 뜨며 루미에를 독려했다. 루미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분이랑 사귀시다니, 정말로 라치아에 남겠구나 해서 말이죠.”
“아, 그거.”
란은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 틈을 루미에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뭔가 있으신가요?”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수상쩍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로 그게 전부야? 만약에 뭐? 다른 거 있었던 거 아냐?”
“만약에― 차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
란이 눈을 크게 떴다. 루미에가 화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냥, 가상으로요. 주인님이 그러신다는 게 아니라요.”
루미에의 말에 란은 “그러네.” 하고 턱을 문질렀다.
“울겠지, 일단.”
“운다고요.”
“응, 눈알이 빠질 만큼 울고, 화내고― 그리고 사방에 징징거리고. 또 울고. 욕하고.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과연.”
루미에는 웃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차이다니, 루미에가 누군가에게 차이기라도 한 걸까?
아니, 시나와 안 되는 것도 서러운데 벌써 차이다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루미에는 가만히 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에메랄드 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루미에가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차인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란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가 제 팔을 벌렸다.
“그럼 내 품에서 울어도 괜찮아!”
그녀의 말에 루미에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가 몸을 푹 숙여서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웃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정말로, 주인님은 이상하신 분입니다.”
“맞아. 내가 생각해도 그래.”
란이 중얼거린 말에 루미에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잦아들어 침묵이 되었고, 란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한참 후에 루미에가 몸을 일으켰지만, 그의 눈에 물기는 없었다.
“위로 감사해요. 역시 주인님뿐이라니까요.”
“괜찮아.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란이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루미에가 중얼거리자 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루미에는 꼭! 꼭! 좋은 사람 만날 거야.”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루미에는 희미하게 웃었다.
✥✥✥
“연애!”
엘리제의 호박색 눈이 불이 들어온 것처럼 반짝거렸다.
“세상에, 정말? 정말로?”
“응, 정말로.”
란은 쑥스럽지만, 이제 익숙해졌다는 듯이 당당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엘리제가 킥킥 웃고 말했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뭐가?”
“라치아 공작님이 란을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진짜? 언제부터?!”
놀라 란이 묻자 엘리제는 “그때 같이 소풍 나갔을 때부터.”라고 대답했고, 란은 넋이 빠져 답했다.
“전혀 몰랐어.”
전혀 몰랐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란의 반응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이상하게 란은 자신이 남의 연애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미인인데.”
칭찬에 란은 웃었다.
“그건 고마운데. 그러네, 확실히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유스타프가 그렇게 직구를 날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몰랐을 거다.
‘하긴 생각해 보면 유스타프가 지나치게 달라붙기는 했어.’
란은 그런 생각을 한 후에 살짝 눈을 찡그렸다.
‘아니, 지금이랑 비교하면 그래도 그건 자제한 거였어.’
연인이 되기로 한 후부터 유스타프의 스킨십은 부쩍 늘었다. 란은 냉풍기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찰싹 붙어 있어도 덥지 않으니 말이다.
키득키득 웃고 엘리제가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여는 무도회에 올 거야? 란도 초대장은 받았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받았어.”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사교계의 뚜쟁이로 유명했다. 그녀의 파티에서는 게임이 준비되는데 대부분 쌍쌍 짝을 이루는 게임들이었고, 그래서 알게 모르게 커플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 커플들에게도 인기가 좋아서, 그녀의 무도회는 사교 시즌에 초대장 구하기가 빠듯할 정도였다.
“나는 카티와 함께 가겠고, 란은 그럼 공작님과 함께?”
란이 “응.” 하고 작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웃었다.
“기대된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다.
그리고 유스타프도 처음이겠지.
두 사람이 처음을 같이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설렜다.
첫 번째는 뭐든 특별하니 말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연애만 한다는 거야? 약혼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아무리 시대가 그래도, 단순 연애라고 하면 뒷소문도 엄청 날 텐데.”
엘리제의 말에 란은 “그렇지―” 하고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말하기 싫으면 묻지는 않겠지만, 란 네가 공작님을 좋아하고 공작님도 널 좋아하는데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말하고 엘리제가 바싹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혹시 나쁜 소문 때문에 그래? 막, ‘공작님에게 내 나쁜 소문이 묻을까 봐. 흑흑.’ 이런 거야?”
중간에 ‘흑흑’을 할 때 엘리제가 양손을 꼭 붙잡고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그게―”
란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유스타프의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
말하고 나니 너무나도 터무니가 없어서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엘리제에게도 마찬가지로 느껴져서, 그녀는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물었다.
“그럴 기미가 보여?”
“응?”
“아니, 뭔가 란의 말을 들으면 공작님이 란에게 마음 주는 건 잠깐이고 곧 마음이 변할 바람둥이처럼 느껴지거든. 그래서 란이 그런 촉을 어디서 느꼈나 하고.”
“아니, 유스타프는…… 그럴 기미가 보이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물론 행복하면 불안하다고도 하지만― 란은 뭐랄까, 좀 다른데. 음……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그런 거?”
엘리제의 말이 핵심을 푹 뚫고 들어와서 란은 눈을 깜박였다.
“그런가……?”
“응, 그래.”
엘리제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 공작님에게도 큰 실례 아닌가.”
정론이라 란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건 그러네.”
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제는 피식 웃었다.
“물론 란이 나보다 더 공작님과 가까우니까 뭐 다른 느끼는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냐, 큰 도움이 됐어.”
란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싱긋 엘리제가 웃었다. 그녀가 양 손가락을 깍지 끼며 말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무도회 기대된다. 작년에도 재미있었거든.”
“가봤어?”
“그럼. 올해는 어떤 걸 하시려나?”
둘은 기대감으로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
올리비아는 드반이 가져온 약을 한쪽으로 밀었다.
“뭘 이런 걸 가져오고 그러세요?”
그녀의 말에 드반이 자리에 앉아서 작게 속삭였다.
“내가 특별히 용하다는 곳 소문을 듣고 지어 온 거다. 아이가 잘 들어서게 해 주는 약이야. 먹고 나서 아이가 안 생긴 부부가 없다고 하더구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올리비아의 말에 드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괜찮다는 거야, 내가 잘 알지. 하지만―”
드반은 살풋 미간을 모았다.
“소문이 아예 새지 않게 할 수는 없지. 폐하와 라치아 공작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어떤 게 사실이냐고 하시는 건가요?”
드반은 제 여동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올리비아 쪽이었다.
“공작이 전면전을 원하냐고 물은 거라면, 사실이에요.”
탕!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치고 드반은 이를 갈았다.
“그럴 수가 있나. 라치아 촌구석 놈들은 예의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루스가 잘못한 것 역시 사실이에요. 원래 라치아와 황가의 사이는, 그냥 그런 사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드반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너는 괜찮으냐? 그자가 너에게도 겁박한 거 아니고?”
“전 괜찮아요.”
올리비아가 살며시 웃었다. 그러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오라버니, 사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응, 말해보렴.”
“황제는 아직도 전 라치아 가주, 그러니까 로미아 백작을 놓지 못한 것 같아요.”
드반의 보라색 눈에 불꽃이 번쩍했다. 그는 황제가 그 여자 때문에 제 여동생에게 수치를 줬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게다가 전 아직 아이가 없잖아요? 혹시 저 대신―”
드반이 올리비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일은 결코 없다! 폐하께서 제정신이시라면 후계에게 정통성이 얼마나 중요할지 아실 텐데.”
‘그런 머리가 없답니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더욱 수심에 잠긴 얼굴을 했다.
“제가 그래서 만류했더니, 저에게 손을 올리셨습니다.”
“……뭐……?”
드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금이야 옥이야, 여동생이지만 친딸처럼 아끼며 키운 올리비아다.
“그가, 너에게 손을 올렸다고?”
목소리가 분노로 딱딱 끊어졌다. 그 반응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넘쳤다.
드반이 그녀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했다.
“설마 아이도 폐하께서 주시지 않는 거냐?”
올리비아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다시 주룩 뺨을 타고 넘쳤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드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이며 말했다.
“로미아 백작은 이미 라치아 공작의 비호 아래 있어. 폐하는 절대로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할 게다.”
그 말이 올리비아에게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저도 모르게 그녀가 말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드반은 올리비아가 걱정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라치아 공작은 황제의 압박에도 로미아 백작을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둘이 녹색 아치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렇다면 뻔하지. 하지만…….”
다른 사생아들과 여자들은 정리할 필요가 있을 성싶었다. 황제에게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경고를 해야 했다.
생각했던 것과 약간 다르게 일이 진행되어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드반이 싱긋 웃었다.
“넌 걱정할 필요 없어. 비아. 내가 다 알아서 하마. 넌 여전히 제국의 황후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 자리를 잃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그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올리비아는 눈물을 닦아 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당장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미로 공작가의 피가 흐르는 이상, 마찬가지인 거겠지.
‘저도 이 자리를 잃을 생각이, 가련한 꽃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드반이 두고 간 약을 바라보았다.
‘아이라.’
루스의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싫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뭉갠 상대의 아이를 가진다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슬슬 가질 때이긴 하지.’
올리비아의 손가락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들겼다.
‘오라버니는 분명히 루스와 관련된 여자들을 다 제거할 거야.’
미로 공작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말이다. 올리비아가 입술을 살짝 핥았다.
‘루스는 그것 때문에 또 분노하겠지만, 오라버니가 무서워서 나에게 손대지는 못할 테고. 흥, 란 로미아 따위가 라치아 공작을 차지한다니.’
그녀는 약병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