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폭풍 전의 고요함
Chapter 3. 폭풍 전의 고요함
“어? 오늘 같이 못 간다고?”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만 끝나면 바로 합류할 겁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올 거야?”
“네. 단지 좀 늦어질 것 같아서―”
“알았어.”
란이 싱긋 웃으며 답해서 유스타프가 란의 허리를 감고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가 제 입술을 핥고 말했다.
“왜 달콤하죠?”
당황한 란이 더듬더듬 말했다.
“좀 전에 입술에 꿀을 발라 놔서 그래. 그게― 입술을 촉촉하게 해 준다고…….”
“그렇습니까.”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입맞춤했다. 란이 숨을 삼켰다. 유스타프가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정말로 그런 것 같네요.”
“유스!”
유스타프가 제 입술을 가볍게 핥고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달콤한 것도.”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로, 정말이지―”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디모디아가 방으로 들어오며 눈을 찌푸렸다.
“단장하실 때 함부로 들어오시는 거 아닙니다.”
“그런 겁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그건 기대하지요. 그럼 무도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물러났다. 디모디아가 투덜거렸다.
“두 번째 화장 시간에 부르시는 거면 모를까,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지금 오시는 건 아니지요.”
“응. 한집에 사니까 아무래도 그런 점이 좀 무뎌지나 봐…….”
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디모디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서 좋은 점도 있지만요. 자, 그럼 마저 꾸미기로 해요.”
로미아 백작으로 첫 번째 사교 데뷔 아닙니까, 하고 디모디아가 씩 웃었고 란도 각오를 단단히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름 가운데 시작한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무도회는 화려하게 물이 올랐다.
차례로 유명인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다들 기대감을 가지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로미아 백작 드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회장 입구에 울리자 술렁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물결쳤다.
계단을 내려오며 란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호스티스인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웃으며 인사했다.
“백작님을 뵙게 되어 기쁘군요.”
오십 대 초반쯤 되는 나이에, 최첨단으로 유행하는 옷을 걸치고 있는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란을 바라보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 역시 정중히 인사했다.
“혼자 오셨나요?”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 보니 일행이 늦네요.”
그녀의 말에 리젤로티 백작이 싱긋 웃고 말했다.
“제 시간에 맞춰서 오시면 좋겠네요. 그럼 느긋하게 즐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란은 돌아서서 쓴웃음을 삼켰다.
“엄청난데, 냉대가.”
그녀의 말에 에스코트를 해 준 루미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방금 말인가요?”
“루미에가 누군지도 물어보지도 않았고, 보통 이렇게 오면 무도회장 내를 설명해 주는데 그러지도 않고. 뭐, 어쩔 수 없지.”
로미아 백작에 대한 소문이 대충 어떤지 란도 알고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
짝 하고 부채를 접는 소리가 났다. 란은 상대방을 보고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우슬라 공작 부인, 오랜만입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도 참 사람도 좋지.”
우슬라 공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란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기한 거에 흥미가 깊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말이지.”
그러고는 휭 란을 지나쳤다. 루미에의 얼굴이 굳었지만,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무시로 끝날 줄이야.’
이런저런 모욕을 잔뜩 줄 줄 알았는데.
“란.”
그때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와 란은 웃으며 돌아섰다.
“리제.”
“어쩜, 뭐예요? 왜 혼자서 온 거예요? 이쪽은―”
“아, 청염 기사단원인 루미에라고 해.”
“왜 기사분이 에스코트를 하고 온 거야? 공작님은 어쩌고?”
“일이 있다면서, 좀 늦는다고.”
엘리제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남편이 저쪽에서 어슬렁 걸어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라치아 공작님은 어쩌시고?”
“일이 있다고 해서요.”
“급한 일인가 보네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보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 혼자 오게 하지 않았을 거다.
란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때 수군거리던 여자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로미아 백작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란 역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그중의 한 명이 거만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로미아 영지는 상당히 부유한 모양이네요.”
영지도 없는 작위면서, 하는 비꼬는 말에 란은 빙긋 웃었다.
“영지가 없어도 이 정도 능력은 있답니다.”
란이 그렇게 말하는데 다른 영애가 “어머나?” 하더니 갑작스럽게 비틀거렸다.
‘설마?!’
란이 놀라 움찔하는데 몸이 뒤로 확 밀렸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은 루미에였고, 그의 제복 위에 포도주가 확 쏟아졌다.
영애는 당황한 듯 루미에를 보았고 그가 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 응.”
란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이런 구식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괴롭힘을 당할 줄이야?
“어머, 죄송합니다. 기사님. 제가 실수를 했네요.”
조금도 미안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어조로 영애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고 루미에는 생글 웃었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웃음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키릭스 후작이 묘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일단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군.”
“아, 맞아. 갈아입고 와.”
란의 말에 루미에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포도주에 물든 웃옷을 계속 입고 파티장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루미에가 나가자, 엘리제가 기가 막히단 얼굴로 말했다.
“영애는 대체 뭐에 발목이 걸리신 거예요?”
“제가 요즘 몸이 허해서. 좀 어지러웠어요.”
그렇게 말하자 서 있던 여자들 모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맞아요. 브린 남작 영애가 요즘 몸이 허하지요.”
“네, 아픈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죠, 솔루스 백작 영애?”
그러자 아까 거만하게 란을 위아래로 보았던 영애가 빙긋 웃었다.
“그럼요. 아픈 것을 탓할 수는 없지요. 안 그런가요, 백작님?”
“네, 그럴 수는 없지요.”
란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기 때문에 솔루스 백작 영애의 미간이 좁아졌다.
엘리제가 재빨리 말했다.
“잠시 제가 백작님을 독점해도 될까요?”
그 말에 솔루스 백작 영애가 피식 웃고 말했다.
“얼마든지 하세요, 후작 부인.”
솔루스 백작 영애는 그 후에 키릭스 후작을 바라보며 제 부채를 펼치고 말했다.
“제 댄스 카드가 아직 비어 있는데요, 후작 각하.”
“펜이 없어서.”
키릭스 후작이 거절의 말을 하자 백작 영애는 “그러시군요.” 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제 무리를 끌고 사라졌다.
란이 진지하게 물었다.
“예전에도 솔루스 백작 영애가 저랬었나?”
“저랬었어. 하지만 란은 몰랐을걸? 라치아 공작이어서, 영애들과는 이야기해 볼 일이 많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적대적인 거야?”
의아하기까지 하다.
“그야―”
엘리제가 설명하려는 걸 키릭스 후작이 가로챘다.
“바닥에 떨어진 줄 알았던 상대가 그렇지 않은 걸 알면 더 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며 그가 들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아내와 아내의 친구에게 차례로 건네주었다.
“게다가 그 고전적인 수법이라니.”
엘리제는 기가 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렇게까지 한다는 게 이상해요―”
란이 키릭스 후작의 말에 반박하자 엘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란이 그녀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또 뭐가 있는 거야?”
“황후마마.”
“아.”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마를 짚었다.
“그렇구나. 황후마마께서 나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다면 이건 당연하지.”
로열패밀리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고, 사교계의 중심은 당연히 황후다. 그건 어떻게 바꿀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황후가 자신을 저격하고 있다면, 귀족 여식들이 저러는 것도 당연했다.
“올리비아가 말이지.”
“생각해 봐.”
엘리제가 이어 말했다.
“너 때문에 폐하께서 결투까지 하셨잖아? 당연히 황후마마께 동정심이 쏠리지. 그런 데다가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고서는 더더욱.”
“그랬군.”
란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리제가 내 친구라서 다행이야.”
“나야 어차피 가난한 기사의 딸이 운 좋아 후작 부인이 된 케이스인걸.”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란이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란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적대해서 사교계가 힘들어진다면―
‘사교계를 양분할까.’
방법을 찾아내면 될 것도 같은데― 하다가 곧 관두기로 했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파티나 사교계의 교류를 즐기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귀찮으니.’
가볍게 막음 정도는 해 둘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엘리제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그런 얼굴을 해?”
“응?”
“사냥을 앞둔 고양이 같은 얼굴이야.”
“그게 무슨 얼굴이야?”
“아까 란 같은 얼굴.”
엘리제의 말에 란은 “어머나.” 하며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가 가볍게 웃었다.
“그냥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생각한 것뿐이었어.”
“어차피 다 헛소문인걸, 다들 란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온건하네.”
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그녀는 받는 대로 갚아 주는 사람이다. 란이 싱긋 웃고 엘리제에게서 돌아서며 말했다.
“후작님과 춤이라도 춰. 난 잠깐 돌아다닐 테니까.”
“혼자?”
“응, 그럼. 이렇게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은걸.”
그렇게 말하고 란은 명랑하게 인사한 후에 그녀의 옆을 떠났다. 괜찮을까, 하고 걱정하는 제 아내의 팔을 당기며 키릭스 후작이 말했다.
“아무래도 라치아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야.”
엘리제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하고 남편의 손을 마주 붙잡았다.
란이 곧장 찾아간 사람은 우슬라 공작 부인이었다.
“공작 부인.”
생글생글 웃으며 란이 말을 붙이자 우슬라 공작 부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뇨, 다름이 아니라.”
란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황태후마마께서 잘 계시나 걱정이 되어서요. 저에게 참 잘해 주셨던 분인데…… 요즘 통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그 말에 우슬라 공작 부인이 움찔했다. 그녀는 카트야 황태후의 친구였고, 황태후의 위세를 빌려 사교계를 휘젓고 다녔다.
물론 공작 부인이라는 직위가 있으니 올리비아도 그를 함부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황태후와 한 묶음으로 뒷방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황태후마마께서는, 요즘 몸이 좋지 않으시다네.”
“그러셨군요.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황태후마마와는 그 사건 이후로 뵙지 못하여―”
란이 말끝을 흐리자 우슬라 공작 부인은 ‘그 사건’이 뭔지 재빠르게 알아챘다. 황태자였던 루스가 란의 강간을 시도한 사건이었다.
바로 카트야의 야회 무도회에서 말이다.
우슬라 공작 부인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걱정이 많겠군.”
“네, 제가 황태후마마를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꼭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이지, 황태후마마도 기뻐하실 걸세.”
우슬라 공작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 역시 란이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건 사교계에서 당연한 일이다.
우슬라 공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몇 명 사람을 더 소개시켜 주겠네. 아,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만나 보았나? 백작 부인은 발이 넓거든.”
이미 만났지만,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 주신다면, 저는 기쁘지요.”
란은 그렇게 말하며 부채를 팔락이고 웃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무도회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무렵,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라치아 공작님 드십니다!”
다시금 시선들이 입구에 와서 박혔다. 유스타프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젊은 아가씨들은 모두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곧추세웠다. 유스타프의 눈이 천천히 사방을 살피다가 곧 찌푸려졌다.
그의 눈에 란이 들어왔다.
들어온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녀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성큼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호스티스인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공작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 부인의 눈은 반짝이고 뺨은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제 파트너가 오고 싶다고 해서.”
유스타프의 말에 백작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느 아가씨와 함께 오셨나요?”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입장할 때도 혼자였으니 당연히 들어와서도 혼자다.
“아뇨, 제가 일이 있어서 먼저 보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계속 란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란을 보았다.
아차, 싶은 마음이 스쳤다.
란을 남자들에게 소개해 준 것은 리젤로티 백작 부인 본인이었다. 우슬라 공작 부인에게서 소개를 받고 나니 곧 란이 미혼의 백작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뚜쟁이 기질이 발동했던 거다.
제국은 장자상속제.
둘째나 셋째로 태어난 남자들은 작위가 없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그중 하나는 작위가 있는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데 란은 미망인도 아니며, 작위가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봉토가 없기는 하지만, 계승되는 백작 위는 커다란 매력이었다. 어차피 봉토는 영지전을 통해서 빼앗거나 사들여도 된다. 더해서 란의 수완이 좋다는 걸 모르는 사교계 인사는 없었다.
그 생각에 미치자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적극적으로 남자를 소개시켜주기 시작했고, 그녀의 예상대로 란의 인기는 곧 하늘을 찔러서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이야말로, 사교계의 꽃이 되는 첫걸음.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제 작품에 퍽이나 뿌듯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치아 공작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공작 각하―”
백작 부인이 뭔가 말을 하려는데 유스타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말했다.
“일행을 발견해서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요.”
유스타프는 그러고는 휙 빠른 걸음을 뗐다.
란은 제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상대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름이 뭐더라? 무슨 남작의 둘째였는데―’
그녀는 대여섯쯤 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뚜쟁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남자를 소개시켜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백작님의 머리카락은 꼭 달빛과 같군요. 란이라고 친근하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전 벌써부터 백작님과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보다 저와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춤이 좀 서툴러서―”
“하하, 괜찮습니다. 춤에 서투르시다니 참으로 귀여우시군요.”
란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정면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커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스!’
란은 소리칠 뻔한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주변에 몰린 남자들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달콤한 소리를 하기 바빴다.
‘어라?’
란은 의아해졌다.
‘화났나……?’
갸웃하는데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앞까지 도착한 그가 말했다.
“내 파트너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에 남자들이 돌아보았다가, 유스타프가 서 있는 걸 보고 당황했다.
몇몇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란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공작님, 오셨군요.”
그제야 남자들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라치아 공작.
란이 한 걸음 걸어가서 살며시 유스타프의 손을 잡았지만, 유스타프는 남자들을 하나씩 쏘아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선약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란.”
“또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연락하는 놈은 내 결투장도 같이 받는 걸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유스타프가 차갑게 말해서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유스타프가 란의 허리를 감고 말했다.
“가시죠.”
“어? 아, 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란은 그 자리를 떴다.
“유스?”
“네.”
“화났어?”
“…….”
유스타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났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뇨―”
그가 말하다 눈을 찌푸렸다.
“란도 제가 저렇게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화날 거 아닙니까?”
란은 잠시 그 광경을 생각해 보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광경이다.
“아니, 아닌데.”
란의 말에 유스타프의 얼굴에 충격이 지나갔다.
“아니라고요.”
그의 중얼거림에 란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상상했던, 유스타프와 시나가 나란히 서 있던 그림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별 타격도 없었다.
그저 ‘유스가 귀찮겠구나.’ 그런 느낌?
란은 유스타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스?”
“네.”
“화났어―?”
“아뇨.”
짤막하게 유스타프가 대답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란.”
“응.”
“왜 저와 사귀기로 하셨습니까?”
“어―?”
생각도 하지 못한 질문이라 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거야―”
그녀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팟 하고 조명이 꺼지고 사방이 깜깜해졌다.
오케스트라 음악도 잠잠해져서,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짝짝!
그때 손뼉을 두 번 치는 소리가 들리고 단 위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모두들 놀라셨지요. 오늘의 게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며 그녀가 연극적으로 팔을 벌리자 반짝이는 나비들이 무수히 피어올랐고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란은 놀라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나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환영 마법?”
“마법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다.”
라치아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마법 세공품은 흔하지만 마법사는 처음이었다.
란은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어 환영 마법을 바라보았다.
깜깜했던 내부는 희미한 빛을 반짝이며 나는 나비들로 인해서 어렴풋이 밝아졌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말했다.
“자, 그러면 숙녀분들은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규칙은 따로따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오른편을 가리키며 말하자 다른 연회장으로 통하는 문이 밝게 빛났다.
“무슨 게임을 하려는 걸까.”
란이 중얼거리고 유스타프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며 말했다.
“나중에 봐.”
“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아 란은 그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어 줬다가 문 쪽으로 향했다.
‘일이 잘 끝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왜 저와 사귀기로 하셨습니까?
그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왜냐니.
‘좋아하니까인 게 당연하잖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엘리제가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잽싸게 팔짱을 꼈다.
“흥미진진한 밤이네요.”
그녀의 호박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 란은 상념에서 깨어나 웃었다.
“그러게. 대체 무슨 게임을 하시려고 그런 걸까?”
모두 궁금증을 품고 방을 건너가자, 오른편 방에 있던 시녀들이 다가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은 크리스털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호두만 한 마름모꼴의 크리스털은 옅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예뻐라.”
탄성을 내지른 엘리제가 제 눈가에 크리스털을 가까이 대고 돌려 보았다. 빛의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요정의 날개처럼 빛났다.
“자, 모두 그 크리스털을 가지고 이 저택 어디든 숨으시면 됩니다. 만약 숨바꼭질 구역 밖으로 나가면 크리스털의 빛이 꺼지니, 그걸로 구별하시면 된답니다.”
이어 안으로 들어온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신사분들에게도 크리스털을 나눠드릴 겁니다. 그분들이 가지고 계시는 크리스털은 여러분의 크리스털과 한 쌍이지요. 가까이 다가가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그리고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웃으며 시녀의 바구니에서 크리스털을 하나 꺼내 입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어느 크리스털과 어느 크리스털이 한 쌍인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 말에 “꺄.” 하는 환호성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숙녀분들. 10분의 시간을 드리지요.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모두가 흥분된 음성으로 웃고 떠들며 우르르 잰걸음으로 반대편 문을 빠져나갔다.
느긋하게 문을 빠져나가며 엘리제가 말했다.
“나 카티가 찾아오겠네.”
“어떻게 알아?”
“리젤로티 백작 부인은 수완이 있거든. 게다가 불륜을 싫어하니까. 기혼자들에게는 이미 따로 뭔가를 했을 거야.”
“그렇구나.”
정도를 아는 부인이로군.
“응, 그럼 얼른 가서 숨자.”
웃으며 엘리제가 란의 팔을 잡아당겼다. 곳곳에 숨을 곳을 찾는 사람들이 보였다.
“밖으로 나갈까?”
란의 말에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정원은 덥잖아.”
“여름밤인데?”
란의 말에 엘리제는 뺨을 부풀렸다가 말했다.
“그럼 따로 숨을까?”
“그게 좋을 것 같아. 어차피 일단 만나면 후작님과 리제는 달콤한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머?”
엘리제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공작님이 란을 찾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란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시간 다 되겠다.” 하며 엘리제의 등을 떠민 뒤 자신은 정원으로 나섰다.
‘아, 정말로 사람이 없네.’
다들 냉풍기에 길들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군.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털을 바라보았다. 정원도 숨바꼭질의 영역인지 크리스털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좋아.”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원에 난 돌길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불어 관목 숲을 흔들리게 하고, 달콤한 밤의 향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란은 기지개를 쭉 켰다.
‘이렇게 좋은데.’
하지만 확실히 숨을 곳을 확보하는 건 문제였다. 바닥에 그냥 앉으면 드레스가 흙투성이가 될 텐데.
란은 조심조심 정원을 살폈다. 그리고 조약돌이 깔린, 작은 미로 정원 안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미로보다는 기하학무늬의 정원이라고 해야 할지도.’
얼마 전에 전지한 것인지, 나무에서는 달콤한 풋내가 났다. 란은 그 돌바닥에 털썩 앉았다.
손바닥을 벌려보니 크리스털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못 찾겠지.’
다들 저택으로 찾으러 들어갔을 테니까.
저택 쪽을 바라보니 유리 창문 안쪽으로 어른어른 빛나는 나비가 보였다. 꽤 아름다운 볼거리다.
‘루미에가 불쌍하다.’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입장하자마자 포도주를 뒤집어써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돌려보냈더니―
‘예비 옷이 없었지.’
그래서 공작저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걸, 그냥 가라고 잘라 버렸다.
‘뭔가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해서 불쌍했지만…….’
적당히 끊어 내지 않으면 안 돼. 너무 오냐오냐만 하면 안 좋아.
게다가…….
‘유스타프가 혹시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
선을 그어야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모아 웅크리고 숨을 내뱉었다. 뺨을 무릎에 기대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카트야 황태후가 본격적으로 다시 사교계에 나오면, 아무리 올리비아라고 해도 불리하지. 이이제이처럼 로열패밀리는 로열패밀리로 무찌른다는 거죠.’
사실 이런 사교계의 사소한 싸움 따위, 란에게는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루스와 올리비아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게 될 줄이야.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데.’
빙벽에 봉인된 ‘어둠’이 눈을 떴다. 시나가 내년이 되면 이곳에 오니까, 어둠은 내후년…….
‘금방이잖아!’
란은 으으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더더욱 큰 문제는 뭐냐면―
‘내가 글을 완결 내지 않았다는 거지.’
그래서 ‘어둠을 물리치고 해피엔딩.’이라는 얼개는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그때 그렇게 완결을 쓸 ‘계획만’ 가지고 있었던 게, 실제로 이뤄지는 건지도 모르겠고.
‘하긴, 이제 더 이상 원작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녀는 그러며 제 손을 펴 보았다.
‘원래라면 나야말로 벌써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본래 란이 죽은 건 맞는 건가?’
그리고 부모님과 타스도.
란은 눈을 감았다.
바꿀 수 있었던 거라면, 왜 돌아가신 걸까?
‘잠깐. 그러면 지금 내가 유스타프랑 사귀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사실 내 사업도 쫄딱 망했어야 할 거고, 린드버그 숙부가 날 이미 죽였겠지.’
정말로 커다란 흐름을 바꿀 수 없는 거라면 말이다.
‘그냥 우연이었나? 정말?’
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작.
그때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약돌을 밟는 소리에 란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란은 제 손을 열어 보았다. 크리스털이 깜박이고 있었다.
‘거짓말!’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서 단둘이 만나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납치 시도가 있었다, 하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란은 깊게 숨을 삼키고 크리스털을 꽉 쥐었다.
그녀는 크리스털을 관목 안에 숨기고 기듯이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적당히 튼튼한 나뭇가지를 찾아낸 다음, 숨을 삼키고 누가 거기에 오는지 지켜보았다.
자박자박.
돌을 밟는 소리의 주인은 제 위치를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제 크리스털이 마구 깜박이는 걸 꺼내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란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스!”
“란.”
유스타프의 얼굴에 미소가 지나갔다가, 그녀의 손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그건 뭡니까?”
“아, 수상한 사람이면 때려 주려고.”
그녀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에서 막대기를 빼내어 던진 뒤 말했다.
“숨는다든가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까?”
“숨어 있었잖아?”
란이 얼른 관목을 돌아 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숨겨뒀던 크리스털을 꺼내었다.
“신기하네. 어떻게 유스타프랑 한 쌍이 됐을까?”
“운명이 아닐까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유스타프가 말해서 란은 저도 모르게 수긍할 뻔했다.
“그러―네가 아니지. 하여간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지요. 그 나뭇가지를 휘두르셨다가는 큰일 났을 테니까요.”
“풀스윙으로 휘두르면 확실히 타격이 되지 않을까.”
란이 휙휙 제 팔을 휘두르자 유스타프는 “나중에 저에게 한번 시험해 보세요.” 하고 짤막하게 답했다.
란은 눈을 치켜 올렸다가 웃었다.
“유스타프에게는 못 하지.”
“그걸로 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제가 걱정을 하지 않겠지요.”
“아무리 유스라도 나무에 맞으면 아프잖아?”
“맞을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몰래 때리면 맞을걸.”
“지금 해 볼까요.”
“어?”
유스타프가 던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란에게 건네주고 뒤로 돌아섰다.
“때려 보십시오.”
란은 얼떨떨해져서 제 손에 들린 막대와 유스타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진짜?”
“네.”
“정말로?”
“네.”
“진짜 때린다?”
“네.”
“정말, 진짜, 정말―”
“란.”
유스타프가 짧게 그녀를 불렀다.
“그냥 휘두르십시오.”
란은 제 손에 들린 가지를 다시 보았다. 아니, 그래도 좀.
하고 란은 단단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유스타프를 본 다음에 힘차게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를 맞으면 안 되니까―’
란은 그의 옆구리를 겨냥했다.
붕― 소리가 나는 상당히 힘찬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뭇가지는 허공을 갈랐다.
“어?”
너무 세게 휘둘러서 허리가 휙 돌아 휘청하는 걸, 뒤에서 유스타프가 붙잡았다.
란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스?”
“네.”
“방금, 내 앞에 있었잖아.”
“그랬습니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란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꾸욱 하고 힘주어 붙잡혀서 란은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제 아시겠습니까?”
란은 입을 떡 벌리고 돌아서려고 애썼지만, 그에게 꼭 안겨서 도무지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법 아냐?”
“아닙니다.”
유스타프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타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란은 제 배 앞에서 깍지 낀 그의 손을 붙잡아 벌린 후에 휙 돌아섰다.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덤비지 않고 도망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
“란.”
“약속할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서 유스타프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란은 약속하길 잘했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은 뭐야?”
란이 손을 뻗으며 말해서, 유스타프는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마주 잡아 깍지 끼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크리스털.”
“운명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유스타프는 리젤로티 백작 부인에게 은근히 압박을 넣어서 란과 짝이 되는 크리스털을 손에 넣은 건 입을 싹 닦았다.
자신이 달라고 실제로 말한 건 아니지 않은가?
란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가 곧 호선을 그렸다.
“가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믿어드리는 게 가신의 도리지요.”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털을 주십시오.”
의아해하면서도 란은 순순히 관목 속에서 찾은 제 크리스털을 내주었고, 유스타프의 손바닥 위에서 크리스털 두 개가 서로 닿자 색이 무지갯빛으로 바뀌어서 반짝이더니 사방에 꽃과 별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지는 환영이 나타났다.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아이디어 좋은데? 예쁘다. 반짝반짝하네.”
란은 환영을 몇 번 어루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이런 거 좋―”
아한다고, 말하려는 란의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반짝이는 게 날아온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란은 유스타프를 밀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표창이 그녀의 옆구리에 박혔다.
“란!”
유스타프가 란을 붙잡아 당기며 그녀를 바닥에 내리누른 순간, 표창이 몇 개 더 날아왔다.
어느 사이인가 그의 손에서 검이 뽑혀 나와 날아오는 표창들을 튕겨 냈다. 만(卍)자 모양으로 생긴 표창들은 박히면 빠지지 않도록 낚싯바늘 같은 돌기가 나 있었다.
바닥에 박힌 표창의 가운데에는 작은 얼음수정이 박혀 있었고, 그게 작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스타프의 몸 밑에 깔려 있던 란은 제 옆구리에 걸린 표창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렸고,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그가 그녀의 옆구리에 박힌 표창을 잡아당기자, 드레스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그걸 던지자마자 표창들이 폭발했다.
‘맙소사.’
란은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유스타프의 손이 단단히 그녀를 누르고 있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 순간, 뭔가 빛이 번쩍하고 푸른색 화염이 솟구쳤다.
“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란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에서 불꽃에 휩싸인 사람이 떨어졌다. 그의 입과 눈에서 푸른 불꽃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
너무 끔찍한 모습이라 란은 숨을 삼켰다. 모든 걸 태울 듯하던 불꽃은 약간 잦아들었고, 그는 불을 끄려는 건지 고통 때문인지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타죽을 듯하면서도 죽지 않는다.
란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유스타프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불꽃에 비친 그의 얼굴이 너무 차가워서, 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스.”
그녀가 헐떡이며 작게 말하자 유스타프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떨어졌다가 잠시 흔들렸다. 그가 이를 악물고, 그 사람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리며 손가락을 튕기자 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불꽃의 기세가 강해지고 사람은 곧 형체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었다.
이어 그가 그녀의 옆구리를 누르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잠시 기다리면 의사를―”
“유스, 나는 괜찮아. 긁히지도 않았어. 안에 갑옷을 입고 있었거든.”
란의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지만 의미 전달은 되었고, 유스타프는 순간 얼빠진 얼굴을 했다.
“갑옷이요?”
“응.”
제투라가 선물해 준, 그 나디움으로 된 옷을 란은 납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항상 입고 있었다.
“옷만 찢긴 거야. 나, 나는 괜찮아.”
이제 목소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유스타프는 느리게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소동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란도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유스타프가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었다.
“아, 아까 그 사람이 그런 거야?”
“네.”
“주, 죽였어야 했어?”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아, 스스로가 얼치기 같아 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떨지 마. 울지 마.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의 외침이 작은 침묵을 깨며 가까워졌고, 유스타프가 작게 속삭였다.
“제가 무서우십니까?”
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숨도 나비 날개마냥 함께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지!”
속삭이듯 외치고 란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눈물이 팍 터져 나왔다.
“누님, 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유스타프가 달래듯 말해서 란은 더더욱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자신을 죽이려고 폭탄이 날아왔다는 게 무섭다. 사람이 눈앞에서 타 죽는 걸 본 것도 무섭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공작 각하?!”
“백작님!”
“이게 무슨―”
달려온 병사들과 사람들이 물어 유스타프가 말했다.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암살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도망갔습니다.”
유스타프가 모든 질문에 하나씩 답하는 동안 란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이 기절했다는 말도 들린 것 같고, 몇몇 심약한 숙녀들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 소동을 뚫고―사실 반쯤 무시하고― 유스타프는 녹색 아치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란이 그의 어깨에서 웅얼거렸다.
“손수건 있어?”
유스타프는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고, 란은 얼굴을 닦아 내고 후―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미안.”
“뭐가 말입니까?”
“사람들 혼자 상대하게 해서.”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란이 몸을 비틀어 그의 다리에서 내려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이거 고칠 수 있을까?”
“글쎄요.”
“버리기에는 아까운데.”
“침방시녀에게 맡겨 보시죠.”
“응…….”
꽤 크게 찢어졌구나, 하고 란이 멍하니 옷에 난 구멍을 매만지는 사이 고요함이 마차 안을 채웠다.
마차 바퀴가 바닥을 굴러가는 경쾌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 침묵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란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스타프 괜찮아?”
“네.”
“청염을 그렇게 썼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래?”
“란.”
“어?”
“화내셔도 됩니다.”
란은 유스타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비수처럼 느껴져, 유스타프는 움찔했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낮은 천장 때문에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더니 그의 양 뺨을 꾹 당겼다.
“?!”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유스타프의 눈이 크게 떠졌고, 란이 말했다.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 이 상황에서는. 게다가― 맞아. 유스타프가 무서워. 그야 그런 장면을 봤는데 당연하잖아?”
투덜투덜 란은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울지도 모른다.
란은 설핏 입술을 일그러트리듯이 웃었다.
“그래도 유스가 좋아.”
그의 눈동자가 떨어지지 않고, 그녀가 진심을 말하는 것인지 재보는 것처럼 똑바로 란의 눈을 마주 봐 와서 란 역시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다니, 하고 누가 비난한다면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겠지. 왜냐면 내가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를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좀 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이걸로 답이 될까?”
그때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크게 덜컹 하고 마차가 흔들렸고, 란이 “꺅” 하고 흔들리는 걸 유스타프가 붙잡아 제 다리 위에 앉히고 말했다.
“답이 됐습니다.”
“정말이지, 왜 사귀냐니. 당연하잖아?”
“그게 아니라―”
말하다가 묘하게 씁쓸하게 그가 웃어서 란은 그의 크라바트를 당기며 추궁했다.
“아니라?”
“란은 다정하니까.”
유스타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치아에 남고 싶어서, 아니면 다른 사람이 부탁하니까, 아니면― 제가 불쌍해서.”
란은 입을 떡 벌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항상 자신만만해 보이기만 했던 유스타프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가요?”
“그런 걸로 사귀지는 않아.”
단호하게 말하고 란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아니, 그렇게 사귈 수 있다고 해도, 유스타프와는 그래서 사귀는 게 아니야.”
“그거 다행입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도무지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자의 얼굴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이미 유스타프는 여럿 죽인 전적이 있지.
이번도 확실히 정당방위이기는 했다.
“대체 누굴까?”
란이 그에게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납치가 목적이 아니라 죽이려는 게 목적 같았어.”
유스타프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키스하고 말했다.
“금방 잡을 겁니다.”
이성을 잃었다.
란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자,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상처 입힌 새끼를 가장 잔혹하고 끔찍하고 느리게 죽이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아서―
그는 숨을 내쉬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를 삼켰다.
그때 문득,
그녀가 처음에 어떻게 했는지 뚜렷하게 떠올랐다.
“란.”
“응?”
“왜 그랬습니까?”
“뭐가?”
“왜 절 밀쳤습니까?”
“그야 뭔지 몰라도 유스타프가 맞을까 봐 그랬지.”
“전 맞아도 됩니다.”
“안 되거든?!”
란이 몸을 휙 돌리며 항의했다.
“나야 갑옷이라도 입고 있지만, 유스타프는 아무런 장비도 없었잖아.”
“전 버틸 체력이 있으니까요.”
“체력이 있다고 고통당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이 갑옷은 몸통만 보호해 주는 거 아닙니까? 만약에 다리나 팔이나, 다른 곳에 맞았다면요? 그리고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다면요?”
“그건 유스타프도 마찬가지잖아.”
“마찬가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거든? 유스타프는 독에 내성이라도 있어? 아니면―”
“있습니다.”
“……어?”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을 길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
란은 그 말에 머뭇머뭇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은 해 볼게.”
“란.”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건 어쩔 수가 없잖아? 하지만 노력할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눈을 찡그렸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노력은 해 본다니까.
하지만 멍청한 녹영을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뿌드득 갈렸다.
호위를 붙이면 뭐 하는가?
어디 가서 나자빠져 있기에 주인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오지 않아?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
“전원 사망했습니다.”
두 번째가 고개를 내리깔고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격분해 있어서, 오히려 낮고 부드러웠다.
유스타프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되물었다.
“전원?”
“네, 두 명의 녹영을 붙여 놓았는데, 두 사람 다 시신으로 발견했습니다.”
유스타프는 툭툭 팔걸이를 두들겼다.
“독특한 무기를 쓰더군. 마법 세공품을 무기로 썼어. 게다가 마지막의 공격 역시 마법이었다.”
“마법 무기란 말입니까?”
두 번째가 고개를 들고 물어 유스타프는 생각하고 답했다.
“그런 독특한 세공품은 출처를 찾기 어렵지 않겠지. 게다가 전에 말한 그 암살자 길드 말인데― 위치는 알아냈나?”
“네.”
“그래.”
유스타프가 피비린내 짙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모처럼이니 함께 갈까?”
두 번째는 눈을 깜박였다가 경쾌하게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가주님. 청염의 춤에 참여하게 되어.”
“환영하네.”
푸아킨은 입속으로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집어삼켰다.
‘인간이 아냐, 인간이 아니라고.’
새파란 불꽃이 날리고, 그림자 속에서 검과 창이 솟구친다.
불꽃은 꺼지지도 않았고, 단숨에 모든 걸 집어삼켰다.
‘길드장 xx새끼―’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몇 번이나 욕을 내뱉으며 푸아킨은 장롱 구석에서 벌벌 떨었다.
길드에 남아 있는 길드원들 중에서 오늘 밤 길드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그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거칠게 장롱 문이 열렸다.
“어머나?”
“으아, 으아아아아!”
역광으로 상대가 그저 시꺼멓게만 보이는 가운데 씩 웃는 입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아직 남아 있는 자가 있어요.”
“그거 다행이군.”
두 번째는 웃으며 푸아킨의 머리채를 붙잡아 장롱에서 꺼냈다.
“히, 히익, 힉힉!”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푸아킨은 부들부들 떨었다.
피에 젖은 새까만 부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감히 그 위로 시선을 올릴 생각도 못 하고 푸아킨은 이마를 바닥에 댔다.
“사, 사, 살려주십시오.”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한다면.”
“어, 얼마든지!”
“로미아 백작을 납치하라고 의뢰한 자가 누구지?”
“황제입니다!”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튀어나왔다. 이딴 길드에 지킬 의리 따위는 없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여자가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는 것 같네요. 길드장도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요.”
“그럼 두 번째. 납치에서 살해로 의뢰가 바뀌었나?”
그 말에 푸아킨은 침을 삼키고 “네.” 하고 대답했다.
“너희 길드에는 그만한 실력자가 없는 것 같은데, 누구에게 살해를 의뢰했지?”
“그,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히자, 두 번째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끄악!”
짧게 비명을 지르는 그의 등을 내리밟으며 두 번째가 말했다.
“비명 지를 시간에 대답해 줬으면 하네. 부츠가 더 더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시, 시, 시드라에게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끄흑흑 하고 울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암살자 길드의 오른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울음소리였다.
뒷세계에서도 시드라는 잔혹한 자로 유명했다.
자신이 발설했다는 게 알려지면, 지금 여기서 살아 나가도 살아 나가는 게 아니리라.
“이것도 길드장의 말과 맞네요.”
“그래.”
부츠가 뒤돌아 걷기 시작하자 푸아킨은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곧 그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두 번째가 픽 웃었다.
“자기는 돈 때문에 실컷 사람을 죽이고선.”
겨우 그 정도 말했다고 살아 남을 거라고 생각했니?
“메롱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말하고 깔깔 웃으며 얼른 유스타프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로 나오자 녹영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뭘 해야 할지 알지.”
유스타프가 말하자 두 번째는 날아갈 듯이 절했다.
“물론입니다.”
유스타프는 두 번째를 힐끗 보았다가 지하 저택을 빠져나갔다. 곧 저택에서 불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불을 잡아 보려 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을 태우지는 않아 피해는 그 저택에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
올리비아는 손끝을 깨물었다.
‘그 건방진 계집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뒷방으로 밀어 뒀던 카트야 황태후가 다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의 중심에 란 로미아 백작이 있다는 건, 한쪽 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였다.
리젤로티 백작의 집에서 사고가 난 후에 황태후는 란을 위로해 준답시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그걸 시작으로 본격적인 다과회를 열었다.
란이 힘주어 공략한 것은 여자만이 아니라 젊은 남자들이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연회를 보고 깨달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후가 여는 연회에 괜찮은 남자들이 모인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당연히 참석하는 여자들도 늘었다.
올리비아의 편에 있는 여자들을 하나씩 꼬셔서 데려오기는 어려우니 자발적으로 오게 하자는 작전이었다.
올리비아는 분통이 터졌다.
자신에게 와서 매달려야 하는 사람들이 이제 카트야 황태후에게 가서 매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황실 어른이라는 명목으로 카트야 황태후가 하는 말들은 궁 내에서 잘 먹혔으므로, 올리비아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굳이 적이 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가장 좋지. 그리고 란이 충분히 자신과 가까워진 후에는.
‘원래 배신은 제 편이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올리비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
루미에는 란이 습격을 받았다는 그 이후로 정말 껌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점점 보부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란은 자신이 잊고 온 손수건이나 부채를 착착 건네는 루미에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절대로 옆자리를 비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라는 건 알겠는데―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지 않나.’
훈련은 언제 하며, 검술은 언제 연마한단 말인가?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아.”
대답하고 란은 제 부채를 펼쳐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카트야 황태후가 어머나, 하고 감탄했다.
“예쁘네요. 자개를 조각조각 붙여서 만든 건가요?”
“무지개를 담아 둔 것 같은 빛깔이군요.”
이제 매우 우호적이 된 우슬라 공작 부인이 칭찬을 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게 주인을 닮았군요.”
우슬라 공작 영식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나 공자님, 말도 참 다정하게 하시네요.”
“이거이거 낯부끄러워서 있겠습니까.”
몇몇 사람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란은 기가 막혔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답했다.
“아마 유스타프도 그래서 선물해 준 게 아닐까요.”
그녀와 유스타프가 연인 사이라는 게 공공연하게 밝혀진 후에도 이런 식의 작업은 끊이지 않았다.
‘리제 말마따나 형식을 갖추지 않아서일지도.’
지금 눈앞에 있는 우슬라 공자 역시 우슬라 공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우슬라 공작 부인은 자신이 아끼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결혼할 때 작위는 못 주지만 지참금은 어마어마할 거라고 은근히 란을 찔러보고는 했다.
‘제국에서 작위를 가지지 못하는 장남 이하 남자들의 삶은 피곤하구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게 몰려드는 구애를 무시하고는 했다.
“라치아 공작님에게 선물받으신 건가요?”
“어쩜, 이런 선물을 해 주시다니. 역시 라치아 공작가는 남달라요.”
여자들은 곧 입을 모아 말했다.
연회나 다과회를 열 때 란은 인테리어와 소품과 분위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하기는 하되 그건 10~20% 정도만 섞었고, 분위기 자체도 가볍게, 솜털 같고 말장난과 유희가 오가는 자리로 만들었다.
낭독회나 멀리서 온 유물을 관찰하거나,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려서 맞추거나―
엠티에서 했을 법한 게임들도 곁들이자 순식간에 카트야 황태후의 모임은 인기가 절정으로 솟구쳤다.
카트야 황태후에게 은밀한 청탁도 들어왔고, 그녀는 황제인 루스에게도 말을 넣었다.
루스도 어머니에게는 약했으므로 그녀의 말은 황제에게 먹혔고, 카트야 황태후의 입지는 단단해졌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니까, 이슬람이나 청이나 황태후의 권력을 싹 빼앗아 버리고 뒷방에 가게 만들었지.’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사각거리는 오렌지 셔벗을 입 안에 넣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셔벗이 순식간에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이런 음식 역시 란이 아이디어를 내고는 했다.
‘귀찮기는 하지만 확실히 황후의 입지는 줄었으니까.’
자식이 없는 황후란, 그런 거다.
심지어 요즘 카트야 황태후는 ‘올리비아가 정말로 석녀가 아닌가 싶다. 폐후하고 새로 황후를 뽑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말을 란에게 은밀히 하고는 했다.
그러며 의미 있는 눈빛을 보내서 란은 ‘절대로 개새끼랑은 결혼 안 합니다.’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더 이상 사교계에서 괴롭힘도 없고.’
엘리제는 “세상에, 란 험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란 칭송을 한다니까요?” 하고 투덜거렸지만, 란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론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사람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그래도 계속 욕을 하는 사람들 쪽이 문제지.
마이너스 스토킹이 가장 무서운 거 아니겠는가.
짧은 다과회가 끝나고 모두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는 아쉬움을 안고 자리를 떴다.
시간제한 역시 란의 아이디어였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에 또 오고 싶은 법.
더해서 너무 늘어지는 모임은 쉽게 지루하다는 평판을 얻게 된다.
카트야 황태후가 묵고 있는 백색궁을 나오는데 시녀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로미아 백작님을 뵙습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그녀가 덧붙였다.
“황후마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란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나, 지금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네. 괜히 폐를 끼칠까 염려가 되니 나중에 정식으로 찾아뵙겠다고 전하게나.”
란은 제가 한 말을 검토해 보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어 시녀에게 “가 보게.”라고 한 뒤 궁을 나섰다.
마차에 올라타 란이 말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주인님의 인기에 비벼 보려는 게 아닐까요.”
루미에의 말에 란은 “그런 단순한 사람이면…….” 하고 중얼거렸다가 루미에를 바라보았다.
“루미에.”
“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그녀의 얼굴이 진지해지자 그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황궁 내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는 이제 그도 슬슬 익숙해지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부족한 걸 느낀다.
란이 입을 열었다.
“루미에는 더 이상 내 호위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예기치 못한 때에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에, 루미에는 순간 말을 잃었다.
“루미에, 난 루미에가 좋아.”
란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미에가 이렇게 내게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게 얼마 전에 습격당하신 분이 할 소리예요?”
“물론 호위는 필요하지만―”
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그게 꼭 루미에일 필요는 없다는 거야.”
루미에는 멍하니 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쁜 주홍색 눈동자가 떨려서 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겹쳤다가, 루미에에게 손을 꽉 붙잡혔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하지만 그 손아귀의 힘과 달리, 루미에의 말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얼굴의 미소도 더 짙어졌다.
“주인님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게 있다면 고칠게요, 원하시는 걸 말씀하세요. 네? 검술 훈련은 저녁에 하면 되고, 훈련은 돌아가면서 참여할게요.”
“루미에.”
“아니면 뭐 더 원하는 게 있으세요? 제가 많이 부족한 건 알아요, 그러니까―”
“루미에.”
란이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미소 지었다.
“루미에를 바꾸려거나, 부족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더는 제가 필요 없으신 거네요.”
“어―”
“걸리적거리게 된 거지요, 구해 놓고서 친절하게 대할 때는 좋았지만 금방 거치적거리게 되신 거 아닌가요? 공작님과의 연애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계신 거겠죠.”
란의 에메랄드색 눈이 두어 번 깜박였다. 루미에는 제 말을 뱉어내고 스스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시꺼먼 속을 드러낸 기분, 하지만 뱉어 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말은 점점 더 속도를 붙였다.
“아닌가요, 저는 신분도 알 수 없는 놈이고, 호의나 변덕도 잠깐이라는 것 역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고, 개노릇을 했지만 그래도 더는 싫으신 거겠죠. 하, 그래서 릴리는 어떻게 됩니까? 다른 곳에 절 파실 생각인가요? 비싸게 값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말이 길어지면서 비아냥도 길어졌고, 점점 파탄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걸 알아도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점점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아.
루미에는 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경멸이나 동정이나, 뭐가 나타나든지 간에 그러면 산산조각 날 것 같다.
하지만 란은 루미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루미에. 완전 마이너스잖아?!”
그야말로 놀랐다는 말투였다. 루미에는 멍하니 란을 보았다. 란은 당황해 말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나 그런 사람도 아니거든?”
그녀가 눈을 찌푸리고 그의 뺨을 잡아당겼다.
아주 예전에 유스타프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라 루미에는 어쩐지 마음속이 간지러워졌다.
“말했잖아, 루미에를 좋아한다고. 물론 사람이 우울해지면 좋은 말은 들리지 않고 나쁜 말만 들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란은 그러며 씩 웃었다.
“진짜로 안 되겠어. 루미에, 내가 루미에를 구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루미에의 세계를 나로 제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닙니다!”
“루미에가 제한당하고 싶다고?”
미리 할 말을 안 것처럼 말하고 란은 피식 웃었다.
“그건 제한당하지 않고 나서 생각해 봐.”
“주인님―”
“내가 루미에 주인인 거지?”
“당연합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요?”
란의 녹색 눈에는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보석처럼 빛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투명해서 바닥이 보일 것 같은…….’
그리고 이쪽 역시 바닥이 들여다보일 듯한 그런 느낌.
“알겠습니다.”
루미에는 고개를 떨구며 그렇게 대답했고 란은 그의 옆으로 옮겨 털썩 앉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말인가요?”
“루미에가 마음속을 이야기해서.”
그제야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 전부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 하지만 어때? 나에게 말하니까 시원해지지 않았어?”
루미에는 란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야 그런 이야기를 본인에게 하고 정면으로 반박당했으니, 시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음속에 고인 어둠이 단숨에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난 말야, 루미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거든.”
“큰 기대요?”
“응, 그러니까―”
란은 뭐라고 해야 할까 하다가 “아.” 하고 말했다.
“커다란 마수를 한방에 쓰러트릴 정도의 능력?”
“그렇군요.”
란은 커다란 마수라는 게 얼마나 큰지 짐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말했고, 루미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루미에는 꼭 그렇게 될 거야. 난 알아.”
루미에는 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란이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내가 루미에를 좋아하는 건 변함없어.”
“주인님.”
“응?”
“제가 주인님을 좋아하는 건 아시나요?”
란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당연히 알지?”
“아뇨, 그게 아니라 키스하고 싶고 끌어안고 싶게 말이지요.”
그의 말에 란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곧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뭐? 진짜??”
목소리가 마구 떨려 와서, 란은 헛기침을 했다.
루미에는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란을 당황하게 한 건, 흔들리게 한 건 처음인 것 같아서.
그게 기뻤다.
“뭐, 뭐야. 농담이었어?”
란이 버벅거리며 말하자 루미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진심입니다. 하지만 전 이미 차였지요.”
그제야 란은 전에 루미에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게 나였다니!’
란은 당황해 끙끙거렸다.
“아니, 그게―”
어쩔 줄 모르다가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해요.”
진지한 인사에 루미에는 미소 지었다. 자신 같은 자의 고백도 진지하게 받아 주는 그녀.
그러니까 좋아하게 된 거지만.
“아닙니다.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말해 줘서 고마워요.”
고백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란이 말했다.
“내가 미리 루미에에게 호위를 그만두라고 말해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니야.”
“그러네요.”
루미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 아치에 도착해 마차 문이 열리니 드물게도 유스타프가 시종 대신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란은 웃으면서 유스타프가 내민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바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연인을 마중 나온 거지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루미에를 바라보았다. 루미에는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싱긋 웃었고, 유스타프의 표정은 묘해졌다.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채 란은 그의 대답에 웃고 말했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는데. 참, 유스타프.”
“네.”
“올리비아가 날 초대했어.”
유스타프의 눈동자가 란을 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가실 겁니까?”
“글쎄, 아직 모르겠어서…….”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아프다고 하고 집에 있을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약간 기쁜 기색이 배어났다. 요즘 란은 사교계에서 작업하느라 통 저택에 있지 않았고, 둘이 얼굴을 보는 시간이 적었던 터였다.
“그러네. 그럴까?”
저택 안에 들어서자 희미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그녀가 공작이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많은 구혼자가 밀려들고 있었고, 생화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쌓였다.
물론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유스타프가 그 편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해서 란은 질겁하며 “그건 아니지.” 하고 편지는 그녀가 처리했다.
하지만 생화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 유스타프는 그 생화를 받는 족족 전부 양로원이나 고아원 같은 곳에 기부해 버렸다.
“결투 신청이라도 해야 잠잠해질까요.”
유스타프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려 란이 말했다.
“괜히 더 화제가 될지도 몰라.”
사교계의 관종이 얼마나 무서운데.
란의 말에 그는 신음을 흘렸다.
란은 ‘녹색 아치’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유스타프의 연인이었지만, 동시에 가신이었으므로 그녀가 가주의 저택에 머무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주―가신, 이 관계에서야 매우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연인 사이라면, 저택에서 머무는 것은 소리가 나올 만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서 란도 한때는 저택을 구매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지만, 유스타프가 만류하는 데다가 이상하게도 괜찮다고 생각한 저택 매물이 나오는 족족 없어졌다고 관리인들이 전했다.
‘누구 짓인지 빤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는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확실히 새로 이사를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하는 말과 함께 란은 스리슬쩍 넘어간 일이었다.
중간의 복도에서 루미에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유스타프가 물었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응, 이야기를 좀 했어.”
란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하다가 일단 그를 호위에서 빼기로 했다는 것을 말했다.
“내가 너무 훈련 시간도 빼앗는 것 같고 그래서 말야.”
“알겠습니다.”
답하고 유스타프는 침묵하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던가요?”
“응?”
“저자가 말입니다.”
“어― 뭐 좀 대화가 있었는데, 루미에도 납득해 줬고.”
란은 빙긋 웃었다.
“게다가 사교계는 호위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잖아? 대부분 시녀를 데리고 돌아다니지.”
“그건 그렇지요.”
유스타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새 시녀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능력 있는?”
“물론입니다.”
대답하고 유스타프는 주변을 둘러보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그녀의 허리를 당겨 키스했다.
“음―”
작게 란이 신음을 내뱉자 허리를 안은 유스타프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란은 움찔하며 숨을 삼켰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혀를 천천히 문지르는, 그 돌기들이 하나씩 애무당하는 듯한 감각에 란은 소름이 돋았다.
짧게, 탐색하듯 끝난 키스인데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그녀가 간신히 항의했다.
“보, 복도에서 이렇게 하면―”
“방에서 이렇게 키스하면 곤란하지요.”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눈을 굴렸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유스타프가 그녀 대신 방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가주님도 함께 오셨나요.”
카라와 디모디아의 명랑한 목소리에 란의 얼굴도 밝아졌다.
“응, 이제 왔어.”
디모디아가 화병의 꽃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고 손을 뗐다.
“모임은 즐거우셨나요?”
“항상 그렇지 뭐.”
디모디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이지, 다들 얻고 싶어 하는 그 자리를 쉽게 얻으셨으면서도, 별로 흥미나 미련도 없으시고.”
“쉽게 안 얻었어. 노력 열심히 했거든?”
“그럼 노력 대비 성과라고 해 둘까요.”
디모디아가 중얼거렸다. 유스타프가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침실로 갈까.”
유스타프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뇨, 여기서 이야기하죠.”
그러며 두 시녀를 보자 시녀들은 재빠르게 인사하고 퇴석했다.
“이야기할 거면 중간에 집무실에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란이 그렇게 말하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거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무슨 이야긴데?”
“전에 우리를 습격했던 자 기억나십니까?”
“잊을 수가 없지.”
“그자는 팀입니다.”
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럼 아직 위협이 남아 있는 거네.”
“아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
“보낸 상대에게 돌려보냈거든요.”
유스타프가 너무 태연하게 이야기해서 란은 잠시 머릿속에 이야기가 입력되지 않았다.
돌려보내?
보낸 사람에게?
곧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잠깐, 유스, 그거―”
“저는 그 상대가 누군지 모릅니다.”
딱 잘라 유스타프가 말했다.
“그저 보낸 자에게 돌려보냈을 뿐이지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보면 알겠군요.”
“나 지금 결심했어.”
“뭘 말입니까?”
“유스를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지.”
그 말에 유스타프가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그거 고마운 말이로군요.”
란 역시 피식 웃고 중얼거렸다.
“성공할까?”
“글쎄요.”
유스타프는 미소 지었다.
“제 예상으로는―”
“예상으로는?”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라치아로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제야 란은 유스타프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았다. 그는 요즘 란이 사교계에 공을 많이 쏟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걸 다 내려놓고 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거다.
유스타프는 란의 ‘아―’에 변명하듯이 말했다.
“물론 다시 라치아로 내려가는 게 여러모로 귀찮으시겠지만―”
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괜찮아. 가야 한다면 가야지.”
“다른 걸로 보상하겠습니다. 뭔가 필요한 건, 아니 원하는 건 없으십니까?”
란이 웃었다.
“그게 뭐야. 그런 거 필요 없어. 괜찮아, 괜찮아.”
란이 손을 위아래로 팔랑팔랑 흔들고 이어 말했다.
“이제 구애도 귀찮아지는 타이밍이었으니까.”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맞췄다. 그의 입술이 살짝 그녀의 손등을 훑듯이 움직였다.
란이 그대로 경직해 버리자 그가 말했다.
“구애가 귀찮아진다고 하시기에―”
“아, 아, 아니, 유스타프는 이미 연인이잖아?”
“아직 연인일 뿐이지요.”
그의 말에 란은 순간 찔린 듯한, 곤란한 얼굴을 했고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정말로 귀찮아지면 말해 주십시오.”
“그걸 어떻게 말해.”
란이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라치아에 내려가는 거 차라리 잘됐어. 쌓아 둔 일도 몇 개 살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직접 가서 볼 수도 있게 되었으니 좋지.
란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연인이 되면 좀 더 마음이 놓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란이 마음에 들지 않을 상황만 자꾸 생겨서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이런 일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 유스타프는 사교계의 귀족 부인들을 알았다.
그들은 대부분 명랑하고 밝고, 큰 고민 없이 즐겁게 사교계 생활을 즐겼다.
물론 란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겨울도 되지 않았는데, 라치아에 가게 되고.’
그는 한숨을 삼켰다.
란이 그에게 투정을 부리면 좋겠다, 불만을 말하면 좋겠다, 싫은 점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는 란에게 마주 미소를 지었다.
✥✥✥
전령이 도착한 것은 라치아에 첫눈이 내리기 하루 전이었다.
꽤나 아슬아슬했다고, 란은 생각했다. 라치아의 첫눈은 결코 얄팍하게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란은 밤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 봐도 보이는, 깃털처럼 커다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눈의 깊이는 무릎 위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만약 전령이 오는 중이었다면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대로 좀 쌓이면 차라리 썰매를 타고 돌아갈 수 있으니까.’
다행이야, 한 번 더 되뇌고 란은 멍하니 눈 내리는 걸 보았다.
‘정말로 루스가 죽었어.’
이렇게 쉽게 죽어도 되나, 싶게 죽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올리비아가 그를 살해하고, 읽은 데에서는 별로 나오는 내용도 없으니까 이게 틀린 건 아닌데―
‘잠깐, 그러면 라벨이 다음 황제가 되는 건가?’
누가 되든지 루스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라벨은 안면도 있고 내적 친밀감이 있으니 더 나은 듯이 느껴졌다.
‘그럼 이제 올리비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예전에는 아이가 있었지만, 지금 올리비아에게는 아이가 없는 거 아닌가?
‘라벨의 처우에 달린 건가.’
일단 미로 공작가의 사람이니 함부로 취급할 수도 없을 테고―
‘차라리 처음부터 라벨과 짝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고쳐 쓸 수는 없는 일이고, 이미 모든 것이 다 달라져 버렸다.
지금쯤 수도가 얼마나 난리가 났을까를 생각하면, 미리 내려온 게 다행이었다.
눈 핑계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백작님, 너무 창가에 붙어 계시지 마세요!”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에 란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새로운 시녀’였다.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에 란은 당황했지만, 상대방은 싱글싱글 웃으며 “처음 뵙겠어요.” 하고 인사했을 뿐이었다.
예전에 녹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 남장 여인이었다.
“키리.”
란이 짧게 이름을 부르자 녹영의 두 번째인 키리는, 자신의 새 이름이 퍽 마음에 들어 다시 함박웃음을 짓고 말했다.
“창가는 외풍이 심하잖아요?”
“응. 하지만 눈 오는 게 예뻐서.”
“몇 년이나 지겹도록 보신 건데도 예쁘세요?”
“키리는?”
“전 싫어요.”
딱 잘라서 말하자 소다와 카라의 얼굴이 묘해졌지만, 란은 웃었다.
“맞아, 싫을 것 같아.”
게다가 란 자신은 눈을 감상하는 입장이지 눈 때문에 고생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작은 길을 내기 위해서 시종들이 뻘뻘 땀을 흘리며 눈을 치울 걸 생각하면 눈 오는 게 그렇게 반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겹게 오는 게 눈이니까, 거기서 즐거움이라도 찾지 않으면 힘들잖아.”
란의 말에 키리는 눈을 깜박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란은 빙긋 웃고 창가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하지만 키리 말도 맞아.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
소다와 카라는 키리의 근원이 범상치 않은 걸 눈치챈 모양으로, 키리를 대할 때는 거리감이 있었다.
디모디아가 물처럼 녹아들었다면, 키리는 튄다고 해야 하나.
같은 시녀 제복을 입고 있는데도, 그녀는 눈에 들어오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쇼트커트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세도 좋고, 걷는 방식도 고양이 같다.
그래서 란은 키리에게 물었다.
“키리.”
“네.”
“나에게 가벼운 호신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
란의 말에 키리는 당황한 듯 보였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키리!”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리며 항의하자 키리가 웃었다.
“하지만 확실히 몸 놀리는 법 정도는 배워 두시는 게 좋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겉핥기라도 배워 두는 게 나아요.”
“그렇지만―”
디모디아가 우물거렸다.
“가주님이 허락하실까요.”
키리가 눈을 깜박이고 란을 향해 몸 전체를 돌리고 공손히 물었다.
“백작님, 가주님의 허락이 필요한 일인가요?”
란은 웃으며 “아니.” 하고 말했고 키리가 여우처럼 생글 웃었다.
“그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디모디아는 ‘아, 전 몰라요.’ 하는 말을 중얼거렸고 소다와 카라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란 혼자 기뻐하며 양손을 꽉 맞잡았다.
“정말? 그럼 당장 시작해도 좋아.”
“그래도 준비가 있어야 하니까 내일부터 시작해요.”
키리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유스타프가 보여 주었던 검술이 기억났다.
‘그 정도까지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제 몸을 간수할 정도는 되고 싶었다.
키리는 말한 대로 바로 이튿날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란이 가지고 있는 갑옷에 감탄했다. 전에 수리검도 막아낸 적이 있는 나디움 옷이었다.
입으면 그냥 헐렁한 속옷 같지만, 가슴 쪽에 붙어 있는 보석을 살짝 돌리면 몸에 맞게 꽉 달라붙으면서 질감이 강철로 된 것처럼 바뀌었다.
“이걸 입고 훈련하지요.”
키리는 그렇게 말하고 란의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은 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적어도 나무 막대기라도 잡고 흔들 줄 알았는데.’
나무 막대기는커녕 전혀 상관없는 체력 기르는 운동부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인터벌과 순발력을 발휘하는 훈련을 하고 나자 겨울인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란은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어깨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키리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더 기초 체력이 있으시네요? 첫날부터 따라오실 수 있을지는 몰랐어요.”
“토할 것 같아.”
입에서 단내가 났다. 란이 숨을 모아 단숨에 말하자 키리가 답했다.
“토하지는 않으셨으니 된 거지요.”
이어 그녀가 커다란 수건으로 란을 덮어 주며 말했다.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이에요. 몸이 식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서 씻으세요.”
“응…….”
고개를 끄덕이고 란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단이 훈련하는 훈련장의 한쪽을 빌려서 훈련했기 때문에 저택까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그냥 씻고 갈까?’
기사단실에 딸린 공용 샤워실이 생각났다. 청염 기사단에 여성이 없는 게 아니라서, 남녀 따로 샤워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 돼요.”
그때 그런 생각을 읽은 것처럼, 어디서 나타났는지 루미에가 나와 속삭였다. 란은 펄쩍 뛰었다.
“루미에!”
“지금 주인님, 샤워실을 사용할까 생각하셨지요?”
그가 눈웃음치며 하는 말에 란은 어색하게 답했다.
“어, 으응…….”
“안 됩니다. 다른 기사들이 기절할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 주세요.”
“그래야겠지……?”
“당연하지요.”
그 사이 도구를 정리한 키리가 걸어와 말했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감기 걸린다고요. 그쪽도 길에서 말 걸지 말고요.”
루미에가 교태스럽게―란은 이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는 루미에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키리를 향해 웃었다.
“제 주인님이 기사단 샤워실을 사용할까 고민하시는 것 같아서.”
“돌았― 아니, 제정신이신가요?”
키리의 말에 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정도야?”
“그 정도지요. 자, 썩 들어가세요. 디모디아가 물 받아 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두 사람에게 떠밀려 제 방으로 돌아온 란은 뜨거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샤워가 아니라 목욕이 필요했어.’
키리와 루미에의 현명함에 란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루미에 진짜 많이 좋아졌네.’
좋은 쪽으로 자꾸자꾸 변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처럼 맹목적인 것도 조금씩 사라지고, 게다가 요즘은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데 블레인이 진지하게 “제가 단장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란에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래, 우리 루미에가 쩐다니까.’
흐뭇해져서 란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뜨거워진 뺨을, 아직 차가운 대리석 욕조의 둥근 부분에 대고 란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년이면 오는구나.’
시나.
이시나.
여자 주인공.
란은 그녀를 향해 죄책감과 기묘한 기분이 범벅이 되는 걸 느꼈다.
‘내가 유스랑 사귀고 있으니까.’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기분.
신년회 전 봉인 때에 시나가 오니까―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기대되는 것도 있었다. 어떤 사람일까,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
여주인공인 만큼 아름답고, 씩씩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실례합니다.”
작은 목소리와 함께 소다가 문을 열고 물었다.
“물 온도는 적절하신가요?”
“응, 좋아.”
“뺨이 빨갛게 되셨네요.”
“약간 더운가……?”
“슬슬 탕에서 나오세요. 누우시면 마사지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란은 냉큼 욕조에서 나왔다. 나무를 수천, 수만 번 사포질해서 매끄럽게 만든 침대에 눕자 소다와 카라가 좋은 향기가 나는 향유를 들고 들어왔다.
뼈와 살과 근육이 분리되는 느낌을 받으며 흐늘흐늘해질 때까지 마사지를 받고 나서 달콤한 향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란은 침실 벽난로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반짝이는 밀빛 머리카락이 벽난로 불에 반짝였다.
마법 램프가 있고, 온풍기가 있지만 그래도 벽난로가 주는 낭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약간의 소란스러움과 함께 문이 열렸다.
란이 빗질하다 고개를 드니 디모디아가 곤란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주님이 오셨는데―”
“유스가? 들어오라고 그래. 무슨 일인데?”
디모디아가 입술을 꾸욱 다물고 란을 봐서 란은 “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다에게 두꺼운 가운을 받아 들었다.
“내가 나갈게.”
그제야 디모디아가 싱긋 웃었다.
“네.”
란은 부드러운 남색 가운을 실내복 위에 걸치고 허리띠를 꼭 묶은 후에 거실로 나섰다. 거실 가운데에 서 있던 유스타프와 눈이 마주쳐 란은 놀랐다.
그가 갑옷을 입고, 옆구리에 투구를 낀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스? 뭐야? 무슨 일이야?”
“전령이 왔습니다. 빙벽 근처 마을에 마물이 나타났다고요. 이제 겨울이 시작이라, 겨울 사냥 전까지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가 눈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그래서 기사단을 이끌고 나가보려고 합니다.”
“알았어.”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전령은?”
“어린 소년인데, 부상이 꽤 심합니다. 란이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란이 힘주어 말했다. 전령이라고 해서 병사라고 생각했는데, 마을 사람이었구나.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바로 출발할 겁니다. 가기 전에 인사하러 온 겁니다.”
그 말에 란이 머뭇머뭇 다가가서 유스타프의 망토를 고정한 어깨장식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무사히 다녀와.”
“물론입니다.”
그러며 그가 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허리를 숙여 키스했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그의 손이 가볍게 란의 팔을 쓸어내렸다.
“막 씻어서…….”
란은 얼굴이 붉히며 말했다. 차가운 건틀릿의 감촉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유스타프는 피식 웃고 가볍게 인사한 후에 방을 나섰다.
디모디아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게 요즘 마물의 출현이 많아졌네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유스타프와 함께 서류를 보기 때문에 최근 들어 자잘한 마물 습격 수가 상승했다는 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 새끼 때문이지.’
란은 불안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빙벽 너머에 있는 어둠.
‘빼먹지 않고 계속 봉인 의식을 하고 있으니까, 이대로 안 나와 주면 안 되나. 그러면 진짜 좋을 텐데.’
책으로 볼 때 강대한 적이 나오는 건 두근거리는 일이었지만, 막상 내 앞에 실제로 그런 적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도망치지 않는 쪽이 진짜 대단해.’
유스타프도, 시나도, 루미에도―
‘나도 힘내야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서고를 마저 뒤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뭔가 단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란은 디모디아에게 바로 아이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진료실은 하늘 저택 1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란이 진료실로 들어가자 치료사가 인사를 해 왔다.
“마수가 나타난 걸 알리러 아이가 왔다고 들었는데. 부상이 심하다면서?”
란의 말에 치료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사가 란을 안쪽 침상으로 안내했다. 거기에 소년이 누워 있었다.
이제 열둘? 열셋쯤 되었을까?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 데다가 안색도 좋지 않았고, 숨 쉬는 것도 가빠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는 자가 호흡이 안 되면 그냥 끝이구나.’
“부족한 건 없는 건가?”
“네. 다행히도 세계수 연고가 남아 있어서, 그래도 이 정도인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죽었을 겁니다.”
치료사의 말에 란은 “그랬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레쉬와의 딜을 통해서 얻어낸 세계수 연고는 오래된 거라 새로 만든 것보다 효용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이 만든 어떤 약보다 성능이 좋았다.
‘바로 새살이 솔솔 나게 하니까.’
단지 비싼 값인 데다가 가진 수도 적어서 가주용으로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상황을 보니 유스타프가 사용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상태가 달라지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하게.”
란은 그렇게 말하고 침상으로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름이 뭐지?”
란의 물음에 치료사가 “밀러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고, 란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
“밀러, 지금 내 말이 들릴지 안 들릴지 모르겠지만, 힘내렴. 넌 곧 괜찮아질 거야.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어.”
속삭이고 란은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시금 치료사에게 신신당부한 뒤에 진료실을 나왔다.
모피로 단단히 몸을 감싸고 란은 2층 공중정원으로 나왔다. 정면에 눈이 쌓인 빙벽이 올려다보였다.
까마득히 높은 산은 정말로 벽과 같고―
쿠르릉―
멀리서 산이 우는 소리가 났다. 눈사태가 나는 소리라고 배웠으나, 란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네가 뭔지는 몰라도, 절대로 안 져.’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저택으로 돌아가 서고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