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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화


23. “더는…… 더는, 흑, 안 될 거 같아요…….” 하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였다. 키스하며 엉덩이를 주물럭거린 것이 당사자에겐 심히 파격적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집에 안 가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네, 네에.” “다른 새끼 앞에서 이렇게 옷 벗는 건 더더욱 안 되는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끄덕끄덕. 그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된 하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약 다시 발라 줄게요.” “흐끅, 네에…….” 무혁은 얄밉지만 계속 손이 가는 하임을 치료한 뒤 옷을 입혔다. 그것도 모자라 이불로 꽁꽁 싸매자 얼굴만 빼꼼히 드러난 그녀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저, 근데 오늘 입은 옷은 어떡하죠?”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거미 떼와 동거하고 싶지 않으면.” 하임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꼼지락거리며 일어났다. “집에 가려고요?” “할아버지 깨시기 전에 얼른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옷 바뀐 거 들키면 안 되고 또 새벽에 산도 타야 하니까…….” “임하임 씨.” 말허리를 자른 무혁이 안색을 굳혔다. 이 몸으로 또 산을 타겠다니. “아직 다 안 나은 거 몰라요? 집에서 푹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이 정도는 괜찮아요. 새벽에 가볍게 올라갔다가 오후에 쉬면 돼요.” “내 경고가 부족했나.” 덤덤히 내뱉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 고집 센 아가씨를 어쩔까. 보나 마나 아파도 고통을 꾹 참으며 혼자 산을 빨빨 돌아다닐 텐데.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해 줄까요?” “…….” 흠칫한 하임의 눈동자가 잘게 요동쳤다. 좀전의 일을 고려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루만 외출할 생각 하지 말고 쉬어요.” 하임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여유도 형편도 못 되니 선택권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무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통장 하나쯤 사라져도 생계에 작은 스크래치조차 날 일 없는 그는, 우선 그녀가 숨을 고를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내 말 들어요. 안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거니까.” “…….” “이번에도 나 돕겠다고 다친 거잖아요. 나보고 그 꼴을 편히 보라는 건 아니죠?” 그녀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으나 무혁은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실은 본래 협박과 위협, 통제 따위가 일상인 삶이다 보니 자신이 뱉은 말이 과하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누구부터 시험 삼아 조져 볼까.’ 연습 삼아 몸 좀 풀 겸 마을 내 피라미들부터 조지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 * * 다음 날. 콰앙―! 소란스러운 봉주의 등장에 삼동이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아침 일찍 무혁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이, 삼동이.” “안녕하세요, 영감님.” “시방, 내가 지금 안녕할 때가 아니여.” “…….” 뒷짐을 진 채로 터덜터덜 다가오는 봉주의 서슬 퍼런 눈이 삼동이를 쏘아보았다. “간밤에 우리 강아지가 이 할아비 몰래 기어나갔다가 들어온 것 같은데, 그건 둘째 치고 왜 우리 집 가마솥에서 니놈 옷이 나오는 겨?” “…….” “이 늙은이가 묻잖여. 엉?” 아뿔싸. 봉주의 시선을 피한 삼동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임이가 제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 알뿐, 가마솥에 옷을 숨겼다는 건 그도 처음 전해 듣는 것이었다. 유물 단지나 다름없는 가마솥은 평소에 거의 쓰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 그걸 찾으셨지. “어쭈, 이놈의 자슥이. 퍼뜩 대답 안 하냐.” “……하임이가 옷 삶아 준다고 했어요. 펄펄 삶으면 안 좋은 냄새 모조리 빠진다고 했는데.” “쓰벌, 내가 니놈 펄펄 삶아서 피를 모조리 빼 줄까?” “삼동이는 가마솥에 안 들어가는데…….” “어디 감히 이 임봉주를 속이려고 혀. 엉? 요즘 우리 손녀가 집 없는 길고양이처럼 싸돌아댕기는 이유도 너여?” 어느새 뒷집을 푼 봉주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위기를 잘 넘기면 아우로 받아 주겠다는 무혁의 말에 홀랑 넘어간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아우고 뭐고, 당장 봉주의 손에 제 생사가 달려 있었다. “간밤에 우리 하임이 꼬드겨서 뭔 짓을 한 거여.” “……같이 만화책 봤어요.” “이게 뭔 개수작이여. 얼른 솔직히 말 안 혀?” “저, 정말인데, 같이 감자전도 해 먹고 만화책도 봤어요.” “거짓말도 못 하는 녀석이 아주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먼.” 제대로 속이 뒤집힌 듯한 봉주의 얼굴이 마귀처럼 변했다. 그때, 멋대로 쳐들어와 마당을 휘젓던 길고양이가 주방 쪽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사실은 저 고양이 때문에 왔어요.” 이때다 싶은 삼동이가 가리키자 노인의 시선이 짐승에 꽂혔다. 무늬 없이 새까만 길고양이는 마을 주민들에겐 친숙한 녀석이었다. 하임이가 몇 번이고 데려다 키우고 싶다고 했지만, 봉주의 반대로 집에 들이지 못한 터였다. 어릴 적에 고양이에게 물려 파상풍에 걸린 바람에 크게 앓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삼동이가 저 고양이 키우기로 해서 하임이가 엄청 좋아했어요. 아빠, 엄마 해 주기로 했…….”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노인의 낯빛에 삼동이가 입을 다물었다. “아빠, 엄마는 얼어 죽을. 이놈이 한낱 짐승으로 우리 순진한 손녀를 꼬드긴 거여?!” 굳이 부정하지 않은 삼동이가 삐걱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임이랑 고양이 잘 키우겠습니다.” “이런 우라질 새끼를 봤나.” “…….” “삼동이, 너 말이여. 우리 강아지 손끝 하나 건드렸다간 너 죽고 나 사는 거여.” 봉주가 주름진 눈을 살벌하게 부라리며 무시무시한 경고를 날렸다. “이제 대가리 컸다고 일 쳤다간 곱게 못 뒤진단 뜻이여.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겄냐.” “……네.” “우리 하임이 데려가려는 놈은 그 전에 이 임봉주부터 넘어서야 혀. 쉽게 허락 못 한다는 말이여.” 삼동이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덤빌 자신 없으면 우리 하임이는 꿈도 꾸지 말어.” “삼동이 꿈은 소박해요, 할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봉주 할아버지를 넘어설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여느 마을 노인들과는 어딘가 확연히 달랐고, 노쇠한 나이에도 범접하기 힘든 기세를 풍겼다. ‘어쩌면 천종이 형아는 할아버지를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와 체력을 떠나서, 그는 봉주의 칼날 같은 기세를 겪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천종이 형아한테 가야 하는데. 형아 배고플 텐데. 아우로 받아 준다고 했으니까 같이 만화책도 봐야지. 근데 하임이는 거미한테 물렸다고 했는데 괜찮으려나. 하임은 어릴 적부터 벌레에 물리면 종종 발진을 겪곤 했기에 걱정이 되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넋을 놓고 있던 삼동이는 봉주가 이마에 꿀밤을 박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야. 삼동이 아파요.” “사내자식이 이깟 걸로 아프다고 지랄이여, 지랄이.” 한바탕 더 쏟아부은 봉주는 그제야 성질이 가라앉았는지 헛기침하며 돌아섰다. “하임이가 오늘따라 골골대서 이따 저녁에 닭 고아 먹을 거니께 늦지 말구 기어 와.” 삼동이가 씨익, 웃었다. 역시 임봉주 영감님. 맛있는 거 먹을 땐 항상 내 몫까지 만들어 주는 우리 할아버지. 손녀에 대한 사랑이 워낙 각별해서 그렇지, 사실 봉주는 그에게도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툴툴거리면서도 관심을 주고 보살펴 준 인연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만약 봉주가 아니었다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가 오늘날까지 무사하긴 힘들었을 터였다. 웬만한 건 뚝딱뚝딱 고치는 잔재주와 일머리도 다 봉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네, 할아버지.” 삼동이는 봉주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벌떡 일어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 형아에게 갈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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