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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화


26. 실제로 무혁은 해외 셀에서 주기적으로 차출 요청을 받아 왔고, 조직 입장에선 소모품이면서도 쉽게 폐기할 수 없는 모순적인 자산이었다. 어쩌면 실장의 역할은 사실상 무혁을 붙잡아 두는 것에 가까웠다. 사고 치지 않게 관리하고 다른 관할로 흘러가지 않게 막는 것. 그런데 무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실장도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비상이 걸렸을 터였다. 손에 쥐고 있던 가장 강력한 패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책임을 피해 갈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사고로 처리하려는 건 어떻게든 만회하려는 몸부림이겠지. ‘……이중성, 그 개새끼는 울프독 성깔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지. 이제 잡히면 곱게 죽지도 못한다는 거 알 텐데.’ 무혁은 본인을 건드린 놈들을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응징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몇 배로, 최대한 잔혹하고 고통스럽게. 가끔은 고문에도 희열을 느끼나 싶을 만큼 또라이라 동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 주여. 악마가 찐또라이를 완전히 삼키지 못하게 지켜 주소서. 가능하다면 덜 미치게 해 주시옵고, 눈이 돈 나머지 그놈들과 지옥으로 자멸하지 않게 해 주소서. 아멘.’ 뭐가 됐든 앞으로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 성기가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 * * 새벽 공기가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산기슭에 내려앉아 있었다. 밤새 내린 서리가 풀잎 끝에 엉겨 붙어 손으로 훑을 때마다 바삭한 감촉을 남겼다. 하임은 오늘 수확한 약초가 든 자루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줄기는 얼어서 힘이 빠졌고 뿌리도 예년만 못했다. 한약방에 들렀지만 서리 맞은 약초는 값이 신통치 않았고, 읍내 약재상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매번 값을 후려치는 건강원보다는 나았다. 민통선 해제 전에는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번거로워 이장님을 중간에 끼고 거래하곤 했다. 읍내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정된 도로로만 이동해야 하고, 주민들 역시 정해진 시간대에 맞춰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매번 검문소에서 신원 확인 절차를 밟는 것도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이제는 비교적 자유롭게 마을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기분이 우울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할아버지의 정기 검진 날짜도 다가오고 있었고, 빚은 아직 산처럼 쌓여 있는 터였다. ‘다른 일거리라도 찾아볼까.’ 어차피 겨울에는 뿌리 약초만 캐니 산 타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을 병행하면 어떨까 싶었다. 일거리를 고민하며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그림자가 길을 막아섰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하임이.” “……안녕하세요.” 장 씨 아저씨였다. 계절과 상관없이 늘 같은 모자를 눌러쓰는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읍내 다녀오는 길? 얼굴이 좋지 않네. 무슨 일 있는 거야?” 장 씨의 시선이 자루에서 하임의 얼굴로, 다시 느리게 내려왔다. 말투는 평범했지만 눈길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빈 자루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괜찮긴. 간밤에 서리가 내려서 수확이 영 별로였나 보네.” “……그래도 좀 전에 오늘치 금액 송금했으니까 염려 마세요.” “알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내가 최 이장님 통해서 말 좀 전해 달라고 했는데, 네가 단칼에 거절했다면서?” 장 씨가 은근히 감정 상한 티를 내며 덧붙였다. “내가 돈도 빌려주고, 상환일 연장해 달라는 부탁도 들어줬는데 사람 섭섭하게, 참.” “올해까지 빚 못 갚으면 아저씨네 밭에서 일하겠다고 했잖아요. 다 동의하셔 놓고 갑자기 왜 이러세요…….” “빚 못 갚을 거 같으면 내가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려고 그러지.” 그의 말끝이 미묘하게 늘어졌다. 하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건 약속이 다르잖아요.” “약속? 약속이란 건 형편 봐 가며 바뀌는 거야. 네가 이렇게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손 놓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안 도와주셔도 돼요. 아저씨 빚은 어떻게든 갚을게요.” 장 씨가 한 발짝 다가왔다. 그녀는 거리를 더 벌리려고 했으나 발뒤꿈치가 얼어붙은 흙에 걸렸다. “내가 돕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앞으론 오빠라고 불러. 응?” “…….” “쉬운 길 놔두고 왜 고생길을 택하는 거야. 오빠한테 시집오면 빚 갚을 필요도 없고, 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게 해 줄게.” “아니요, 싫어요.” “임 영감님도 생각해야지. 땅 판 돈으로 좋은 집도 지어 드리고, 병원비 걱정도 없게끔 매달 돈도 부쳐 드리고. 얼마나 좋아?” 본인과 결혼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는 꼬드김이었다. “젊은 아가씨 혼자 산 타는 것도 얼마나 위험한데. 나중에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리 네가 산이 익숙하다고 해도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이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장 씨의 말은 하임의 속을 더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그는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녀를 빤히 보더니 낮게 혀를 찼다. “어쨌든 난 땅 팔기로 했으니 그런 줄 알고. 올해까지 빚 못 갚으면 이자를 달마다 배로 늘리든, 나랑 결혼을 하든,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할 거야.” “그, 그런 법이 어딨어요……!” “돈 빌려준 사람 마음이지. 나야말로 그 큰돈을 아무 담보도 없이 빌려줬는데, 이 정도는 마땅하게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니면 지금이라도 임 영감님한테 갚으라고 할까?” “안 돼요. 할아버지에겐 비밀로 해 주기로 하셨잖아요!” “내 말이. 나도 임 영감님 또 쓰러지는 꼴 보고 싶지 않아서 봐주고 있는 거야.” 하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장 씨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느긋하게 웃었다. “그러니 내가 한 말 천천히 생각해 봐. 고민 생기면 언제든 이 오빠한테 얘기하고. 응?” 하임이 몸에 붙은 벌레를 털어 내듯 어깨를 휙, 틀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얼핏 흉흉해진 눈빛에 그녀의 시선이 땅으로 꺼졌다. “저는 아저씨랑 결혼 안 해요. 앞으로도 제 생각은 바뀔 일 없을 거니까 할아버지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아직 올해 다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 “……그럼 안녕히 가세요.” 도망치듯 벗어난 하임은 뻣뻣해진 걸음을 최대한 서둘렀다. 돌변한 장 씨가 저를 어딘가로 강제로 끌고 갈 것만 같아 등골이 서늘했으나, 다행히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안도한 하임은 뒤늦게 눈시울을 붉히며 훌쩍였다. 점점 북받치는 감정에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샘이 쉬이 마르지 않았다. * * * 하임은 해가 질 때쯤이 되어서야 폐분교를 찾았다. “오늘은 반찬이 변변치 않아서 죄송해요. 낮에 읍내 다녀오느라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 무혁은 오늘따라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하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난번 일로 부끄러워하는 건가 했으나, 자세히 보니 눈덩이가 퉁퉁 부어 있었다. “간밤에 춥지는 않으셨어요? 삼동이한테 핫팩 넉넉히 두고 가라고 말해 두긴 했는데.” “…….” “우선 식기 전에 드세요.” 하임은 말없이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시선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둑어둑한 실내임에도 그가 제 속내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어, 어서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던 찰나, 무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에 끌려간 하임은 얼떨결에 그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되었다. 무혁은 며칠 새 핼쑥해진 얼굴을 쥐어 올리고 빤히 살폈다. “아픈 거 다 나았다면서. 근데 얼굴이 왜 이래요.” “……뭐, 뭐가요?” “그때보다 더 아픈 얼굴이잖아. 나한테는 쉰다고 거짓말하고 내내 일한 건가?” 서늘한 어투에 하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에요. 하루 푹 쉬고, 다음 날도 늦게 일 시작했어요. 이제는 하나도 안 아파요.” “근데 얼굴이 왜 이러냐니까.” 무혁이 부어 터진 눈가를 손끝으로 미약하게 훑자 그녀의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왜 울었는지 말해 봐요.” “…….” “음? 누가 괴롭혔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한 태도에 하임은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손끝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쥐었지만, 굳게 다문 턱에는 이미 복숭아씨가 생긴 뒤였다. “어떤 놈이 우리 하임 씨를 못살게 굴었을까. 내가 좀 화가 나려고 하는데.” 무혁은 내심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고집쟁이 아가씨를 완전히 길들이려면 스스로 입을 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미남계가 먹히는 것과 별개로 하임을 보면 필요 이상의 흥미가 돋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만나 보지 못한 부류의 인간이었고, 깜찍한 외양과 행동은 따분함을 채워 주곤 했다. “음? 누가 그랬는지 말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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