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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화


31. 이제껏 무혁은 상대를 읽는 데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늘 먼저 들여다보고 먼저 판단하고 먼저 죽여 왔다. 제가 판을 깔기도 전에 간파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좆 같냐고 묻는다면, 글쎄. 대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쾌감보단 묘한 흥분이 차오르며 전신에 도파민이 돌기 시작했다. ‘씨발, 재밌잖아.’ 누군가가 제 정체를 꿰뚫고도 아무 말 없이 판 위에 올려두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대적수를 향한 기대감이랄까. 이건 위협이 아니라 초대였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와 동시대를 살아온 요원이라니, 호스트의 정체도 이보다 더 스릴 넘치고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무혁은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해 주리라 다짐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흐아아아, 추워…….” 부쩍 추워진 날씨에 하임이 오들오들 떨었다. 패딩과 귀마개, 장갑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매서운 바람이 틈으로 파고들었다. 겨우살이와 뿌리 약초를 캐러 막 산의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하임은 며칠 전에 정산금 액수가 제법 쏠쏠했던 걸 상기하며 의욕을 끌어올렸다. 약재상 대신 마을 어르신에게 소개받은 지인에게 팔았더니 값을 잘 쳐주었기 때문이다. 용돈으로 쓰라며 웃돈까지 얹어 준 고객은 다음 구매 예약까지 해 두었다. 약재상이나 한약방에 서리 맞은 약초를 넘기면 상품성이 떨어진다며 값을 깎기 일쑤지만, 민가 직거래는 오히려 반대였다.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어도 더덕이나 도라지, 칡, 황기 같은 뿌리 약초는 서리를 맞은 뒤에 캐야 쓴맛이 누그러지고 약성이 뿌리에 응축된다고들 믿었다. ‘이렇게만 팔아도 다른 일을 병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당분간은 상태 좋은 약초만 약재상에 넘기고, 서리 맞은 것들은 소개나 민가 직거래 위주로 판매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하임은 속으로 계산을 굴리며 산자락을 올랐다. 골짜기 하나를 돌자 식생이 비교적 고르게 이어진 구간이 나왔다. 뿌리 약초는 대부분 정착형이라 산삼처럼 산을 헤집듯 뒤질 필요가 없었다. 식생이 군락을 이루기 때문에, 조건만 맞으면 한 장소에서 비슷한 개체들이 반복 출현하는 편이었다. 발밑의 흙을 조심스레 걷어 내자 예상대로 뿌리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하임은 숨을 고르며 작은 삽을 움직였다. 얼어붙은 겉흙 아래는 의외로 물기가 남아 있어 손끝에 축축한 감촉이 전해졌다. 흙을 털어 낸 뿌리를 천으로 감싸 자루에 넣을 때마다 무게가 조금씩 묵직해졌다. 한창 집중하는데 갑자기 먼 곳 어딘가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람과는 다른 결이었다. “…….” 하임은 즉각 손을 멈추고 귀마개를 벗었다. 숨을 얕게 죽인 채, 청각을 한 점으로 끌어당겼다.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얼음이 갈라지는 미세한 파열음, 멀리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까지 또렷이 걸려들었다. 방금 제가 느낀 기척을 좇았지만 그 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산이 다시 제 호흡을 되찾듯 고요해지자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족제비인가? 아니면 청설모?’ 한겨울에도 활동하는 짐승들이 먹이를 찾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임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다시 허리를 굽혔다. 사각, 사각― 삽이 흙을 파고들며 규칙적인 소리만이 이어졌다. * * * 하임이 이른 새벽에 집을 나갈 때마다 무혁은 시간차를 두고 움직였다. 그는 그녀가 산의 초입을 지났을 때쯤 집을 나섰다. 반경 약 삼백 미터. 무혁이 지켜본 바로는 그 정도가 하임의 일상적인 청각 범위였다. 바람이 잠잠하거나 지형이 열려 있으면 조금 더 넓어졌고, 습도와 적설 상태가 맞아떨어질 때는 최대 오백 미터까지도 감각이 뻗는 듯했다. 무혁은 그 경계를 정확히 계산해 움직였다. 절대 그 반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리의 경계 지점에서 멈췄다가, 그녀가 더 깊이 들어간 뒤에야 다시 발을 옮겼다. 하임에게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봉주 역시 그가 새벽마다 하임을 따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집을 나서는 걸 보고도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경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적어도 하임을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인지한 듯했다. 무혁 또한 그 묵인 속에 담긴 신뢰만큼은 깨트릴 생각이 없었다. 무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임이 무탈하게 하산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등을 돌렸다. 그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포악한 산짐승이든, 사람 탈을 쓴 위험이든, 혹은 지난번처럼 독 있는 무언가에 물리는 사고든. 하임이 혼자 감당하기엔 과한 변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익숙한 생활 소음이 다시 마을을 덮을 즈음, 무혁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방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기고 숨을 고른 채,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산의 초입을 지난 무혁의 뒤통수에 낯선 인기척이 걸렸다. 이 시간에 저와 하임 말고도 누군가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 무혁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무성한 나무 사이를 파고들며 바위 뒤로 붙었다. 숨죽이고 기다리길 몇 분 후, 어스름한 새벽빛 사이로 실루엣 하나가 드러났다. 성기가 건넨 사진을 통해 확인한 얼굴, 장 씨였다. “하이고, 씨팔. 오랜만에 오르려니까 힘드네.” 장 씨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투덜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무혁이 불청객을 아니꼽다는 듯 지켜보았다. “후우. 하임이 그 계집애는 체력도 좋아.” “…….” “노인네가 몸져누웠으면 얌전히 간호나 할 것이지, 뭘 또 어린 년이 혼자서 산을 탄다고. 어휴.” 장 씨는 우연히 같은 시간에 이곳을 찾은 게 아닌 듯싶었다. 숨이 가쁘고, 걸음이 무거우며, 방향성에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 그는 마치 하임이 산에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쫓아온 듯한 낌새를 풍겼다. “그래도 애는 순풍순풍 잘 낳겠어. 어떻게든 자빠트리고 나면 이 빌어먹을 산도 발길 끊겠지.” 걸걸한 중얼거림이 귀에 꽂히자 무혁의 머릿속에서 딸깍― 하고 무언가가 끊어졌다. 저 씹새끼가. 이성도 계산도 의미를 잃은 순간이었다.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무혁이 장 씨의 팔을 비틀어 끌어당기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제압당한 장 씨의 몸이 경련하듯 튀었다. “쉿.”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선 장 씨가 눈알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뒤에서 저를 덮친 범인을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는 손쉽게 막혔다. “산 채로 멱 따이고 싶은 거 아니면 숨소리도 내지 마.” 그의 고막에 닿는 음성은 산 귀신처럼 지독히 낮고 차가웠다. 사색이 된 장 씨의 머리채를 거칠게 거머쥔 무혁이 섬뜩하게 웃었다. “이봐, 장기덕 씨.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날 같은 손날이 장 씨의 목을 내려쳤다. 그러자 그가 곧장 눈을 회까닥 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 * *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끌려온 장 씨는 눈과 입이 틀어막힌 채 묶였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며 재갈 사이로 침을 질질 흘려 댔다. 무릎 꿇린 장 씨 앞에 거만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은 무혁이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장기덕 씨. 임하임 씨 채무는 마무리된 거로 아는데, 갑자기 여기는 왜 기어들어 왔을까.” “…….” “응? 돈 받았잖아.” 무혁은 이미 성기를 통해 장 씨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다. 생명의 은인인 하임에게 해 줄 수 있는 첫 번째 보답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직접 나설 순 없었고,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자 성기에게 약간의 겁만 주면 된다고 한 터였다. 그런데 협박의 수위가 너무 약했던 걸까. “법정 이자율까지 다 계산해서 갚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경고가 말 같지 않았나?” “읍, 읍…….” 장 씨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입에 물린 천이 흐물거리다 못해 턱 밑으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쯧. 더럽게.” 살벌하게 욕을 뇌까린 무혁이 단도를 성의 없이 휘둘렀다. 칼날에 잘려 나간 천이 스르륵, 낙하하며 장 씨의 뺨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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