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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8화


68. 차량을 바꿔 타며 동선을 흩트리는 전형적인 회피 패턴은 나쁘지 않은 시도였으나, 이동 거리가 일정 범위 안에 묶여 있었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점들이 도심 한 구역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이어져 있었다. 쇼핑몰, 오피스 빌딩, 호텔. 건물 성격은 달랐지만 반경 자체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구역을 꿰뚫고 있다면 동선을 예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무혁은 능선 아래로 이어진 산길을 서둘러 내려갔다.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소음이 또렷해졌다. 봉주의 집이 있는 방향은 이미 소방차와 경찰차,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남쪽 능선 아래 도로로 내려간다.” 무혁은 우회하여 차량과 인적이 드문 길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접선 지점에 도착했다는 성기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캡틴 위치 기준으로 6분 거리입니다. “마을 회관 기준 북쪽 농로 진입로에서 기다려.” 무혁은 속도를 좀 더 높이며 지도 위에 마지막으로 찍힌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위치는 지하철역과 연결된 어느 5성급 호텔이었다. “…….” 제 예상이 맞다면 소진의 다음 동선은 버스 터미널일 터였다. 어떻게든 따라잡아서 하임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둬야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막 산 아래에 다다른 그가 미리 도착해 있던 성기의 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캡틴, 소진 누나 네트워크 살아났어요.” 성기의 말에 무혁이 바로 통신을 연결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소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 * * 무거운 물속에서 솟아오르듯 의식이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굳게 닫혀 있던 하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빛이 번졌다가 다시 모이는 걸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 초점이 또렷하게 잡히지 않은 눈동자를 천천히 좌우로 굴리던 하임은 여전히 차 안임을 인지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하루타였고, 소진은 온데간데없었다. 당황한 하임은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차는 시끄럽고 정신없던 도심을 벗어나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빽빽하게 늘어섰던 건물 대신 넓게 트인 도로와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량들이 보였다.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귓속을 두드리는 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멀리서 겹쳐 들리는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 타이어가 노면을 스치는 낮은 마찰음들이 아직도 고막을 찢을 듯 밀려왔지만, 아까처럼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조용히 인상을 찡그리는데, 하루타가 입을 열었다. “일어났습니까? 몸은 어때요?” “……아까보다는 조금 나은 거 같아요.” “지금 교외로 빠지고 있어요. 조용한 지역으로 갈 거니까 안심해요.” “소진 언니는요?” 하임은 대답 대신 쓰린 미소를 짓는 하루타를 보며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소진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요?” “일단 좀 더 잘 수 있으면 자도록 해 봐요. 안 그럼 고통스러울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알려 주세요.” 하임이 앓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하루타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순순히 아까 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미행이 따라붙었어요. 그래서 소진 씨가 갈라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제가 몰래 하임 씨를 빼낸 거고요. 추적자들은 소진 씨한테 따라붙었을 겁니다.” “그럼 언니가 위험하다는 뜻 아닌가요?” “뭐, 우리 셋 다 위험해지는 것보단…….” 하루타는 굳은 하임의 표정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이내 한층 진중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만약 하임 씨까지 잡히면 놈들은 틀림없이 하임 씨를 인질로 잡아서 울프독을 위협할 겁니다.” “…….” “우리가 안전해야 울프독이 소진 씨를 구출하든 할 테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서 기다려 보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소진 씨가 알려 준 곳인데, 지도를 보니 동해 쪽 어촌 마을인 거 같아요.” 하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 건지, 여담 마을에 있는 할아버지는 무탈한지, 무혁은 괜찮은지. 온갖 걱정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진동이 울리자 하루타가 기기를 만지작거렸다. “소진 씨가 준 블랙폰이에요. 잠깐만요.” 하루타가 버튼을 누르자 잡음이 낮게 깔렸다. 그리고 곧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루타, 당신이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실험체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웬 일본어가 들려오자 하루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상대 남자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실험체를 본부에 넘긴다면 당신의 목숨을 보장해 주겠습니다.} ‘소진 언니가 아니잖아. 뭐라고 하는 거지?’ 하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낯선 언어가 차 안을 가득 채우자 눈을 깜빡이며 하루타를 바라봤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조금도 급하지 않은 목소리였고, 마치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는 양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원한다면 당신을 수석 생체 조사관으로 승진시켜 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운전대를 쥔 하루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리 연락이 왔다는 건 소진이 결국 추적자에게 잡혔단 뜻이니, 저와 하임도 언제든 다시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실험체를 데리고 본부로 복귀하십시오.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자리에서 지켜보던 하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에요?” “…….” “하루타 씨?” 그녀는 재차 물으려다가 지나치게 차가워진 하루타의 안색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머릿속에 시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 * * -나 신철민일세. 무혁은 아까 전 통화를 떠올리며 액셀을 지그시 밟았다. -어떤 쥐새끼가 계속 내 일에 훼방을 놓는가 했는데. 자네가 NEXA 소속 진무혁이로군.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이번 일은 역시 신철민과 청명국, I.D.C가 본인들 일에 훼방을 놓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짠 판이었다. -자네가 움직이는 건 예상했네. 그래서 계획을 조금 바꿨지. 인질은 무사하다는 말은 곧 본인들의 말에 순순히 협조하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무혁은 인질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연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상대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접전 장소로 향하는 내내 머리를 날카롭게 굴렸다. 어쨌거나 하임이 신철민 손에 있다면 I.D.C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기에 어떻게든 구출해 내야 했다. “어? 캡틴.” 내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성기의 목소리가 무혁의 상념을 깨트렸다. “좀 전에 소진 누나 블랙폰 신호가 잠깐 잡혔던 거 같습니다.” “잡힌 거 같다니.” “1초 정도 떴다가 바로 끊겼습니다. 분명 신호가 찍혔었던 거 같은데…….” 성기의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아주 찰나라 본인이 잘못 본 걸 수도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누군가 블랙폰 신호까지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 무혁의 눈빛이 천천히 식어 갔다. 머릿속에서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빠르게 스쳤다. 소진의 성격상 추적이 붙은 상태에서 하임을 그대로 끌고 다닐 리는 없었다. 누군가를 떼어 내야 한다면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잡힌 쪽은 소진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루타와 하임은 아직 추적을 피해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치는.” “동해 방향 고속 도로입니다.” “…….” 동해 방향 고속 도로라. 무혁은 신중히 고민했다. 말마따나 성기가 본 게 착각일 가능성도 있었다. 고작 1초 남짓 잡혔다가 사라진 신호였다. 로그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고, 잡음이 찍힌 걸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잘못 판단하면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사이 하임이 I.D.C 손에 넘어가면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자꾸 걸렸다. 소진의 블랙폰 신호가 우연히 찍혔다가 사라졌다고 보기엔 타이밍이 묘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장 본부에 접전 장소 좌표 전송해. 요원들은 거기로 보내고 우린 따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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