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74화
74.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와.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이야.”
“상관없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까? 또 혼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소립니다.”
단호하고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 나갔다. 그러나 평소였으면 기가 죽은 채 물러섰을 하임은 오늘따라 뜻을 굽히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을게요. 데려가 주세요.”
“임하임.”
하지만 무혁 역시 만만치 않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민간인에 불과한 그녀를 앞세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이건 단순한 숨바꼭질이 아니야.”
“저도 쉽게 보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소진 언니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서 그래요. 저 보호하겠다고 언니가 위험한 일에 뛰어든 거잖아요.”
“그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저도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네?”
“우리 요원들도 능력은 출중하니 걱정할 거 없어. 이 얘기는 그만하죠.”
매몰차게 돌아선 무혁에게 연달아 보고가 날아들었다. 예상한 대로 신철민이 호텔에 진입했고, 호텔 측은 보안 점검을 이유로 일부 층의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는 보고였다.
-CCTV 접근 권한도 막혔습니다. 내부 서버가 외부망이랑 분리돼 있어서 원격으로는 확인이 안 됩니다.
“몇 층.”
-상층부 VIP 구역입니다. 전용 엘리베이터로만 이동 가능하고, 일반 투숙객 동선이랑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사리문 무혁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명분 없이 들이닥치면 그 순간부터 작전은 말아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상층부에서 상황이 터지면 아래 일반 구역까지 번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고, 투숙객을 사이에 두고 총구가 오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더더욱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신철민은 상층부에 없을 수도 있다. 대놓고 통제를 걸어 놓는 것으로 시선 끄는 것일 수도 있어. 미끼나 교란에 넘어가지 말고 일반 구역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열어 둬.”
-조정실 쪽에서도 상황 인지했습니다. 협조 요청 들어오면 바로 개입하겠다고 합니다.
무혁이 피식 웃었다. 결코 좋아서 웃는 게 아니었다.
“저, 캡틴.”
함께 무전을 듣고 있던 성기가 하임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그는 내내 무혁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넸다.
“지금 상황에선 하임 씨가 정말 도움이 될 것 같긴 합니다.”
“남성기.”
“조정실 인력까지 와 봤자 비슷할 텐데, 하임 씨라면…….”
“……뒤지고 싶어?”
신랄한 눈빛과 살벌한 음성에 성기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무혁은 내내 제게 눈을 떼지 않는 하임을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이제는 대놓고 엿듣겠다는 양 고집스럽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데다가, 저를 설득하는 성기를 말릴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표정이었다.
“하.”
그저 기가 막힌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뻔뻔할 만큼 단단한 표정이 어처구니없게도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말 안 듣네.’
확 잡아먹어 버리고 싶게.
마음 같아선 침대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물고 빨고 싶었다.
무혁의 안색이 미세하게 누그러진 틈을 놓치지 않은 성기가 용기 내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나머지 놈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아예 캡틴 옆에 두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
“어쩌면 징그러운 조정실 놈들보단 하임 씨가 일당백 역할…….”
“씹새끼가. 좆도 없는 민간인 데려다 쓸 만큼 현장 요원들이 좆밥으로 보여?”
“아, 형.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작전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개소리 집어치우고 정신 똑바로 차려.”
눈빛으로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성난 기류에 성기가 한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임에게서 좀 전과는 뭔가 다른 기세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좆도 없는 민간인이요?”
“…….”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한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무혁은 낮게 혀를 차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씨발. 잘 들어도 너무 잘 들어.
하임의 눈가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한마디 더 쏟아 내고 싶었지만 철없이 징징거릴 때가 아니었다.
“땅속에서 무혁 씨 찾아냈던 것처럼, 소진 언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
“……아니에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녀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키고는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무혁은 유난히 단단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휙―
“꺅―!”
순식간에 그의 어깨 위로 들쳐 올려진 하임이 버둥거리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찰싹―
“가만있어.”
그녀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내려친 무혁이 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 옆에서 한시라도 떨어지거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더 늘어났다간, 진짜 알몸으로 침대에 묶일 줄 알아.”
“……!”
그렇게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성기가 실로 어이가 없다는 양 중얼거렸다.
“뭐야. 울프독 다루기 존나 쉬운 거였네.”
토라지면 되는 거였어.
물론 제가 그랬다가는 구토를 쏟으면서도 왜 처맞는지 납득하고 있겠지.
병원 침대에서 눈 뜨자마자 반성문부터 쓰고 있을 미래를 짐작한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호텔 로비는 겉보기엔 평온했다.
샹들리에 아래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고, 정갈한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공기 어딘가에 묘한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
무혁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장비는 모조리 벗어 던진 상태였다. 얇은 맨투맨 스웨터에 슬랙스, 그 위에 걸친 코트. 선글라스까지 더해지자 어디서 봐도 작전 요원이 아닌, 그냥 돈 좀 쓰는 투숙객으로 보였다.
옆에 붙어선 하임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화장, 헤어 스프레이로 바꾼 머리 색에 이어 서클렌즈라는 것도 껴서 최대한 모습을 바꿨다. 무혁과 커플 선글라스까지 장착한 도시적인 차림으로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손끝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귀 안쪽이 뻐근한 탓에 머리가 어지러워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이어 갔다. 특수 귀마개가 소리를 적당히 눌러 주고 있었기에 맨 귀로 다니는 것보단 훨씬 버틸 만했다.
프런트 앞에 멈춰 선 무혁이 유창한 영어 발음을 구사했다.
{체크인 부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권 주시겠습니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여권을 내밀었다. 오는 동안 본부에서 급하게 새로 발급받은 위장용 여권이었다. 다행히 직원은 별 의심을 하지 않는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놀림이 매끄러웠다.
-예약 정상 등록돼 있습니다. 해외 여행사 통해 들어간 거라 시스템상 문제없을 겁니다.
무혁은 성기의 무전을 가만히 들으며 주위 기류를 살폈다. 한국계 미국인 고객으로 등록해 둔 거라 그에 맞는 적절한 연기가 필요했다.
{스위트 룸 커플 패키지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고층 객실로 배정해 드렸습니다.}
곧 카드 키와 함께 정중한 안내가 이어졌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캐리어는 저희가 옮겨 드릴까요?}
{캐리어가 하나뿐이라 괜찮습니다. 식당은 몇 층입니까?}
{중식 레스토랑은 3층, 360 루프톱 뷔페는 2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라운지도 따로 있습니까?}
{로열 스위트 룸 고객께서는 18층에 있는 VIP 라운지도 이용 가능하십니다.}
{피트니스는 5층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실내 골프장은 4층, 스파 및 사우나 이용을 원하시면 6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무혁은 호텔을 이용하는 투숙객들이 할 법한 질문을 던졌다. 여러 층에 접근해도 의심받지 않도록 층수를 짚어 보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정리했다.
{호텔이 생각보다 크군요. 알겠습니다.}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무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하임의 허리를 감싸며 몸을 돌렸다.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도 그녀를 제 쪽으로 당기며 귓가에 찐득하게 속삭였다.
“직원 없는 곳에서도 어색하게 굴어선 안 돼.”
쪽―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에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수줍게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 하임이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