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75화
75.
고층에 내린 두 사람은 우선 배정받은 객실로 향했다. 귀걸이를 만지는 척하며 귀마개를 뺀 그녀는 주변 소리를 귀에 담았다. 복도는 고요했고, 대부분의 객실 내에선 평범한 말소리와 물소리, 자잘한 생활 소음만 들릴 뿐이었다.
로열 스위트 룸은 복도 끝에 있었다. 하임은 긴 복도를 최대한 느긋하게 걸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무혁도 중간에 그녀를 멈춰 세우고는 워커 부츠 끈을 묶어 주며 시간을 벌었다.
“…….”
어느덧 객실 앞에 멈춰 선 무혁이 돌아보자 하임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그가 알았다는 듯 카드 키를 찍고는 스위트 룸 문을 열었다.
* * *
무혁은 객실에 도청 장치나 몰래카메라가 없는지부터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야 무전을 주고받았다. 하임은 호화스러운 스위트 룸에 감탄할 새도 없이 벽과 카펫 바닥 곳곳에 귀를 대 보았다.
조용한 산골보다는 들을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두꺼운 벽과 바닥, 층마다 분리된 구조 탓에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았으나, 안쪽에서 울리는 것들은 제법 또렷하게 걸려들었다. 건물 자체가 외부 소음을 잘 차단하고 있어 불필요한 잡음에 귀가 시달릴 일은 없을 듯했다.
“……!”
객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남사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란 하임이 황급히 귀를 뗐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무혁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임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로 넘겼지만 눈치 못 챌 무혁이 아니었다.
“왜. 누가 섹스라도 하고 있어?”
“…….”
“누군지 몰라도 부럽네. 난 내 여자 마지막으로 품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갑자기 코트를 벗은 그가 소매를 접어 올리며 다가오자 그녀가 당황한 낯으로 뒷걸음쳤다.
“저, 저희 지금은 그럴 때가…….”
무혁이 피식 웃었다.
“아주 정예 요원 다 됐네, 우리 하임이.”
금세 거리를 좁힌 무혁이 등허리를 바짝 당겼다.
“어차피 바로 나가서 뒤져 봤자 의심만 살 겁니다. 잠시 시간 끌 동안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이내 입술이 맞물리자 하임이 순순히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말마따나 스킨십한 지가 꽤 되었다 보니 괜스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사다난한 일을 겪는 동안 무혁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는지, 얼마나 초조하고 무서웠는지.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그녀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무혁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혀로 입안을 쓸며 깊고 진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어느새 옷 틈을 비집고 들어온 손이 브래지어 끈을 풀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혁은 커다란 손으로 둥글게 굴리다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양 낮게 읊조렸다.
“그새 살 빠졌네.”
그는 변화를 확인하려는지 갈비뼈와 등허리, 골반과 허벅지까지 느른히 어루만졌다.
“……흣.”
“상처 때문에 실컷 만질 데가 가슴밖에 없잖아.”
비딱한 심경을 대변하듯 젖꼭지가 꼬집히자 하임이 움찔했다.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경으로 매달리자 한층 거칠어진 키스가 되돌아왔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 성기에게서 무전이 왔다. 무혁은 짜증을 억누르고는 보고에 집중했다.
-캡틴, CCTV 서버 접근 성공했습니다. 신철민으로 보이는 인물을 포착했는데 수행원 없이 단독입니다. 대형 캐리어 하나 끌고 이동했고, 엘리베이터 탑승 직후 구간에서 영상이 끊겼습니다. 호텔에서 일부러 블라인드 건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CCTV가 다시 잡히기까지 공백이 몇 초 정도 있는데, 그 시간을 계산해 보면 최상층까지 올라간 건 아닙니다.
성기는 신철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나서야 CCTV 화면이 다시 켜졌다고 했다.
-10층 아래에서 내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상 올라갈 시간은 안 나와요.
역시 상층부를 통째로 막아 놓은 건 시선을 끌기 위한 장치였을 가능성이 컸다.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 무혁의 시선이 한 번 가라앉았다가 올라왔다.
“상층부 들어간 팀, 계속 그쪽 붙잡고 있으라고 해. 객실 하나라도 더 뒤지는 척하면서 호텔 쪽 시선 전부 그쪽으로 묶어 놔.”
-예, 알겠습니다.
그가 저를 멀뚱히 올려다보는 하임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시간 오래 끌어. 우리는 아래로 간다.”
* * *
10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성기가 CCTV를 조작하는 틈을 타 두 사람은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하임은 곧바로 호흡을 고르고 주변 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담았다. 층 하나를 통째로 훑으며 지나치는 것이 없게끔 청각을 곤두세웠다.
객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물소리, TV 소리까지. 평범한 호텔이라면 어디서든 들릴 법한 소음들이었다. 하임이 고개를 젓자 무혁이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9층, 8층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이상했다.
‘왜 안 느껴지는 거지.’
생각이 길어질수록 귀가 더 예민해졌다. 뭐라도 잡아야 하는데……. 이대로 지나쳤다가 중요한 걸 놓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렇게 7층을 지나 6층으로 향하니 콸콸 쏟아지는 듯한 물소리가 섞여 들었다.
“물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복도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성기와 뭐라 무전을 주고받던 그는 신호를 주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복도로 나온 하임은 객실 쪽에서 별다른 기미가 느껴지지 않자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스파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물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그때.
“…….”
바로 옆, 직원용 통로로 이어진 철문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하임이 황급히 무혁 쪽을 돌아보는 동시에 철문이 열리며 중년의 하우스키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안녕하세요.”
카트를 끌며 인사를 건넨 하우스키퍼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하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귀걸이를 떨어트린 것 같아서 찾고 있었어요.”
그녀는 무혁이 몸을 숨긴 코너 방향에서 눈을 떼며 순발력 있게 대꾸했다.
“어머, 그러시군요. 프런트에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음, 복도에 없는 걸 보니 스파 탈의실에 떨어트렸나 봐요.”
“그럼 스파 직원한테 말씀해 보시겠어요? 분실물은 거기서 관리하니까 직원이 도와드릴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하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스파에 들어갔다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걸으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여전히 뒤쪽에 쏠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스파 이용하시겠습니까?”
“아, 네. 탈의실이 어디…….”
“우선 객실 넘버와 성함부터 알려 주시겠습니까? 객실 키는 가지고 오셨을까요?”
아차, 여기서도 객실과 이름을 확인하는구나. 난생처음 호텔에 와 본 탓에 그녀에겐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어찌해야 하나 싶던 차에 등 뒤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여유로운 태도로 직원에게 키를 건넨 무혁이 하임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2022호. 마크 송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혁은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다. 하임은 잠자코 있다가 직원이 건네는 수건과 팔찌를 받아 들었다.
{가자.}
“…….”
이 급박한 상황에 스파라니. 뭔가 일이 꼬여 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때였다.
‘……어?’
문득 귓가에 걸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하임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탈의실 방향이었다. 뭔가 느꼈다는 걸 알아챈 무혁이 널찍한 등을 살짝 굽히며 속삭이듯 물었다.
“왜 그래요.”
“방금 저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