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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화


83. [이중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무혁은 며칠 전에 갑작스레 날아든 보고를 떠올리며 복도를 걸었다. 중성은 조사 중이던 구치실에서 감시를 받던 상태였고, 정해진 시간에 확인하러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입안을 심하게 훼손한 흔적. 흘러내린 피가 기도를 막으면서 질식으로 이어졌다는 소견이 내려졌다. 현장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결론 역시 덧붙일 여지가 없었다. 자해가 사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걸로 끝인, 초라한 죽음이었으나 남겨진 게 하나 있었다. 문장도 설명도 없이 숫자만 적힌 짧은 메시지였다. 군사 분계선 인근으로 보이는 좌표를 확인하는 순간, 무혁은 내심 저를 괴롭혔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그 좌표가 가리키고 있던 건 최이연과 이무열의 시신이 묻힌 위치였다. 끝까지 입을 다물던 놈이 마지막에 남긴 건 그것 하나였다. 변명도 해명도 없이 그저 위치만 던져 놓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동료의 배신으로 억울하게 죽은 두 요원은 결국 유골의 형태로 돌아왔다. 역시 외부에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았기에, 죽음 역시 조용히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걸린 장례식도, 언론에 실릴 부고도 없었다. 대신 내부에서 간단한 추모 절차가 진행됐고, 정리된 유골은 각자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그게 그들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무혁은 매번 그랬듯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직업이었다. 죽음이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는 순간, 감정은 일정 선 아래로 눌러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묘하게 남는 게 있었다. 놓치지 말았어야 할 것을 끝내 놓쳤다는 감각, 그리고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실에 대한 불쾌한 여운이 말로 꺼낼 수 없는 형태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중성의 사망 소식에 신철민의 입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어떻게든 본인의 책임을 덜기 위해 청명국에게 최대한 덮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믿을 무혁이 아니었다. 그는 타고난 분별력으로 핵심 정보만 걸러내고, 남다른 심리 싸움으로 신철민의 입을 열게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조사가 종료되었다. 무열과 이연의 추모 절차 직후, 신철민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다. 공식 문서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사건과 연결된 모든 흔적 역시 정리됐다. 처벌을 위한 재판이나 발표 따윈 없었다. 존재를 입증할 만한 단서 자체가 사라진 셈이었다. 대신 그는 비공개 구금 시설로 이송됐다. 위치도 소속도 드러나지 않는 장소였다. 외부와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그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제한됐다. 형식상으론 생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에서 제거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 그게 신철민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청명국과 I.D.C 역시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정리됐다. 일부 라인이 내부적으로 처리됐다는 정보만 흘렀을 뿐, 조직 자체는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하루타 또한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가 되었다. “캡틴, 오늘 승진 기념 회식 어떠십니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짧게 떨어진 제안에 시선이 몇 개 더 따라붙었다. 공식적으로 무혁은 팀장 직급을 넘어 한 단계 위로 올라갔다. 현장 지휘권과 열람 권한이 더 넓어진 자리였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는 일의 성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참이었다. 흥미가 없는 그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됐으니까 니들끼리 먹어.” 공중을 가르며 날아간 카드를 받아 낸 정환이 물었다. “에이, 주인공이 없는데 저희끼리 뭐 하러 갑니까?” “한도 없으니까 알아서들 써.” 이어진 말에 내심 혹한 후배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본인들끼리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세 분위기가 풀리면서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무혁은 본인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쪽 다리를 길게 꼬아 책상 위에 걸친 채, 한쪽에 펼쳐 둔 카탈로그를 끌어왔다. 고가 주얼리 브랜드에서 보내온 신상품 카탈로그였다. 광택이 살아 있는 페이지마다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조명 각도까지 계산된 사진들 속에서 보석들이 과하게 반짝였다. “…….” 무혁의 눈길이 그 위를 천천히 훑었다. 대충 넘기는 게 아니라 하나씩 뜯어보는 시선이었다. 디자인의 선, 크기, 색감까지 자연스럽게 비교해 가며 머릿속 어딘가에 기준을 두고 고르는 기색이었다. 하임에게 어울릴지를 보는 눈이었다. 그사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를 흘끔거리던 동료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여성 주얼리 카탈로그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울프독의 모습이 낯설다는 반응이었다. 누군가는 피식 웃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입 모양으로 ‘저게 뭐냐’는 듯 물었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의 기행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조용히 고개를 젓는 기색도 섞여 있었다. 언제부턴가 묘하게 ‘사람’다워진 듯한 무혁의 변화는 매일 주변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당사자는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주얼리 세트를 발견한 그의 동공에 이채가 어렸다. * * * “하아, 하아―” 주말 대낮부터 기진맥진한 하임이 침대에 고개를 파묻은 채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흣.” 무혁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몸 곳곳에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겼다. “잘 어울리네.” 맨몸에 무혁이 준 주얼리만 걸친 하임은 마저 호흡을 고르며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했다. 프러포즈를 받아 감동에 겨워서 흘린 눈물 반, 예비 신랑의 정력에 시달리며 흐느낀 눈물 반. 눈가가 퉁퉁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오히려 귀엽다는 양 통통한 눈두덩이에도 입을 맞췄다. “아까 하려던 말 뭐였어.” “뭐였더라…….” 하임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서프라이즈로 프러포즈를 하려던 차에 할 말이 있던 터였다. “아, 맞다. 소진 언니요. 아까 통화했는데 언니가 조만간 바빠질 것 같대요. 그래서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하임이 밉지 않게 흘겨보자 무혁이 낮게 웃었다. 평생 친구는 삼동이뿐이었다 보니 그녀는 동성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꺼워하고 있었다. 특히 사고 이후엔 소진을 더 믿고 의지했고, 소진 또한 하임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서로를 위해 한 번씩 몸을 던진 사이여서 그런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듯한 두터운 우정이 싹튼 터였다. “소진 언니가 저녁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는데. 가면 안 돼요?” “그래, 가자.” 무혁은 샐쭉해져서 더 귀여운 하임의 입술을 장난스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소개해 줄 사람이요?” “가 보면 알 겁니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그가 쉽게 말해 주지 않으리란 걸 예상했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갈 준비해야겠…… 꺄악―!” “자꾸 뒷모습 보이면 잡아채고 싶어진다고 했을 텐데.” 무혁에게 붙잡힌 하임은 오늘도 구석구석 씻겨지고 나서야 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백화점부터 들른 두 사람은 양손이 무거워진 채로 소진의 집에 도착했다. “하임 씨, 왔어요?” 새 보금자리로 이사한 소진의 동네는 두 사람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들뜬 얼굴로 들어선 하임은 소진이 남자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다음이었다. 동거남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임은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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