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84화
84.
“……하루타 씨?”
분명 제가 알던 그 얼굴이었다. 하임은 하루타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타 씨, 무사하셨던 거예요? 저는 잘못되신 줄 알고…….”
“쉿.”
멋쩍은 미소로 그녀를 맞은 하루타가 장난스레 검지를 본인 입술에 갖다 대었다.
“하루타라는 사람은 죽었어요.”
“…….”
“만나서 반가워요, 하임 씨. 전 하재성이라고 합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앉아요, 하임 씨. 배고플 텐데 우선 밥부터 먹는 거 어때요?”
소진이 안내하자 무혁이 하임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내내 어리둥절한 채로 하루타를 신경 쓰던 하임은 간략하게나마 전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된 그를 무혁이 몰래 빼냈고, 그 이후의 처리 역시 전부 무혁의 손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고 했다.
하루타가 살아남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고 당시, 그가 시간을 벌어 준 덕에 하임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 무혁이 개입한 것이었다.
대신 조건은 명확했다. 기존 신분은 완전히 폐기됐고, 공식적으로는 이미 사망 처리된 상태였다. 하루타라는 이름은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다시는 사용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재성’이라는 새 신분이 부여됐다.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정리됐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과거와 이어질 가능성은 철저히 차단됐고, 눈에 띄는 행동 역시 최대한 피해야 했다. 평생 감시를 당하며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더 이상 I.D.C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하임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갔다.
그제야 놓치고 있던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였다.
“…….”
휠체어를 탄 하루타, 아니 재성의 다리는 무릎 아래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를 좀 다쳐서 당분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고 당시 다리가 크게 손상됐고, 신경까지 영향을 받은 상태라고 했다. 현재로선 기능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재활을 통해 회복될 가능성도 남아 있단다.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등신인 척은 다 하더니 진짜 등신이 되면 어떡해? 으휴.”
“그래도 산 게 어디야.”
소진이 등짝을 내려치자 재성이 별일 아닌 척 장난스레 웃어넘겼다. 전보다 꽤 친밀해진 듯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하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지금 두 분이 여기서 같이 사시는 거예요?”
“그렇게 됐어요. 난 디자이너가 되려고 퇴사한 건데, 간병인이 웬 말이에요? 하임 씨 간호할 때나 좋았지, 다 큰 남자 보살피려니 징그러워 죽겠어요.”
그래도 무혁이 제안한 금액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며 그녀가 덧붙였다. 재성을 바라보던 하임의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죄책감이 서린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멋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임 씨 때문이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 또한 대가를 치른 것뿐입니다.”
“…….”
“내가 저지른 과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 열정에 치우쳐 인간의 존엄성 따윈 무시하고 살았던 시간들을 참회하듯,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둡게 내려앉았다.
수치와 결과만을 좇으며, 눈앞에 놓인 대상이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무감각해졌던 날들이었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선택들이, 지금 와서는 지워지지 않는 형태의 후회로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난 내가 한 일들이 다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담담한 어조였지만 가볍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인간답게 살아 보려고요. 언젠가 꼭 I.D.C의 실체를 고발하고 생을 마감할 겁니다. 하임 씨에게도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못 했고, 어쨌든 생체 조사관 출신으로서 하임 씨 부모님에게도 속죄를…….”
“저는 괜찮아요.”
하임이 흐릿한 미소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저한테 직접적으로 나쁜 짓을 하신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때 목숨 걸고 도와주셔서 제가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얘기해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재활 열심히 하셔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하임 씨를 위해서라도 꼭…….”
“누구를 위해서?”
옆에서 가만히 듣던 무혁이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자 재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실언했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굳어질 뻔한 찰나, 소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끼어들었다.
“왜 애를 또 쫄게 만들어. 그만들 하고 얼른 먹으라니까.”
소진이 준비한 메인 메뉴는 하임이 좋아하는 약돌 돼지 고추장 불고기였다. 하임이 사 온 디저트로 티타임을 가진 뒤, 잠시 무혁이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소진이 뒷정리를 하러 간 사이에 하임은 재성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던 재성이 물었다.
“요즘 몸 상태는 어때요? 청력엔 별다른 문제 없어요?”
“네, 괜찮아요. 오히려 훨씬 더 살 만해졌어요.”
“다행이군요.”
그가 잠시 말을 고르듯 시선을 낮췄다가 다시 들었다.
“지금 상태가 안정적이라고 해서 완전히 완치된 건 아닐 겁니다. 하임 씨는 선천적으로 청각 공명에 민감한 구조를 갖고 태어난 거라, 자극이 쌓이면 언제든 다시 예민해질 수 있어요.”
“…….”
“특히 한번 과부하를 겪은 뒤에는 신경이 이전보다 더 쉽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설명에 하임이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수술이랑 회복 치료를 받은 덕분에 감각이 정리된 상태지만, 우리의 몸은 원래 쓰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어요. 예전에 들리던 범위를 계속 떠올리거나, 억지로 더 들으려고 집중하는 순간 신호가 다시 쏠려 뇌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그래서 습관이 중요합니다. 예전처럼 귀를 여는 방식은 의식적으로 끊어 내야 해요. 작게 들리는 소리나,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극은 못 들은 척 넘기도록 해요. 그걸 잡아내려고 할수록 남아 있는 감각 세포들이 다시 민감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할 겁니다.”
“그렇군요.”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들리는 선에서 멈추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스스로 그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재발을 막는 데 제일 중요한 방법이에요.”
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요. 내 지식과 경험이 닿는 선에서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이내 둘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하임은 그의 조언을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분명하게 와 닿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선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조금 덜 듣는 대신 덜 아파도 된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꽃샘추위가 물러난 뒤라 그런지, 산자락에 내려앉은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산길 초입에 차를 세운 무혁은 말없이 시동을 껐다. 먼저 내린 그는 주변을 한 번 훑은 뒤, 반대편 문으로 돌아갔다. 봉주가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확인할 이유도 없는 자리였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이어진 흙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발밑에서 마른 흙이 가볍게 부서졌다. 길이라고 부르기엔 희미한 흔적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듯한 한적한 터가 나타났다.
잡목 몇 그루가 듬성하게 서 있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른 풀잎이 부딪히며 낮게 사각거렸다. 그 한쪽, 눈에 띄지 않게 자리한 곳이 있었다.
봉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낮고, 그렇다고 평지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하게 다져진 땅이었다. 그 앞에는 작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표식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소박했다.
이름도, 날짜도 없었다. 그저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자리였다.
“…….”
그 앞에 멈춰 선 봉주가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보자기를 풀어 막걸리 한 병과 소박한 음식을 꺼내 놓는 동작이 더없이 담담했다. 천천히 상을 차리듯 내려놓은 뒤, 그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그 자리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