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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1화. 불길한 의뢰


제국의 행정 체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건군주들이 다스리는 봉건령. 그리고 시민들에게 선출된 의회가 황제의 이름 아래 자치하는 도시령. ​ 물론 그들이 말하는 충성이 모두 같은 의미일 리는 없었다. ​ 봉건군주들은 자체적인 사병을 운용했고, 조세와 행정에 대한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말로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 힘은 언제든 황제를 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언제나 제국의 불안 요소였다. ​ 특히 여러 번의 내전을 겪은 황실의 입장에선, 봉건영주들이란 잠재적인 반란군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믿을 만한 충신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 하지만 황제의 불신은 다시 봉건영주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황제의 칼이라 불리는 제국 기사들이 영지 내의 도시나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렸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심한 경우에는 영지를 경유하는 기사들을 몰래 처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물론 그 대가로 영지의 치안은 온전히 영주의 몫이 되었다. 마물의 습격이든, 도적의 약탈이든, 반란의 조짐이든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차라리 황제의 주구가 없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이 있었다. ​ 황제 역시 제국 기사의 손실을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제국 기사들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제국 기사단 본부는 기사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내렸다. ​ 봉건령은 최대한 우회할 것. 부득이하게 지나야 한다면, 확실하게 황제에게 충성하는 영주의 땅만 경유할 것. ​ 그것은 제국이 하나의 나라로 묶여 있으면서도, 결코 하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 견원지간. 기름과 물. 그게 현재의 귀족과 황제, 혹은 제국 기사들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헌데 조금 의외의 상황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 “으음…….” ​ 우리는 눈앞에 놓인 의뢰서를 보고 깊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유려한 문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평범했던 의뢰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다. ​ 이 의뢰서는 우리가 아티젠에 도착해서 열락의 밤을 보내고 그동안 돌아다니며 쌓였던 피로가 거의 풀릴 때쯤 전달됐다. ​ 제국 본부에서 분배되는 의뢰는 특정 인물을 지목하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각자 지역에서 생기는 문제나 본부에서 내려보낸 의뢰를 지부가 가지고 있다가 방문하는 기사들한테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 우리도 그렇게 개척촌의 실종 사건을 해결했고, 그 전에는 강의 다리를 막고 있는 마물 퇴치를 해결했었다. ​ 하지만 이건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 직접 전달되었다. 친절하게 지부의 심부름꾼이 우리이게 직접 전달해준 이 의뢰서는 티옹 백작이라는 의뢰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 “두 사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 “후배님…, 아니 카엘. 처음 들어요.” ​ 아티젠이 서남부에 위치한 도시니, 이 티옹 백작이라는 사람도 인근의 영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연스레 북부 출신인 그녀는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엘레노아도 동남부 출신이니……. ​ “몇번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정말?” ​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뢰서를 들어올렸다. ​ “푸른 매가 비상하는 가문 문장. 과거 황제의 정복전쟁에서 선봉장에 서서 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은 문장이죠. 이들은 친 황제파로 분류된 귀족이긴 해요. 다만 전 티옹 백작의 말년에 황제의 권위가 불안해지면서 내전이 여러번 터졌을때 침묵했다고 하는데….” ​ 엘레노아는 살짝 루크레치아를 곁눈질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다만 그 일에 대한 얘기는 분분해요. 당시에 서남부에 있던 반란군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침묵했다고 하는 자들도 있고 황제의 적이 바로 옆에 있는데 침묵했다는 자들도 있고…….” “으음…. 내용은…….” ​ 의뢰서의 봉인을 해제하고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의외로 내용응 싱거웠다. ​ “지부로 와서 들으라는데?” “뭔가 평범한 의뢰는 아니네. 카엘군 어떻게 할거야?” ​ 그녀들의 시선이 의뢰서에서 내게로 향했다. ​ “평범한 의뢰는 아닐거에요. 카엘. 귀족들간의 일에 끼어드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조심해야해. 티옹 백작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황제의 충성파 귀족이지만……. 귀족은 귀족이야” ​ 각자 귀족의 정점에 위치에 있었던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니 꽤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그냥 의뢰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얘기를 들어보는 것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일단 얘기정도는 들어보자.” ​ ​ ​ ​ ​ * * * * * ​ ​ ​ ​ ​ “반갑군. 카엘 경. 엘레노아 경. 루크레치아 경.” ​ 지부에 온 우리는 평소에 자주보던 접수원이 아니라 아티젠 지부장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 짙은 녹색의 기사 정복을 입고 있는 지부장은 옷이 터질듯한 근육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 “내 이름은 젝트. 그냥 지부장이라고 불러도 되고 젝트경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네.” “음. 알겠습니다. 지부장” ​ 그는 씩 웃으며 큼지막한 손에 아주 작고 아름다운 찻잔을 하나씩 우리 앞에 내려놓고 홍차를 따라주었다. ​ “자. 얘기에 앞서 마셔보게. 제국 남부에 자생하는 종으로 만든 홍차인데 약간의 독특한 산미가 일품이지.” ​ 그는 그렇게 얘기하곤 의자에 앉아 찻잔을 조심히 들어올려 홀짝였다. 그의 커다란 덩치 때매 의자가 굉장히 비좁아 보였다 거기다가 손에는 아주 작은 찻잔까지 들려 있었으니 그 광경이 꽤 유쾌하게 보였다. ​ “으음! 아주 좋군. 그래. 자네들이 가져온 의뢰서는 내가 보낸 것이 맞네. 황제폐하의 신실한 신하중 하나인 티몽 백작이 직접 의뢰한 일이지.” “어떤 의뢰일까요?” “티몽 백작에겐 1남1녀의 자식이 있네.” ​ 그는 손뼉을 가볍게 쳤고 곧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탁자에 두개의 초상화를 내려놓고 갔다. 어딘가 살짝 거만해보이는 남자와 쾌활하게 웃고 있는 말총머리의 여자가 그려진 두 초상화. 아마도 이 두 명이 티몽 백작의 아들과 딸인 것 같았다. ​ “두 사람은 서남부 젊은 귀족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대로 행방불명. 당시 모임 주최자는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티몽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고 증인들도 다수가 존재하네.” ​ 납치. 가장 먼저 떠올랐다. ​ “당시 두 사람이 탄 마차는 티몽 백작이 붙인 호위들이 있었다고 하네. 또한 모임지로부터 백작의 영지까지는 치안이 안정적인 곳이라 단순한 도적이나 마물의 습격은 아닐 가능성이 높네.” “그렇다면 귀족들간의 분쟁인가요?” ​ 엘레노아의 질문에 지부장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그걸 이제 알아보는게 자네들의 일이지. 티몽 백작은 이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걸 원했네. 그래서 지부로 의뢰를 넣었고 나는 우리 지부를 이용하는 기사들중 가장 적합한 자들에게 그걸 알렸지.” ​ 그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바로 자네들. 한 때 그들의 일원이었고 누구보다 귀족들의 생리를 잘 알고 그들의 곁에 스며들어갈 수 있는…….” “제국 기사는 귀족간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게 기본적인 원칙 아닌가요?” “으음. 카엘 경.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네. 하지만 티몽 백작은 황제 폐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몇 안되는 귀족이야. 그런 백작의 의뢰를 우리가 거부할 경우 황제 폐하를 지지하는 다른 귀족들에게까지 영향이 갈 수 있네.” ​ 정치적인 이유…. ​ “그 밖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네. 물론 자네들이 거절한다면 다른 자들에게 이 의뢰가 넘어갈거야. 내가 생각하기엔 자네들이 가장 최적의 상대라고 생각하지만…….” “잠시 저희끼리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 지부장은 얼마든지 하라는 듯, 대답 대신 자리에서 벗어났다. ​ “다들 어떻게 생각해? 이 의뢰를 받아야할까?” “카엘군. 나는 무조건 반대.” “카엘. 저도 그리 좋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 두 사람은 즉시 반대했다. ​ 우리가 그동안 해결한 많은 의뢰들의 성격은 대다수가 마물 퇴치, 도적 토벌 등 귀족과는 관계가 없는 의뢰들이었다. 그런데 이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의뢰를 넘어서 아예 정치적인 이유까지 엮여있는 일이었다. ​ 나는 평민이기에 그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지만, 불길하다는 생각만큼은 들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녀들까지 반대한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 “카엘군은 귀족들의 생리를 잘 모를거야. 아마 우리가 이 의뢰를 매끄럽게 해결하더라도 우리에게 적대적인 자들이 생겨날 수 있어. 비록 우리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제국 기사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접적인 귀족들의 견제나 공작을 모두 막아주진 않을거야. 오히려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운다는 이유로 버림패로 쓰일조도 몰라.” “으음….” ​ 그녀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항상 아카데미에서 머릿속에 주입하듯 가르치는 내용중 하나가 바로 황제에 대한 충성과 그 충성에 대한 황제의 보답이었으니까. 기사들은 제국을 수호하고 황제는 그런 기사의 공을 알아주고 그들을 지켜준다. 그게 아카데미에서 주구장창 말하던 기사와 황제의 관계였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꿈만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 잠시 후 자리를 비켜준 지부장이 다시 들어왔다. ​ “자. 제군들. 충분히 얘기는 나눈 것 같던데…….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말해주겠나?” “지부장. 저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의뢰인 것 같습니다.” “호…….” ​ 지부장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카엘 경.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자리를요?” “그렇네. 부디 부탁하지. 물론 당연히 이 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일세. 다만 혹시라도 자네가 걱정할만큼 협박을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 ​ 나는 잠시 그녀들을 돌아봤다. 로엔하임과 발테른. 두 귀족 가문의 이름은 황제에 의해 몰락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황제의 편에 서 있었다. 혹시라도 그런 내력이 어떤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 대외적으로 황제가 처음 아카데미에 몰락 귀족들, 특히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한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공표한 것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시 맹세한다면 과거는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고 했지만……. ​ “걱정마. 카엘군.” “카엘. 걱정하지 마세요.” ​ 나는 그녀들의 대답을 듣곤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동안 문 밖에서 어떤 대화가 오갈지 궁금해하며 복도를 서성였다. ​ 끼이익 ​ 잠시 후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부장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 “카엘 경. 우리 다시 얘기해봐야할 것 같네만….” ​ 무언가 꼬여가는 게 느껴졌다. ​ 지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살짝 굳어있는 표정의 두 사람이 보였다. 묘하게 변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한 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 “자. 그럼 다시 한번 얘기해주겠나.” “카엘군.” “카엘” ​ 지부장의 말에 두 사람이 곧 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얼굴에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 ​ “자. 제군들….” ​ 다시 한번의 재촉. 결국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 “카엘군. 미안해. 우린 이 의뢰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아.” “…….” ​ 그녀들을 질타하거나 꾸짖거나 혹은 화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떤 얘기를 했기에 이렇게 순식간에 그녀들이 의견을 바꾼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 거기다가 아무리 내가 불길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해도 그녀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들만 보낼 수도 없었고, 그녀들의 의견을 반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 “그래. 알겠어.” “흠흠. 그럼 셋 다 동의했으니 티몽 백작에게 연락을 하도록 하겠네. 좀 더 상세한 내용이나 백작이 원하는 것은 직접 만나서 듣는게 편할걸세. ” ​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그저 신변잡기에 불과했다. 최근에 있었던 의뢰에 대한 이야기나 아티젠에서의 생활……. 하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 그렇게 한동안 의미 없는 대화들을 하다가 해가 뉘역뉘역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때쯤, 우린 지부를 나와 숙소로 향했다. ​ “미안해. 카엘군.” “어떻게 된건지 얘기해줄 수 있어?” “카엘군. 이건……. 우리로서는 거절 할 수 없었어.” ​ 엘레노아의 말에 나는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그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카엘. 우리에겐 목표가 있어요. 이미 그대에게도 여러번 얘기했지만….” ​ 처음 우리가 아카데미에서 만나서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 사랑하게 된 이후 그녀들이 내게 했던 기사로서의 목표. 그건 그녀들의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 ​ “지부장은 우리에게 가문 재건에 필요한 여러가지 재원들을 약속했어요.” “고민을 많이 했다곤 얘기하지 않을게. 다만 그 고민의 깊이가 얕지는 않았어. 그래서 더욱더 미안해. 우리가 거절하자고 해놓고 말을 바꿔서….” ​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사람 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난 너희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 그런 두 사람이 원하는 목표에 다가가는 걸 내가 거부할 리는 없잖아? 거기다가 두 사람과 함께라면 그 정도 의뢰따위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을거야.” “고마워. 카엘군.” “고마워요. 카엘” ​ 두 사람은 내게 푹 안겨주었다. 갑자기 길거리에서의 애정행각은 몇몇 사나운 눈초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들의 품은 따뜻하고 평온했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 뒤 티몽 백작의 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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