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루멘시아
20화. 루멘시아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과거, 기사와 마법사들의 시대에서 명망 높았던 마법사 가문인 아르케인의 후예였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한 때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자 강력한 특권층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면서 기사들의 마력을 사용한 육체 강화와 마법사들의 강력한 원소 마법들은 이제 제국 기사들의 전유물이 되면서 그들은 쇠퇴하고 몰락하며 마지막 단말마로 제국에 거대한 내전을 일으켰지만 결국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봉건 귀족들이나 일부들은 여전히 그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양성하곤 있었다.
하지만 이 루멘시아라는 여자는 조금 달랐다.
예술과 학문의 도시인 아르세인에서 자란 그녀는 학문적인 측면에서 마법사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마법사가 된 그녀는 몰락한 가문을 재건한다거나 몇몇 과거의 망령들처럼 옛 시대를 부활시킨다거나 하는 망상에 빠져있지 않고 오로지 마법과 마력, 그리고 이 세상의 신비에 대해 탐구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녀가 쓴 책들은 꽤 인기가 있던 터라 이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여긴가.”
나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집 앞에 도착했다.
도서관 사서가 알려준 루멘시아의 집 위치는 분명 이곳이었다.
아무리 몰락한 마법사 귀족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다니…….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면 분명 누군가 있는 것 같은데…….
한동안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두어 번 더 문을 두드려봤지만, 여전히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딸깍.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이 힘없이 열렸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비록 아르세인이 치안이 안정적인 도시로 손꼽힌다고 해도, 범죄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강도나 살인 같은 험악한 상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계십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도 충분히 허름했지만, 안쪽은 그보다 더 심각했다.
물건들은 대부분 바닥에 어질러져 있었고,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수준으로 보이지 않았다.
멀쩡한 거라곤 벽에 걸려 있는 촛대와 밖에서 보이던 불빛의 정체인 촛불뿐이었다.
한동안 집 안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공간을 둘러봤지만 루멘시아라는 여자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론가 간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걸까…….
“……!”
그때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주 미세했지만 분명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흐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마력의 흐름은 나무판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곳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하인가…?
이 집 지하에 무언가가 있었다.
조심스레 투시로 확인해보니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선택지가 갈렸다.
첫 번째는 지금 당장 혼자 이 지하로 내려가는 것
두 번째는 돌아가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를 데려오는 것.
당연히 더 안전한 쪽은 후자였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인간의 은밀한 충동과 정신 구조》와 내가 보았던 미래시에 대해 그녀들에게 설명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결국 혼자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쿵!
위에 쌓여 있던 나무판자들을 치우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숨을 참고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바닥에 숨겨져 있던 네모난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고리를 붙잡고 천천히 들어 올리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이어진 나선형 계단이 드러났다.
나는 숨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아래로 발을 옮겼다.
한동안 캄캄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곧 일자형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투시 능력으로 안쪽을 확인해보려 했지만 보이는 건 푸르스름한 벽뿐이었다.
모종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었다.
그렇다면 이 공간도, 저 방어막도 전부 루멘시아가 만든 것이란 뜻이었다.
아마 이곳은 마법사의 공방인 듯했다.
다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굳이 왜 지상도 아닌 이런 지하 깊숙한 곳에 공방을 만든 걸까.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이 정말 마법사의 공방이라면 내가 들어온 순간 이미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침입자로 오해받아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 불빛을 향해 걸어가자 이내 고풍스러운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똑똑.
끼이이익…!
노크를 하자 거슬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안쪽은 상상 이상으로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 가까이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과 벽면마다 빼곡하게 꽂혀 있는 오래된 마도서들,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과 이름 모를 마물의 뼈와 장기들과 그 사이를 수십 개의 물건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펜은 허공에 둥둥 떠오른 채 홀로 종이 위를 미친 듯이 긁어댔고, 책들은 저마다 알아서 페이지를 넘기며 공중을 떠다녔다.
찻주전자는 스스로 불 위에 올라가 김을 내뿜고 있었고, 작은 인형 하나는 빗자루를 끌고 다니며 바닥의 먼지를 쓸어 담고 있었다.
철컥 철컥
구석에서는 인간 팔뚝만 한 크기의 금속 팔 여러 개가 각종 마도구를 조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오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금속 부품이 맞물리는 소리만이 공간 안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수많은 마도구와 책들 사이에 놓인 거대한 책상이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이 있네?”
녹빛 머리카락과 녹색 안광을 가진 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책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넘어가듯 저절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름답다.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의 미모였다.
거기다 내가 상상하던 음침한 마법사와는 달리 그녀의 복장은 지나치게 가볍고 노출도 심했다.
짧은 치마 아래로 늘씬한 각선미가 그대로 드러났고, 몸에 밀착된 상의는 풍만한 가슴의 윤곽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 여자가 루멘시아 폰 아르케인.
나는 들고 있던 책들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들을 읽었는데 사서에게 물어보니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책은 확실히 내가 쓴 게 맞는데…….”
루멘시아의 시선이 내 왼손에 들린 《인간의 은밀한 충동과 정신 구조》를 훑고 지나가더니, 이내 오른손에 들린 검은 가죽 표지의 책으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또 피해자가 늘었네.”
“피해자……요?”
우뚝.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방 안에서 움직이던 물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허공을 떠다니던 책들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펜촉도 움직임을 멈췄다.
금속 팔들은 작업 도중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스르륵 날아오더니 내 앞에 자리 잡았다.
그 위로 새하얀 탁자보가 펼쳐졌고, 뒤이어 찻잔 세트와 김이 피어오르는 주전자가 내려앉았다.
“앉아.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루멘시아는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손님으로 대접하기엔 충분하거든.”
“…알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찻주전자가 저절로 움직이며 찻잔 안으로 홍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향긋한 차 향이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루멘시아 역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 나를 천천히 훑어봤다.
“몸에 흐르는 마력의 움직임이나 눈에 남아 있는 강화 흔적을 보니…… 제국 기사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 검은 책을 들고 온 건 이해가 가는데…….”
그녀의 시선이 다시 왼손으로 향했다.
“오히려 이 책은 왜?”
루멘시아는 《인간의 은밀한 충동과 정신 구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걸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네토라레니 관음증이니 하는 내용을 맨정신으로 설명하기엔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이 검은 책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나는 검은 가죽 표지의 책을 펼쳐 안쪽의 삽화를 가리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기괴한 괴수들의 그림.
형태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끔찍한 존재들이 페이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 책은 원래 내가 만든 게 맞아.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내 손을 떠난 물건이지.”
루멘시아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안에 담긴 옛 신들의 흔적에 오염돼서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다가…… 너처럼 옛 신의 흔적이 남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
“옛 신이요?”
루멘시아는 티스푼으로 홍차를 천천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빙글 빙글
잔 안에서 붉은 홍차가 소용돌이쳤다.
“제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신이나 다름없어.”
“…예?”
“오직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고, 인외의 존재들을 말살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신이자 현현신.”
그녀의 녹색 안광이 희미하게 빛났다.
“제국은 인간들의 집단 무의식에 잠식되어 움직여. 인간은 이 땅의 유일한 지성체가 되길 바라거든.”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기계신. 현현신. 집단 무의식.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루멘시아는 그런 내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제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종족들을 몰아냈어. 그들의 영토를 빼앗고, 문화를 짓밟고, 신앙마저 모독했지.”
그녀는 검은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렇게 수많은 이종족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멸망했고, 그들이 섬기던 신들 역시 부름 없는 무저갱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게 됐어.”
루멘시아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멈췄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하나도 이해 못 했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태연한 얼굴로 말을 정리했다.
“쉽게 말하면 인간에게 멸망당한 이종족들의 신이 타락해서 저주를 내린다는 거야.”
그녀의 손끝이 검은 책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너는 그 저주 중 하나에 걸린 상태고.”
“…저주.”
“특히 제국 기사들일수록 더 자주 걸리지.”
“왜죠?”
“글쎄.”
루멘시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건 지금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넌 이미 옛 신의 흔적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녀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묻는 건데. 어떤 식으로 접촉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책장을 넘겨 《심연의 사도(使徒)》가 그려진 페이지를 펼쳤다.
루멘시아의 시선이 삽화 위에 멈췄다.
“심연의 사도.”
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원래 어떤 종족의 신이었는지는 나도 몰라. 그만큼 오래됐고, 심하게 오염됐어.”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녀석과 접촉한 인간은 대부분 정신부터 무너져.”
“정신이요?”
“증상은 사람마다 달라.”
루멘시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역사 속에 기록된 선량한 군주가 하루아침에 폭군이 되기도 했고, 멀쩡하던 인간이 연쇄살인마로 변하기도 했지.”
그녀의 시선이 내 옆에 놓인 《인간의 은밀한 충동과 정신 구조》로 향했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고약한 성적 취향에 눈을 뜨기도 하고.”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까?”
“우선 어떤 식으로 접촉했는지부터 말해줘.”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미래시 속에서 《심연의 사도》를 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에 대한 내용은 적당히 제외한 채로.
이야기를 들은 루멘시아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래시라…….”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원래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현상이네. 아마 옛 신과 접촉하는 순간 능력이 일시적으로 변질된 거겠지.”
그녀는 홍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떤 영향이 나타났는지 말해줄래?”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걸 정말 말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오늘 처음 본 사이임에도 내게 수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관음증인 것 같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루멘시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한번 확인해볼까?”
“그게 무슨 뜻입니…….”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감각이 밀려왔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루멘시아의 녹색 눈동자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변 공간 전체가 물결치듯 일그러졌다.
움직임을 멈췄던 물건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다니는 책들.
천천히 회전하는 찻잔.
공중을 떠다니는 펜촉들.
모든 것이 기묘하게 늘어지고 뒤틀렸다.
웅――
낮고 음산한 진동음이 귓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숨이 막힌다.
정신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
눈앞의 녹빛 안광이 점점 가까워졌다.
마치 끝없이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회색빛으로 가득한 기사 아카데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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