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엘레노아와 데이트
37화. 엘레노아와 데이트
“으음….”
짹짹!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천근같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보인다.
아르세인에 잡아놨던 숙소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 주변을 살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 한켠을 데우고 있었다.
어딘가 멀리서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느때와 같이 평화로운 아르세인의 아침이었다.
다만 내 머릿속은 평화롭지 않았다.
“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치 누군가 내 관자놀이를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입술은 갈라지고 목 안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속은 뒤집힐 것처럼 메스꺼웠고, 무언가 목 아래에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히 우리는 마사지 가게에서 몸을 추스리고 숙소로 돌아온 뒤 이 방에 모여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웃고는 다시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러다가…….
“으음…. 물이…….”
목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흔들거리며 속이 울렁거려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간신히 진정된 후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본능적으로 컵을 들고 벌컥 마셨다.
“푸헉!”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느껴지는 독한 향에 그대로 다시 토해냈다.
“우웩!”
목구멍을 누가 손톱으로 긁는 기분이 들었다.
“쿨럭! 쿨럭!”
나는 다급히 컵을 내려놓고 가슴을 두드리며 입 안에 들어간 액체를 조금이라도 뱉어냈다.
이건 물이 아니라 독한 술이었다.
그제서 나는 끊겼던 기억이 촛불 켜지듯 순식간에 떠올랐다.
숙소에서 한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문득 엘레노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없이 방을 나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 손에 독주가 담긴 병들을 들고 웃으며 들어왔다.
-오늘은 그냥 마시자!
지금은 일단 조금 취해도 괜찮지 않겠냐고, 그렇게 얘기하며 엘레노아는 술병을 땄다.
종종 의뢰를 끝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술을 곁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술꾼처럼 마신 것은 셋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정말 서로 자제하지 않고 마셨던 것 같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루크레치아도 잔을 비우고 있었고, 나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어느샌가 술집에서 본 술꾼들처럼 서로 웃고 떠들다가 그대로 기억이 뚝 끊겨있었다.
“뭔가 약속했던 것 같은데…….”
나는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무언가를 약속한 것 같았는데, 기억이 손끝에 걸릴 듯 말 듯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똑똑.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머리가 아직도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어질거리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왔다.
“……누구야?”
생각보다 더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의 침묵 이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엘군. 일어났어?”
엘레노아였다.
“엘레노아? 응. 일어났어.”
“그럼 카엘군! 아래에서 기다릴게!”
“응…?”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순간, 문 너머에서 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까먹은 거 아니지? 카엘구우운…. 오늘 하루종일 나랑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내일은 루크레치아와 하기로 하고….”
“아…! 아아! 그렇지. 미안. 금방 준비할게. 술냄새가 좀 나서…….”
“그래. 그럼 너무 공주님을 기다리게 하진마~!”
사실 기억이 없다.
정말로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이실직고했다간,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저 묘한 살기가 그대로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엘레노아의 마력으로 내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머릿속에서 순간 끔찍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급히 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금방 준비할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엘레노아의 목소리는 다시 밝아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밝음이 더 무서웠다.
나는 문밖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비틀거리며 여관 종업원을 불렀다.
“저기…… 씻을 물하고 마실 물 좀 부탁드립니다. 가능하면 목욕할 수 있게 준비도 해주시고요.”
종업원은 내 퀭한 얼굴을 보자마자 대충 상황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물병과 함께 목욕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먼저 물병을 붙잡고 몇 모금이나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입 안에 남아 있던 독한 술맛과 몸에 배어 있는 술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상태로 엘레노아 앞에 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늦더라도, 적어도 사람 꼴은 하고 나가야 했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붙잡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굳어 있던 어깨와 목덜미가 천천히 풀렸다.
술기운으로 달아올랐던 속도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물을 끼얹고, 비누로 몇 번이나 몸을 문질렀다.
머리카락에도 물을 적셔 술 냄새가 남지 않도록 씻어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준비했다가 엘레노아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제는 그 사실을 엘레노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였다.
“……너무 오래 걸린 건 아니겠지.”
중얼거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몸을 닦고 나니 머리는 여전히 조금 아팠지만, 적어도 정신은 아까보다 훨씬 맑아져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었다.
어제 입었던 옷은 주름이 잔뜩 졌고 술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렇다고 입던 기사 정복은 데이트에 꺼낼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헤지고, 닳고…….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예비로 챙겨둔 새 정복을 꺼냈다.
아직 빳빳한 천 냄새가 남아 있는 옷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차려입을 일은 없었겠지만, 오늘은 엘레노아와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허리띠를 조이고, 소매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검을 허리에 찼다.
거울 앞에 서서 상태를 확인했다.
눈 밑은 조금 어두웠지만, 그래도 방금 전처럼 술에 절어 있는 몰골은 아니었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기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안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루크레치아였다.
그녀는 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처럼 단정한 차림이었고, 숙취의 기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이 맞나 싶을정도로 멀쩡해보였다.
루크레치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잘 다녀오세요. 카엘.”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루크레치아의 미소가 아주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미소를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머리는 조금 욱신거렸지만, 몸에 남아 있던 술 냄새는 거의 사라진 것 같았다.
숙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엘레노아를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니 아침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들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한 곳으로 향하는 걸 느꼈다.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툭 툭
그리고 1층 식당 한 켠에 앉아 있는 엘레노아의 어깨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한번 휙 돌아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엘레노아?”
“…….”
아무런 대답없이 침묵하는 엘레노아.
겉으로 보기에는 화났거나 삐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한테 수수께끼라도 내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움직일 수 있을지 맞혀보라는 듯이….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그녀의 옆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주님. 모시러 왔습니다.”
“흐응…. 카엘 경. 너무 늦었다구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곤 팔짱을 끼며 마치 돌격을 명령하는 지휘관처럼 팔을 쫙 뻗었다.
“자! 카엘군. 오늘 하루는 온전히 둘만의 시간이야!”
“응. 뭐부터 할까?”
너무 이른 아침이라 할 만한 게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걷다 보니 그런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아르세인의 아침은 생각보다 훨씬 분주했다.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나온 상인들, 물건을 나르는 인부들, 밤새 도착한 짐을 정리하는 상단 사람들.
아직 해가 완전히 높이 뜨지도 않았는데, 거리 곳곳은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노점들도 있었다.
언제 알아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아는 아침 장사꾼들과 상단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노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맛을 사서 서로 나눠 먹여주며 길을 걸었다.
역시 엘레노아의 추천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굉장히 맛있었다.
단둘이 먹을 것을 나누며 걷고 있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아카데미에서는 사실상 이런 식의 데이트가 거의 불가능했다.
해봐야 합동 훈련이나 자유 시간에 교정을 잠깐 거니는 정도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한동안 바쁘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의뢰를 해왔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니까, 크게 이런 데이트가 없어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나와보니 전혀 달랐다.
이런 시간을 좀 더 자주 가졌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제 와서…….
그녀들과의 관계에 크나큰 장애물이 생기고 나서야 이런 걸 챙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엘군?”
“응?”
“여기 묻었어!”
엘레노아가 싱긋 웃으며 내 입술에 묻은 소스를 훔쳐가더니, 자신의 입에 넣고 쪽 빨았다.
그러고는 나를 흘겨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야하거나 유혹한다기보다는, 쉴 새 없이 낼름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장난치는 아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레노아!”
“헤헤. 이제야 다시 돌아왔네? 방금 전에 무슨 생각하느라 얼굴을 굳혔는진 모르겠지만. 카엘군. 지금 우린 데이트하고 있다고!”
“……그래.”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은 그녀와의 데이트에 집중할 때였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가야할 곳은 여기야!”
그녀가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옷 간판이 걸린 가게였다.
대로에서 살짝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주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걸 보면 아직 문을 연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를 데려온 엘레노아도 살짝 난처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덜컹거리며 문이 열리더니, 중년 여성이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우리를 쳐다봤다.
“누구슈?”
“아…. 여기 소개를 받고 왔는데요.”
“소개?”
소개라는 말에 중년 여성은 그제야 문 밖으로 나왔다.
“루멘시아라고…….”
“그럼 들어오슈. 내가 주인이니께.”
루멘시아?
나는 놀란 눈으로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가게 주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를 향해 윙크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불현듯 마사지 가게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게처럼 보였고, 대낮부터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안심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쪽도 밖에서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외관만 봐서는 그리 대단한 가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각종 여인복과 드레스, 외출복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외출해 수도를 돌아다닐 때, 지나가며 본 귀족가의 맞춤복점보다도 훨씬 종류가 다양해 보였다.
엘레노아는 아무래도 새 옷을 맞추러 온 것 같았다.
여자의 옷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기에 괜한 걱정부터 들었다.
무슨 색이 잘 어울리는지, 어떤 장식이 좋은지, 치마 길이나 소매 모양 같은 건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주로 입은 것은 기사 정복이나 여행복뿐이었다.
옷을 고른다기보다는, 튼튼하고 움직이기 편한 것을 입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들 또한 일상복은 그저 수수하게만 입었으니까…….
그나마 그때 티몽 백작의 의뢰를 받고 간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가 내가 처음으로 본 엘레노아의 귀족으로서의 본 모습이었다.
조만간 들이닥칠 엘레노아의 질문들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화사한 외출복, 얇은 장식 끈이 달린 드레스, 귀족가의 영애들이 입을 법한 단정한 맞춤복들.
엘레노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그 옷들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엘레노아?”
그녀는 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가게 주인을 따라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잠시 의아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평범한 의상점처럼 보였던 공간이었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걸려 있는 옷들의 형태가 점점 가벼워졌다.
천은 더 얇아졌고, 소매와 치맛자락은 짧아졌다.
몸의 선을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옷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
나는 무심코 걸음을 늦췄다.
벽 한쪽에는 속옷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옷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장식품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몸에 걸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 옆에는 속이 은근히 비치는 얇은 잠옷 같은 것도 있었다.
그중에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입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나는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다.
“엘레노아…… 여기는…….”
엘레노아는 대답 대신 살짝 귀 끝을 붉혔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앞서가던 가게 주인은 그런 내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툭 내뱉었다.
“처음 오는 남자들은 다 그런 얼굴을 하지.”
“…….”
“겉에 걸린 건 그냥 손님들 눈속임이고, 진짜 물건은 안쪽에 있수.”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다가 결국 엘레노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지금 보이는 옷들도 이미 충분히 민망했는데, 안쪽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자그마한 검은색 가죽 옷도 보였다.
이건 도대체 입을 수나 있을까 싶은 크기였다.
“응? 눈썰미가 좋구만. 그것도 잘 나가는 거긴한데, 흐음….”
가게 주인은 엘레노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부터 훑었다.
그 눈빛에 엘레노아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안돼. 너무 커.”
“예?”
“가슴이 너무 커서 저 신축성으론 감당이 안될거유.”
“크흠! 크흠!”
엘레노아는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엘레노아는 가게 주인을 따라 이것 저것 옷이라고 부르기 묘한 것들을 둘러보다가 몇가지 들고 안쪽 탈의실로 들어갔다.
“애인이유?”
“예? 예….”
갑자기 엘레노아가 사라지자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하필이면 가게 주인이 말을 건다.
가뜩이나 이 야한 옷들 사이에 서 있는 것도 힘든데…….
가게 주인은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자자. 거기 한 가운데 이상하게 서 있지말고 이리 좀 와 보슈.”
“…….”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가게 주인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잠시 선반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더니 병들을 몇개 꺼냈다.
“이건 다 죽은 노인네도 벌떡 세우는 신비로운 물약이고, 이건 석녀들도 아주 그냥 폭포수마냥 지려버리게 해준다는 물약이유. 어디보자…. 이건 모유를 만들어주는 물약이고 또…….”
갑작스럽게 귀를 때려 박는 노골적인 설명에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분명 옷가게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가게 주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의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들고 있는 작은 병들을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향수나 약초액처럼 보였지만, 방금 들은 설명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 저기…….”
“응? 이건 필요 없수?”
“필요 없습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저희는 그런 걸 사러 온 게 아니라서…….”
“그래?”
가게 주인은 별로 아쉽지도 않은 얼굴로 병들을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덜컥.
불길한 소리가 났다.
“그럼 이런 쪽인가?”
“예?”
그녀가 꺼낸 것은 검은 가죽 끈이었다.
“목줄은 기본적인 것부터 고급품까지 있고…. 이건 안쪽에 부드러운 천을 덧대서 오래 차고 있어도 자국이 덜 남고.”
“…….”
“밧줄도 있지. 세게 묶어도 살이 쉽게 까지지 않슈. 초보자들이 많이 찾는 물건이야.”
가게 주인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점점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채찍은 여기. 걱정할 건 없수. 이쪽은 다치게 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소리랑 감각만 살리는 물건이라서.”
“아니, 잠깐만요.”
“그리고 이건…….”
그녀의 손이 또 다른 물건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작고 복잡한 금속 장식이 달린 물건이었다.
형태만 봐도 어디에 쓰는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짐작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설명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가게 주인은 그제야 큭큭 웃었다.
“이런 가게에 같이 온 남자치고는 꽤 순진하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게 주인도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띤 채 안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갈아입기 시작한 모양이구먼.”
“…….”
순간 목이 바짝 말랐다.
“카엘군?”
“으흥?”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나왔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은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낮고 갈라진 소리였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왜?”
탈의실 안쪽에서 잠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아는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천 너머로 살짝 망설이는 듯한 기척만 전해졌다.
“이쪽으로 조금만 와줄래?”
“그쪽으로?”
“응. 바로 앞까지.”
나는 반사적으로 가게 주인을 바라봤다.
가게 주인은 이미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짓궂은 웃음을 본 순간, 괜히 더 긴장됐다.
“가보슈. 아가씨가 부르잖수.”
“…….”
탈의실 앞으로 다가가는 동안, 이상하게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은 조금씩 빨라졌다.
“왔어.”
“응.”
천 너머에서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탈의실을 가리고 있던 천 위로 엘레노아의 얼굴이 살짝 올라왔다.
천 너머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그녀는 내가 정말 앞에 와 있는지 확인하듯 눈을 깜빡였다.
때마침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얇은 천을 은은하게 밝히며, 안쪽에 서 있는 그녀의 형체를 흐릿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릿한 윤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하면…… 바로 말해줘야 해?”
“이상할 리가 없잖아.”
나는 거의 즉답했다.
엘레노아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보지도 않았으면서.”
“봐도 똑같이 말할 거야.”
“그럼…….”
천 너머에서 엘레노아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었다.
손끝이 살짝 굳었다.
사락
탈의실을 가리고 있던 천이 천천히 옆으로 걷혔다.
먼저 보인 것은 엘레노아의 손끝이었다.
그다음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디딘 발끝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엘레노아…….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