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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EP0048-0048화-토벌 작전 4


하루. 고작 하루였다. 그런데 나에겐 마치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 본대에 소식을 전하고 금방 돌아오겠다던 루크레치아는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능선 너머로 넘어가는데 저 숲길 너머로 나타날 거라 생각한 인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 “카엘군. 조금 눈이라도 붙여.” ​ 엘레노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옆에 앉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피곤하다는 말부터 했을 그녀도 오늘은 한 번도 쉬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아직 안 돼.” “카엘군은 오늘 아침부터 제대로 쉰 적도 없잖아.” “루크레치아가 돌아오면 그때 잘게.” ​ 내 대답에 엘레노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 “그래도 이렇게 계속 버티면 카엘군이 먼저 쓰러져.” ​ 엘레노아가 조심스럽게 내 팔을 붙잡았다. ​ “루크레치아도 카엘군이 이러고 있는 건 원하지 않을 거야.”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어딘가에서 루크레치아가 나를 부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움이 필요해도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검을 쥔 채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나는 다시 능선 쪽을 바라봤다. 어둠이 천천히 숲을 덮고 있었다. 낮에는 멀리까지 보이던 길도 이제는 나무와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 결국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버티고 싶었지만 두 눈은 이미 뻑뻑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다리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쉰 시간은 거의 없었다. ​ 지난 하루 동안 야영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녀가 떠난 날 밤에는 두 개의 수색조가 야영지로 복귀했다. 한 수색조는 이미 습격을 받아 한 명만 살아 돌아왔지만 다른 수색조는 전원이 무사했기에 큰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 비록 소수지만 그래도 여유 인원이 생기자마자 우리는 곧장 다른 야영지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곳에 더 많은 제국 기사들이 모여 있다면 곧장 합류해서 본대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숲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에는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 설치했던 천막들은 반쯤 찢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모닥불 자리에는 아직 식지 않은 재가 흩어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남아 있었으나 정작 그 사람들은 없었다.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핏자국과 깊은 발자국만이 그들이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 “이미 당했네….” ​ 엘레노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말했었다. ​ “카엘군. 이건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과 달라졌어.” ​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 “단순히 몇몇 제국 기사가 변절해서 남부로 도망친 게 아니야. 이 정도면 처음부터 준비된 계획일 거야.” “젠장.” ​ 우린 그날 밤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야영지로 돌아와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하루 종일 남부 경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수색조를 찾을 수 있었고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야영지에 스무명 남짓한 제국 기사들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대다수가 습격을 받아 절반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멀쩡한 기사들도 역시 밤낮없이 움직인 탓에 지쳐 있었다. 물론 평소라면 이정도도 충분히 강력한 전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동등한 제국 기사들이었다. 거기다가 그 이상한 능력을 사용한 여자 같은 자들도 있었다. 습격을 당한 기사들 대부분 전투 도중 기괴하게 변신하는 자들을 마주쳤다고 하니 내가 죽인 여자 한 명만 그런 힘이 있는 게 아닌 게 확실해졌다. ​ 변절한 제국 기사들과 옛 신을 믿는 광신도들…. 이번 토벌 작전은 그들이 마련한 함정이나 다름 없었다. ​ “하아…….” ​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누웠다. 천막 안 바닥에 깔린 얇은 담요 위에 몸을 눕히자마자 전신에서 뒤늦은 피로가 밀려왔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가다듬자 바깥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듯 잠들었다. ​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천막 틈으로 스며든 옅은 햇빛을 보며 몸을 일으키자 어제보다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깊이 잠든 덕에 머릿속을 짓누르던 피로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천막 밖으로 나왔다. ​ 야영지 입구 쪽에는 엘레노아가 앉아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짙게 남아 있었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 “엘레노아.” ​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 “카엘군? 일어났어?” “안 피곤해?” “버틸만 해….” “거짓말….” ​ 그녀의 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눈도 여전히 반쯤 감겨 있었다. 마침 그때 경계 교대를 맡은 제국 기사 둘이 걸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대충 사정을 말하고 조금 일찍 교대를 부탁했다. ​ “그정도라면 우리가 조금 일찍 교대해 주지.” ​ 엘레노아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엘레노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놀란 듯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이내 힘을 빼고 내 품에 기대었다. 밤새 버틴 탓인지 몸이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담요 위에 눕혔다. ​ “카엘군은?” ​ 엘레노아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물었다. ​ “루크레치아를 찾으러 가야 할 것 같아.” ​ 엘레노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 “혼자 가려고?” “간신히 모은 인원들을 나눌 순 없어. 그리고 만약 본대에 당했다면 이 인원으로 갔다간 금세 들키고 말거야.” ​ 나는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 “…….” ​ 엘레노아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꼭 돌아와야 해.” “걱정마. 금방 갔다 올게.” ​ 그 대답을 끝으로 엘레노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나는 잠시 그녀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아침부터 분주했다. 나는 천막 앞에 선 채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들을 믿고 루크레치아를 찾으러 가도 되는 걸까…. ​ 대다수의 습격은 본대에서 떨어진 소수의 인원을 노려 벌어졌다. 반대로 지금 이곳에는 스무 명이 넘는 제국 기사가 모여 있었다. 물론 부상자가 적지 않았지만……. ​ 다만 야영지에는 다른 여성 기사들도 있었고 적어도 이 정도 인원이 모인 곳을 상대가 함부로 습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 “카엘?” ​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카데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굴. 조금 거칠어진 인상과 여기저기 남은 상처를 제외하면 여전히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 “데릭. 깨어났네.” ​ 어제 습격을 받은 수색조를 구하던 도중 만나게 되었다. 다만 크게 부상을 입은 터라 기절 중이라 말을 나눌 기회는 없었는데, 다행히 일어난 모양이다. ​ “정신 들었어?” “응. 오늘 새벽에.” ​ 데릭은 짧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붙잡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멀쩡한 쪽 팔로 내 등을 두드렸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데미 시절의 동기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 “몸은 좀 어때?” ​ 내가 묻자 데릭이 팔에 감긴 붕대를 한 번 내려다봤다. ​ “움직일 정도는 돼. 머리도 이제 괜찮고.” “어제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잖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눈을 뜨니까 하루가 지나 있더라.” ​ 데릭은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뒤 야영지 쪽을 둘러봤다. ​ “그보다 네 연인들은 어딨어? 아직도 같이 다니는거 맞지?” “응. 당연하지.” ​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 “네가 아카데미의 모든 남자들의 원한을 한몸에 받게 될 줄은 아직도 상상도 못했다니까” ​ 녀석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카데미 시절의 데릭은 늘 저런 식이었다. 여자 얘기만 나오면 괜히 아는 척을 하거나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농담을 던지기 바빴다. 늘 가벼운 말투로 사람을 놀리고 그만큼 여자들에게도 쉽게 눈길을 주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어딘가 행동에 무게감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녀석도 편력행으로 많이 달라졌겠지. ​ “데릭” ​ 내가 낮게 부르자 녀석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 “왜?” “엘레노아는 천막 안에서 자고 있어.” ​ 나는 천막 쪽을 바라봤다. ​ “밤새 경계를 섰어. 이제 막 잠들었으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지켜봐 줘.” ​ 그는 곧바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 “너는?” “루크레치아를 찾으러 갈 거야.” ​ 데릭의 표정이 굳었다. ​ “본대에 우리가 알아낸 습격 정보를 전하러 갔어.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어.” “…….” “처음에는 길이 막혔거나, 본대 쪽에서 상황이 생겨 늦는 거라고 생각했어.” ​ 나는 숲 너머를 바라봤다. 아침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그 안쪽은 여전히 어둡고 깊어 보였다. ​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본대가 무사한지도.” ​ 데릭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만약 본대까지 습격을 당한 거라면…….” “우리도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없어.” ​ 본대가 무너졌다면 보급과 연락, 도시로 돌아가는 길까지 전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기사들은 적에게 포위된 채 남부 경계 어딘가에 고립될 수도 있었다. ​ “도시로 돌아가는 것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겠지.” ​ 데릭이 내 말을 이어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확인해보려고 해. 본대든 루크레치아든.” “혼자 갈 생각이야?” “여기 인원을 더 나눌 수는 없어.” ​ 나는 천막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엘레노아는 이제 막 잠들었다. 부상자들은 여전히 많았고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은 야영지의 경계와 주변 수색을 맡아야 했다. ​ “엘레노아를 여기 혼자 남겨둘 수도 없고.” ​ 데릭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 그는 붕대가 감긴 팔을 가볍게 눌러보며 말했다. ​ “여긴 내가 볼게. 적어도 네가 돌아올 때까지는 엘레노아한테 아무 일도 없게 할 테니까.” “고맙다.” “대신 너도 멋대로 죽지는 마.” ​ 데릭은 억지로 웃으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 “아카데미 시절부터 겨우 살아남은 놈이 여기서 죽으면 너무 허무하잖아.” ​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자루를 단단히 쥔 채 본대쪽으로 향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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