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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화 - 흔들리는 마음


“수연아, 우리 전부터 알던 사이지?” “실기시험 보던 날... 기억 안 나?” “어떤...” “난 네가 모른 척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기억을 못하는 거였네.” “모르겠어... 정말...” “그날도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내가?” <제가 바꿔드릴게요.> 아! 생각났어. “생각났어!” 드디어 모든 것이 기억났다. * * * 1998년 1월 9일은 H대학교 미술대학의 소묘 실기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였지만, 수험생들은 문헌관 앞 공터에 모여있었다. 아직 시험 석고상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관 유리 너머로 로비에 쌓인 수백 개의 이젤과 ‘줄리앙’이란 석고상이 보였다. “수험생 여러분,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추위로 난방시설이 동파되는 바람에 시험장소가 변경됐어요. 죄송하지만 여기 준비된 이젤을 하나씩 들고 각자 시험장으로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술한 시험준비를 성토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러나 가벼운 소란도 잠시, 모두가 이젤을 들고 감독관을 따라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힘 좋고 호기로운 일부 남학생들은 이젤을 두세 개씩 들고 이동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8층 시험장으로 가는 원형 계단을 오르며, 내 얼굴은 땀과 후회로 가득 찼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시험장에 도착했는데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라디에이터 배관에선 쉴 새 없이 ‘땡땡’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감독관은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며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시험을 시작했다. 곧 자리 추첨이 진행됐으며 난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 자리를 뽑았다. ‘줄리앙’은 앉은 자리에 따라 난이도 변화가 컸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컨디션이 문제였다. 찝찔한 맛이 느껴져 얼굴을 만져보니 땀이었다. 온몸에서 어마어마한 땀이 펑펑 솟아났다. 고모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아기 때 입던 배냇저고리를 후드티셔츠 앞에 넣어줬는데, 그 보온성과 함께 시험장의 열기, 8층까지 두 개의 이젤을 들고 올라온 운동효과, 평정심을 잃고 당황한 심리 등 여러 요인이 모두 땀으로 배출되고 있었다. 난 후드티셔츠를 벗고 싶었지만, 속에 입은 옷이 없었다. 배관은 ‘땡땡’거리며 계속 귓가를 울렸고, 땀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앞이 아득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창가 자리에서 나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당황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줄리앙의 왼쪽 측면은 누구나 어려워하는 자리였고, 그 여학생의 자리에서 바라본 석고상은 면광원이 직접 닿아 그림자 없이 플랫하게 보였다. 가장 안 좋은 최악의 자리였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은 시험장으로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고 여학생은 8층 수험생 중 가장 운이 나빴다. 이미 주변 수험생들은 연필을 분주히 움직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여학생은 양손에 연필과 컷터칼을 든 자세로 굳어있었다. 나는 연필 깎는 척 뒤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나랑 자리 바꿀래요?] 난 열기를 피해 창가 자리로 이동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구세주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크크크, 너였구나. 그때 여학생이...” “가뜩이나 싫어하던 구도인데 그림자도 없고... 정말 울뻔했어.” “사실 고등학교 미술실이 비슷한 구조였어. 큰 창과 하얀 벽 때문에 낮엔 그림자가 사라지곤 했지. 그래서 우린 외곽형태만 잡아놓고 그림자는 외워 그렸어.”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난 어머니가 보내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응? 어머니?” 수연의 눈가가 잠시 촉촉해진다. “아냐 됐어, 됐어...” “......” “너 그날 땀 엄청 흘리던데.” “어휴... 말도 마...” “그러게 왜 이젤을 몇 개씩 들고... 덕분에 여학생들은 편하게 올라왔지만.” “암튼, 너 아녔으면 그날 시험을 어떻게 마쳤을지 상상도 안된다.” “다행이네. 내가 도움이 됐다니...” “그래서 조소시험 보던 날도 너를 유심히 지켜봤어.” “야, 그만해. 창피하게...” “저 남학생과 함께 합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우연이 아니었고 착각은 더더욱 아니었다. 난 그 순간 하림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우리 사귀자.” “에엥?! 수연아, 무슨 소리야...” “아니, 너랑 사귈 거야.”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 * 하림의 집엔 불이 꺼져있었고, 레토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난 경비아저씨의 시야에서 벗어난 골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대영씨!” 나를 먼저 발견한 하림이 소리를 지른다. 약간 경사길 비탈길을 그녀가 바쁘게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하림의 손엔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늦었는데 왜 걸어와? 그리고 손에 든 건 뭐야? 오늘 초밥 먹는다며?” “하나씩 물어봐요. 나 숨차잖아요.” 난 그녀의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도시락 한 개가 덜렁 들어있었다. “에고, 헉헉...숨차다.” “나 없을 땐 이렇게 먹었어?” “혼자선 잘 못 먹겠어서... 안 넘어가.” “점심은? 점심도 안 먹었지?” “.....” “오늘 차 명의변경하고 카센터에 맡기느라 정신 없었어요. 중고차지만 그래도 깨끗한 상태로 주고 싶어서.” “나 차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하림 씨는 뭐 타려고?” “난 택시타면 되지요. 그리고 높은 차는 이제 운전 안 하려고요.” “하아... 참내...” 난 이유모를 짜증이 났다. 내가 뭐라고 이 여자는 이렇게 헌신적인 걸까. “에이씨!” 난 도시락을 담벼락에 집어 던졌다. 곧바로 후회되었지만, 사과하거나 바로잡지 못했다. “대영씨... 난 자기 와서 기쁜데 왜 그래요...” 그냥 화가 났다. “따라와.” “어딜?” 난 그녀의 손목을 끌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한번 이렇게 그녀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하림과 처음 잠을 자던날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의 하림은 수수한 옷차림에 굽이 낮은 운동화를 신고 있단 점이었다.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요?” “거의 다 왔어.” 내가 멈춘 곳은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주고 찾는 작은 포장마차 앞이었다. “우리 우동먹자.” “우동? 자기 우동 싫어하잖아요.” “여기 우동 두 개랑 꼼장어 주세요. 소주 한 병도요.”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물잔에 물을 따르고 수저를 놓는다. “... 갑자기 화내서 미안해.” “칫, 내가 편의점 도시락 사 와서 그런 거잖아. 그런 거면 내가 이해해야지.” “그냥 요즘 피곤했나 봐.” “미안해하지 마요. 사과도 자주 하면 버릇돼. 남자가 그 정도 투정도 못 부려? 괜찮아.” “너 정말 왜 그러냐... 그러다 버릇되면 어쩌려고...” “나 그보다 자기에게 줄 거 있는데...”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낸다. “이거 핸드폰이잖아. 요즘 광고하는 PCS폰.” “난 사람들이 이딴 물건을 왜 쓰는지 궁금했는데... 호호호.” “이거 설마 내 꺼야?” “대영씨랑 쓰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샀어요. 개통은 해놨는데 자기 오면 열어보려고 아직 안 켜봤지.”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삐삐도 있는데 이게 왜 필요해?” “내가 수시로 전화할까 봐 걱정하는 거죠? 급한 일 아니면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 그런 여자 아니고 싶어.” 상자에 붙은 엽서 크기의 봉투가 눈에 띈다. “그 봉투는 뭐야?” “어머 이건 집에서 줘야 하는데...” “뭔데?” “이거 열어보고 화 안 낸다고 약속해요.” 봉투안엔 통장과 체크카드가 들어있었다. “자기한테 물어보고 했어야했는데... 미안.” “이 돈을 받으라고?” “나중에 내가 공부시킨 남자라고 유세 떨게 내버려 두면 안 돼요?” “됐어. 곧 알바자리 들어올거야. 학교 근처 학원 알아보고 있어.” “자긴 공부만 열심히 해줘요. 아니 너무 열심히도 말고 딱 교직 이수 정도만. 그리고 사실 나 때문에 학원 관둔 거니까 내 책임도 있는 거고...” “하아... 내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난 남이 아니고 대영씨 사람이에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든 잘할 거예요. 대영씨만 괜찮다면 부모님도 찾아뵙고... 아, 그건 지금 좀 오번가? 흐흐흐.” 내가 뭐하는 짓이지? 우리 아버진 노름은 했지만, 난봉꾼은 아니었다. 오늘 내가 했던 행동이 그녀 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내일 수연이 있는 조에서 빠지겠다고 말할 작정이다. 세훈에게 다시 한번 부탁을 해보고 안되면 ‘F’를 각오할 생각이었다. “남동생 이유? 남매가 인물이 좋네.” 우동과 꼼장어를 내온 사장님이 덕담을 건넨다. “사장님, 제 여자친구예요.” “아이고오~ 남학생이 동안이구먼.” “모야아~ 나 여기 다시 안 올래.” “나 장발에 수염 기를까? 그럼 나이 들어 보일 텐데.” “그딴 짓 하지 마! 그건 정말 못 참아.” “크크크.” “으음~ 너무 맛있어.” 하림은 신이 났다. 내가 첫잔을 들이켰을 때, 하림은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 술 안 마셔?” “천천히. 천천히 마실께요.” 하림은 입술만 적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하림아. 나 군대 가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분위기를 깨긴 싫었지만, 하림이 좀 더 현실적인 미래를 보길 바랐다. “겨울에 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죠?” “아니 그건 그냥 생각만...” “자긴 아직 신검도 안 받은 상태라 준비할 시간이 많더라고요.” “준비? 무슨 소리야?” “알아보니까 면제받을 길이 많아요. 면제가 싫다면 상근예비역이라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하림아 전에 도장 받아간 게 그런 이유였어?” “대영씨, 이건 불법 아니에요. 법에도 탈세와 절세가 다른 건데...” “그러지 마. 나 그런 짓 하는 사람들 제일 싫어. 군대도 신검받아서 정상적으로 다녀올 거야.” “나... 자기 기다리는 거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대영씨 군대 다녀오면, 난 서른세 살이고 복학하고 대학원 마치면 금방 마흔이에요.” “......” 현실감각이 없는 건 나였다. “그리고 너무 불안해요... 대영씨랑 헤어질 때마다 못 가게 붙잡고 싶고 그래.” “모야, 갑자기... 드라마 찍어? 크크크” “웃지 마.” “나 학교에서 별로 인기 없어. 걱정 말래도.” “조교실에 남희 알죠?” “우리 조교 누난데? 왜?” “내 친구예요. 예고부터 미술학원까지 함께 다녔어.” “아이쿠! 그 누나가 우리 만나는 거 알아?” “글세... 대영씬 그냥 모른 척해도 돼.” “와~ 무섭다. 김하림.” 하림의 생글거리는 웃음이 나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구나.” “남희는 예고 다닐 때 갑자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우리 아빠가 많이 도와줬어요. 교습비도 내주시고. 물론 걔랑 난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고.” “전혀 몰랐네...” “대영씨 그 잔만 비우고 우리 들어가요.” “왜? 안주도 그대로 남았고, 우리 오랜만에 마시는 거잖아.” “아까 대영씨가 버린 도시락 치워야죠. 누가 보면 욕해.”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네버네버. 절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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