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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5.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응! 나도 해볼래." "재밌겠다! 난 근데 총인데 괜찮아?" "상관없어! 쏴봐!" 그녀들은 한지은의 옆에 서서 선호를 표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활 2명에 마력 총 한 명. 마력 총을 쏘는 딜러는 마력을 원하는 형상대로 고체화하는 특수 능력을 지닌 자들이 사용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비싼 돈을 주고 마력 탄환을 계속해서 구매해야 한다. 형상 마력이라는 A급 특수 능력을 지녔든 집에 돈이 정말 많든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총을 주 무기로 사용해볼 생각이라도 하는 것이다. 푸슉! 푸슈슉! 쐐액!! 쐐애액!! 퉁!! 퉁!!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마력 탄환이 쏘아지는 특유의 둔탁한 총성음이 울려 퍼진다. 팅! 팅! 쩌엉!!!!!! 마력 탄환의 속도는 화약으로 쏘는 일반 탄환보다는 느리지만 화살보다는 훨씬 빨랐다. 막을 수는 있었지만 검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반탄력에 검에 마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궤도를 바꿔 흘리거나 피하는 것이 답인 듯했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한참을 시간을 돌려가며 회피 기동 훈련에 열중했다. "난 이제 준비한 탄환이 떨어졌어~여기까지 해야겠다." "어떻게 한 발을 못 맞추지? 우리가 이상한 거야, 쟤가 이상한 거야?" 딜러들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검첨을 바닥으로 향한 것이 신호가 된 듯 선호를 표적 삼은 딜러 세 명이 그에게 모여 들어 놀라운 감상을 재잘대고 있었지만 선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겨진 얼얼한 감촉, 검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 뭔가 머리 한구석이 간질간질 한 것이 제방처럼 높이 쌓인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며 자그마한 구멍을 통해 물줄기를 키워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찰나 훈련이 끝나버렸다. '뭔가 될 거 같은데.. 주말되면 간만에 스승님이나 한번 뵈러 갔다 와야겠다.' 환유성은 어제 신지윤과 겪었던 색투에서 판정승을 거둘 수 있게 해준 숨은 공로인이었다. 똥을 던지고 두부로 기괴한 짓을 하던 미친놈에서 어느새 지엄한 스승님으로 격상한 환유성이다. *** 저녁 시간. 저녁 식사는 아카데미 내에 있는 식당보다는 선호의 숙소에서 해결했다. 신지윤은 꼭 넓은 자리 놔두고 내 무릎에 앉아 밥을 먹는 걸 고집하는 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불편한 나를 위해 그나마 아리가 밥을 먹여 줘서 숫가락 질을 할 필요도 없이 입만 벌리면 되었지만, 고간에서 느껴지는 신지윤의 부드러운 엉덩이와 팔에 은근히 비벼오는 아리의 가슴 때문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 모를 지경이다. 그렇다고 욕정이 드는 대로 해결하자니 아직은 셋이 동시에 관계를 할 수도 없다. "선호야~ 아~" "아니..우리 이제 제대로 앉아서 밥 먹으면 안 되려나.. 지윤아 내려오자?" 신지윤을 내려 놓기 위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힘을 살짝 주는 순간. "씨러어!!" 구궁-! 조그마한 몸뚱이가 갑자기 돌이 된 듯 무거워졌다. 신지윤이 중력 조절 마법을 사용한 것. "으엑!! 알았어!! 정지!! 정지!!" 갑자기 중력이 늘면서 식탁의 음식들이 짜부가 됐다. 휘우웅-! 신지윤의 스펠을 띄운 손가락을 쥐어 흔들자 주변을 짓누르던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입자화 된 마력의 파편이 푸른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하아.." "지윤아~ 밖에서 마법 함부로 쓰다 걸리면 벌점이니까 다음부턴 조심하자?" "응…." 아리가 신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분명 마법학 수업은 같이 들었는데 왜 이 꼬마 아가씨는 벌써 이런 걸 쓸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언젠가부터 이따금씩 어디론가 사라지는 신지윤의 뒷조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는 선호였다. 식탁에서의 소란에 스탠드형 장식등 위에 앉아 있는 모형 새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는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아리는 최근 큰 고민이 생겼다. 허거운 날 전화해서 사위 소개는 언제 시켜 줄 거냐며 떼쓰는 엄마 문제는 사소하다. 아마도 선호와 첫날밤을 보낸 뒤 선호에 대한 의존이 늘어난 신지윤으로 인해 선호와 붙어 있을 시간이 부족해진 것도 사소한 문제. -어머! 저기 선호다!! -어디 어디!! -꺄악!!! -저거 봐!! 딜러들 다섯 명이 공격하는데 전부 막히고 있어!! -너무 멋있다~ 강의실 밖에는 강화계의 전투훈련이 한창이다. 아리도 창에 매달린 여성들과 동참해 내 남자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쳇, 저런 년이 뭐가 좋다고 사귀는 거지? -그러게~ 부모도 일반인이라며? -출신이 천한 년답게 가랑이 벌려서 애원이라도 했지 않을까? -캬하하! 그럴 것 같은데? -깔깔깔!! 뒷다마도 아닌 당사자를 면전에 두고 앞다마를 시전하는 삼인방의 대화에 반 전체가 빵터졌다. 아리의 가장 깊은 고민은 회복계 특강에 참석할 때마다 발생하는 은근한 괴롭힘. 그녀는 지금 힐러들 사이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강단 있고 다부진 면이 있는 아리였지만 이렇게 대놓고 여러 명이서 들으란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꼬신 거 아니거든!! 선호가 좋다고 했어!!' 라고 크게 한 마디 외치지도 못했다. 사실 가만히 있던 선호에게 먼저 키스하고 꼬리 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교수님이 얼른 들어오기 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각성자들끼리의 싸움은 결국 집안과도 연관이 있다. 다 같이 일반인들이었다면 머리끄덩이 한번 잡으면 그만이지만, 저들의 말대로 아리의 부모님은 일반인. 일이 커졌을 때 자신의 가족이 입을 피해가 두려웠다. 같은 편이 한 명도 없는 외로운 사투. 아리는 그저 이 상황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며 속으로 눈물을 삼켜내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야! 성아리! 너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응? 아…니. 들었어…." "근데 왜 듣고 가만히 있어?" 아리를 주로 괴롭히는 삼인방의 리더 이혜빈이 반항하지 않는 상대가 만만한지 점차 괴롭힘의 수위를 늘려갔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데!?' 아리는 눈물이 찔끔 나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에라도 이혜빈 망할년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뜯어버리고 싶었다. 선호는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뚫고 나아가 자신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리에겐 그럴 힘도 자신도 없었다. "당장 헤어져!! 주제 파악 좀 하란 말이야! 응?" "깔깔! 그래! 이제라도 헤어지지 그래? 선호도 너네 부모님이 일반인인 거 아니?" '선호는 그런 걸 따지는 남자가 아니야!!' 아리는 그럴 수 없다고, 니깟년들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날카롭게 외치고 싶었지만 마치 성대가 아교에 달라붙은 듯 목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한 느낌이다. 사지에 힘이 빠져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고 무력하게 흔들리는 것이 깊은 수렁에 목 끝까지 빠져 있는 듯했다. 내가 선호에게 부모님이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던가? 선호는 분명 그러한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아리의 주변에서 촌철 같은 말의 암기에 가슴이 난자 당해 심장이 도려내어 지는 듯하다. '선호에게 말해서 도움을 청해볼까?' 안 된다.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의 남자가 신경 쓰고 이로 인해 그가 떠맡아야 할 짐과 업보를, 후폭풍을 그저 지켜보며 그것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흐윽…. 흑!" 눈물이 철철 흐른다. 심장의 고통은 커져만 가고 주변인들은 그저 자신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할 뿐. 선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요즘은 신지윤 때문에 둘만 오붓하게 보낼 시간도 없었던 터라 가슴에 피어나는 증오의 화살촉이 신지윤에게도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자~ 착석하세요!" 평소라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야 할 짧은 쉬는 시간이 괴롭힘과 가스라이팅으로 점철되다 보니 끝없는 나락과도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선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잊혀지고 교수가 무얼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는 걸까. '보고 싶어...선호야...' 아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소중한 안식처를 갈망할 뿐이었다. *** 아리와 신지윤은 무언의 약속으로 하루 씩 건너뛰며 선호의 숙소에서 같이 밤을 보냈다. 자상하게 보듬어 주는 그의 손길은 갈기갈기 찢겨나간 가슴을 얼기설기나마 꿰어 준다. "아리. 요즘 무슨 일 있어?" 티가 났던 것일까. 그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절대 티 내지 않겠다고 하루에도 수 없이 다짐하고 마음을 가다듬지만 그의 직감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으응…? 아니? 왜 갑자기?" "음.. 뭔가 요즘 너랑 있을 때면 뭔가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이상해." 음양신선공이 6성에 이르며 중단전이 열린 뒤로는 감정에 민감해진 선호다. 자신이 품은 감정이 마력에 은은히 담기는 마력의 오묘함에 눈을 뜨고 있는 그다. 중단전이 단련됨에 따라 패기와 살의 등 다양한 기운이 담긴 마력이 몸을 휘돌며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상대방이 품은 기운도 이제는 조금씩 느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리를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향한 연모의 감정과 함께 한편으로 아련한 애잔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만족을 못 시켜 줬나?' 선호는 의아했다. 분명 아리가 가진 체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여 지금은 스스로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일 터.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아리는 선호의 눈을 마주 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듣는다면 분개해 줄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며 태연히 거짓말을 하기에는 그로 인한 책임을 짊어질 수 없는 현실이, 이렇게도 무력한 자신이 여전히 그의 연인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을 갈구하여 뻥 뚫려 버린 심장을 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눈을 다소곳이 내리 감고 그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채근도 하지 않고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안식처로서의 기능에 충실 한다.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영혼에 새기듯 끝없이 되뇌이는 그에 대한 예속의 맹세를 담은 입맞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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