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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 초월자들


"크, 으윽…." 온 일대가 폐허가 된 거리에서 레밀리아가 땅에 검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뒤에서 모르와 칼리사가 털썩 쓰러지는 소가 들렸다. 두 사람 다 마력과 신성력을 한계까지 펼쳐 그 마력탄을 막아냈다. 레밀리아 자신도 검에 마력을 최대치로 둘러 하늘을 향해 검기를 날렸는데, 충격을 아주 미세하게 줄여주기만 했다. 그리고 강태진과 슬라코는…. 레밀리아의 시선 끝에 움푹 파인 도로가 있었다. 두 사람의 생존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빨을 빠득 갈았다. 그럼 어째서 그녀는 혼자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녀가 그나마 녀석에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후우…." 암흑 사제가 탈력감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며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얼핏 보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 그러나 레밀리아가 펼친 기감 속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존재감은 처음 봤을 때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작아져 있었다. 사방을 뒤덮던 녀석의 사기도 사라지고 쾌청한 하늘 아래 햇빛이 내리쬤다. “방금 건 설마 영물의 브레스인가? 힘의 태반이 날아가 버렸군.” 암흑 사제가 오른손을 쥐었다 피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맹렬한 기세를 뽐내던 그의 사기가 지금은 그저 육체를 유지하는 데만 리소스를 활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몸의 절반 이상 가량 소멸했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암흑 사제는 지금의 존재가 되면서 육체가 짙은 사기의 집합체로 재구성되었다. 설령 사지가 잘리고 머리가 날아가더라도, 사기만 충당할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몸을 복구시킬 수 있었다. ‘브레스는 하늘에서 두 줄기로 나뉘었다. 하나는 내게. 또 하나는… 커젝스 녀석이군.’ 암흑 사제는 자신이 사기를 내려준 부하의 존재를 상기하고 마력으로 텔레파시를 날렸다. [커젝스. 무사한가?] […….] 커젝스에게서 답신은 없었다. 그러나 그 과묵한 기사는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텔레파시가 수신된 흔적만을 가지고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직접 유추해낸 암흑 사제였다. ‘허나 느껴지는 힘은 미약하군. 녀석도 브레스에 부상을 입은 모양이야.’ 암흑 사제의 그런 생각은 부하를 걱정해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현재 가용 가능한 전력의 확인해 불과했다. 그리고 부하가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곳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커젝스에게 다시 텔레파시를 날렸다. [방금 전 공격은 영물의 습격이다. 나는 마을 밖을 확인하고 올 테니 너는 세이네루스 님의 호위에 들어가도록.] 그의 시선이 마을 동쪽 지역에 위치한 연병장을 향했다. [용사 녀석이 아무래도 탈출한 것 같다.] 단번에 용사가 세이네루스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커젝스에게 호위를 명령했다. 커젝스에게서는 여전히 답신이 없었으나, 그의 기척이 마을 중심에 놓인 영주 저택을 향하는 것은 확인한 후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주위를 바라보면 인간이 세 명. 그 중 두 명은 정신을 잃어 쓰러진 상태고, 유일한 위협이라고 느꼈던 흑청 기사는 무릎을 꿇은 채 이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암흑 사제는 콧방귀를 뀌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딜 갈 생각이냐?” 그를 노려보던 레밀리아가 이를 꽉 깨물며 물었다. 일어설 힘조차 없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힘없는 의지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암흑 사제는 그녀를 무시하고 허공에 떠올랐다. ‘우선은 습격해온 영물의 대응이다. 벌레 놈들은 나중에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허공에 떠오른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돌무더기에 막혀 있으나 방금 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 남자와 슬라임이 영물의 브레스에 의해 저 아래로 처박힌 것을 확인했다. 자신조차 막대한 데미지를 입은 공격을 인간과 슬라임이 버텼을 리가 없다. 설령 버텼다 하더라도 저 아래는 아리스톨 마을의 지하수도. 그곳에는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불사자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무수히 많이 활보하고 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암흑 사제는 태진과 슬라코에 대해 억지로 잊어버리고 마을 외곽을 향해 날아갔다. 그 도중 마을 전체에 전개한 술법을 통해 지금까지 모아온 사기를 일부 자신에게 모이도록 조작했다. 사방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하늘로 치솟아 암흑 사제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브레스에 잃은 힘을 다시 전부 원상복구했다. 돌아온 힘을 사용해 한차례 가속한 그는 한달음에 마을 외곽의 숲 상공에 도착했다. 그 아래에서 브레스를 날린 장본인이 서슬 퍼런 금빛 눈동자로 그를 노려봤다. “숲의 주인, 퀸 문라이트 울프인가. 제3 영물인 녀석의 영역은 이곳이 아닐 텐데. 개새끼가 자기 집조차 잊은 건가.” 암흑 사제가 중얼거린 말이 들린 듯 아래에서 마력을 띤 목소리가 울렸다. [닥쳐라! 세상을 좀먹는 벌레 같은 놈. 네놈도, 암흑신도, 전부 다 없애주마!]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또 다시 브레스가 날아왔다. 암흑 사제는 블링크를 시전해 브레스의 사선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사기를 끌어 올렸다. “권능 해방.” 그를 중심으로 세계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기가 공간을 장악하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에게서 퍼지는 죽음의 향기가 숲을 죽이고 땅을 메마르게 했다. 암흑 사제가 전개한 권능은 암흑신에게서 내려받은 그의 힘의 일부였다. 오직 사도급 신자만이 얻을 수 있는 신의 권능이 해방되며 암흑신의 영역이 세상의 이치를 깨부쉈다. -크르르르! 숲의 주인이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도약했다. 암흑 사제를 향해 날아가며 그의 주변을 물들이는 검은 공간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오러가 깃든 백색 마력이 발톱의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소용없다, 숲의 주인이여.” 암흑 사제가 비웃는 듯이 말했다. “영물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세상에 속한 것.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 신의 권능을 네놈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말대로 숲의 주인이 날린 발톱은 암흑 공간을 일시적으로 찢었을 뿐. 주위의 암흑이 꿈틀거리자 금세 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 “영물을 제물로 바친다면 암흑신께서도 기뻐하시겠지. 네놈의 살과 가죽, 잘 받도록 하겠다.” 암흑 사제가 한층 더 사기를 뿜어내며 권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때, 숲의 주인의 목털 사이에 숨어있던 작은 존재가 뛰쳐 올라왔다. 하늘 높이 뛰어올라 암흑 사제를 노려보는 그 존재는 숲의 주인의 딸 월광이었다. “어린아이?” 그녀의 모습에 황당한 기색을 보이는 암흑 사제의 앞에서 월광이가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들이켜더니 입을 벌리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끄아아아아아아앙!!!” -파아아앙! 그 순간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암흑 사제의 권능이 모습을 감췄다. “크윽!?” 경악과 당혹감이 다분히 섞인 신음과 함께 암흑 사제가 귀를 부여잡고 괴롭게 몸부림쳤다. 뇌를 뒤흔드는 것 같은 음파 공격. 그러나 단순히 소리를 크게 낸 것만이 아니다. ‘권능이 사라졌다니!? 단순히 전개를 방해받은 게 아니야. 권능 자체가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 그대로 자유낙하를 하는 월광이를 숲의 주인이 허공을 박차며 날아와 등으로 받았다. 묘하게 콧김이 거센 모습이 딸아이가 자랑스러운 어미처럼 보였다. 월광이도 엄마의 등에 올라타 그 납작한 가슴을 있는 힘껏 내밀며 콧김을 슈욱 내뱉었다. 공중에서 몸을 가다듬은 암흑 사제가 손을 바라보며 이빨을 빠득 갈았다.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내 힘이 권능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마!” 또다시 암흑 사제가 사기를 펼쳤다. 권능을 해방했을 때처럼 사방이 검은 마력에 물들어 갔으나 아까와 같은 위압감은 없었다. 그 대신 대기를 갈아 일으킨 자전이 사기와 섞여 검은 번개가 사방에서 일렁였다. 숲의 주인도 이에 맞서 마력을 끌어올려 브레스를 쏠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순간 두 초월적인 존재의 싸움이 지천을 흔들었다. * * * 아리스톨 마을을 둘러싼 성벽. 그중 가장 높은 첨탑에서 하얀 로브를 둘러싼 집단이 숲의 주인과 암흑 사제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악재군요.” 그 중 유일하게 후드를 벗은 이가 진저리가 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엘프 소녀 아르윈이었다. “아침에는 미천한 인간에게 굴욕을 당하고. 기껏 거래를 위해 사천왕을 찾아왔더니 말도 섞기 전에 이런 난장판이 벌어지다니. 주신 리엘라께서 제게 시련을 내려주신 걸까요?” 그녀가 눈매를 좁히며 하늘에서 사기를 흩뿌리는 암흑 사제를 노려봤다. “게다가 설마 암흑 사제가 상급 마족인 데다가 암흑신의 사도일 줄이야. 정보부는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건가요? 어째서 제게 그런 중요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죠?” “죄송합니다, 대주교님.” 그녀의 뒤에 있던 로브를 입은 엘프 하나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뭐, 됐어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겠군요. 사천왕이 겨우 이 정도 소동에 흔들릴 인물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대기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아르윈은 뒤를 돌아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영주성을 바라봤다. 그녀는 영주성을 향하는 용사의 존재를 정확히 포착한 상태였다. “여차하면 ‘목표’의 확보를 미루는 것도 시야에 둬야 합니다. 성왕께 연락을 넣으세요.” 고개를 숙였던 엘프가 아르윈의 지시를 듣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르윈은 다시 숲의 주인과 암흑 사제를 바라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인간, 마족, 영물, 몬스터. 하등 종족들이 무슨 짓을 하던 상관없습니다. 끝에 하늘에 서는 건 우리 엘프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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