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64. 사모의 임신 프로젝트
“네. 저도 최선을 다 할게요. 원장님도 사모님도 나이가 좀 있으시니 더 신경 쓰겠습니다.”
“...”
민아는 태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내가 말실수 했나? 근데 맞잖아. 노산은 진짜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게다가 무조건 자연임신만 한다고 하면… 트라우마까지 있는 고난이도 상황이면 더욱 조심해야하는데... 표정이 왜 저래?
민아는 의자를 조금 더 당겨 태준의 쪽으로 다가 갔다.
“전 남편과의 임신을 원하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태준씨한테 거짓말 한 거 있어요.”
“네? 어떤…”
민아는 눈치를 살피며 선뜻 쉽게 말하지 못했다. 태준은 말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줬다.
“저… 경구용 피임약 먹고 있어요.”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지? 임신준비하는 여자가 경구용 피임약?
“네? 그건 왜…”
“남편이 여자는 365일 가임기라면서 매일매일 관계를 요구하고 있어요.”
“아…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원장님이 그런 말을 믿으실줄은 몰랐네요.”
“네… 정말 의미 없는 관계에… 5분 만에 끝내요. 정말 임신을 강요받는 로봇같아요.”
“아…”
병원장이 원래 지밖에 모르는 새끼다. 항상 병원을 위하는 척하지만, 자기를 빨아주는 사람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새끼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임신을 준비하는 여자가 피임약을 먹고 있을 수가 있지…
“그리고… 그 사람 다른 여자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 어린 여자들을 그렇게 밝히더니 결국 와이프한테 들켰나보네. 지 병원장 만들어 준 조강지처를 버리나?
“네? 설마요… 원장님은 그럴 분 아니신데…”
“태준씨도 알고 있잖아요.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지.”
민아의 말을 듣고 태준은 뜨끔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병원장 취임하고 상대가 180도 변했어요.”
“아…”
태준은 난감했다. 누구 편을 들어 줘야 할지 어려웠다. 이래서 사회생활이 어렵다. 쉽게 한쪽 편을 들었다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저희가 정략결혼 인건 다들 아시죠?”
“아… 네 뭐…”
“원래 병원장이 마지막 목표였어요. 그 이후 목표는 없었어요. 근데…”
민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병원장 자리가 불안해졌는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대면서 임신을 강요하고 있어요.”
“서로 합의된 임신 계획이 아니었어요?”
“네. 서로 나이도 있어서 당연히 그럴 일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병원장 자리를 지키려고 갑자기 변하셨다… 라는 거죠?”
“네. 아기가 있어야 저희 집에서 확실히 인정해주고 병원장에서도 못 내쫓을거로 생각하나 봐요.”
“네?! 그… 정도예요?”
사모의 집안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저 정도 일 줄이야.
이러면 차트의 힘이 더 필요한데 왜 안뜨는거야!!
태준은 민아의 문진표를 받자마자 마법의 차트에 이름을 적었지만, 차트엔 아무런 정도도 뜨지 않았다. 상담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직 두 명밖에 안 써먹었는데… 할당량이 딱 두 명인 거야?!
시발… 그런 거라면 이제 둘 다 지워도 돼. 어차피 지금은 완벽하게 내거잖아. 정보 따위 필요 없다고.
그때, 차트의 변화가 생겼다. 민아의 이름을 적었던 차트가 사라지고 에리 차트가 보였다.
그리고 비고란에 문구가 하나 적혀 있었다.
[차트를 삭제 하시겠습니까?]
뭐야? 진짜 두 명이 한도였던 거야? 병원도 구식이더니만 두 명밖에 저장안 되는 구식 차트네.
차트를 욕했지만 태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민아가 눈치 못 채도록 자연스러운 연기에 들어갔다.
“음… 그럼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임신을 해야하는 상황이지만 원하지않는 복잡한 상황이네요.”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하면서 차트에 집중했다.
[차트를 삭제 하시겠습니까?] 옆에 Yes 라는 문구를 적었다. 그리고 변화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볼펜을 손가락으로 딱딱치며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임신 소견서랑 태준씨가 제 담당의가 되어 주세요.”
민아의 단호한 의지가 들어간 말이었지만, 태준은 듣지 않았다.
모든 신경 집중이 차트에만 꼳혀 있었다. 차트가 정말 사라질지도 궁금했고, 민아의 이름을 빨리 적어 모든 정보를 다 보고 싶었다.
그리고 곧이어 정말로 에리 차트의 정보가 모두 다 사라졌다.
오… 진짜 사라지네.
빠르게 태준은 민아의 이름을 적었다.
[이름 : 안민아]
정보가 뜨길 기다리고 있는데, 민아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태준씨?”
“네?!”
태준은 움찔하며 민아를 바라봤다. 의아한 듯 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그게…”
“제가 오늘 너무 말이 많아죠…?”
“아, 아니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긴 하지만…”
민아는 오히려 미안 해하고 있었다. 자기 무리한 요구 때문에 태준이 난감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아까 뭐라고 하셨죠? 죄송해요.”
“불법적인 일이긴 하지만… 임신했다는 소견과 제 담당의 해주세요.”
“네?! 그건 불법인거 아시잖아요.”
“네… 알죠… 근데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민아의 진지함과 슬픔이 묻어 있는 얼굴에서 얼마나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늙은 원장과 섹스하면서 과거의 일까지 떠오른다면… 그것도 강요적인 섹스라니…
남자도 나이들면 의무방어전을 무서워한다는데 섹스 트라우마가 있는 여자는 오죽하겠는가…
다 가지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인생이었지만 불쌍해 보였다.
오죽 힘들었으면 알만한 사람이 진료 조작까지 부탁할까. 걸리면 나와 사모 둘 다 의사면허는 물론 징역까지 살아야 한다.
개인병원을 차리고 나서 의사면허가 매일매일 위태롭다… 은주 남편한테 걸리는 게 빠를까, 원장한테 걸리는 게 빠를까…
시발 인생 존나 어렵네.
“사모님 아무리 그래도 불법을…”
“근데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태준씨한테 피해 안 가게 제가 잘 처리할게요.”
“네? 그걸 어떻게…”
“제가 각서라도 쓸게요. 이건 제가 원해서 발생한 일이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태준씨는 저의 강압 때문에 해준 거라고요.”
“아… 그래도…”
민아는 필사적이었다. 태준이 난감해했지만, 태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얼마나 부탁할 사람이 없으면 나한테까지 와서 과거의 스토리부터 다 이야기했을까… 거기다가 불법적인 일까지 공모하다니…
그래도 태준의 눈은 차트로 향했다.
에리 차트가 아닌 민아의 차트로 바뀌어있었다. 차트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대놓고 볼 순 없었다.
민아의 따가운 눈빛이 태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럼… 정말 각서 써 주실건가요? 사모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저도 보험은 있어야 하니까…”
“네. 당연하죠. 남편한테 안 들키면 제일 좋긴 하겠지만, 만약 들키더라도… 태준씨는 절대 여기에 연루 안 되게 할게요. 걱정 마세요.”
태준도 차트를 볼 시간을 벌어야 했다. 흰 종이와 볼펜을 민아에게 줬다.
“그럼 여기에 적어주세요. 저도 의사면허와 인생이 걸린 문제라서요… 신중하게 하고 싶어요.”
“네. 이해해요. 뭐라고 적을까요?”
“음… 일단 사모님이 원하시는 조건이랑 사후 조치에 대해 먼저 적어 주세요. 그리고 나중에 같이 조율해 보죠.”
“네. 그편이 좋을 거 같아요.”
민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각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준도 빠르게 차트 내용을 봤다.
[이름: 정민아]
[나이: 44세]
[주소: 서울시 강남구 xxx]
[결혼유무: 기혼. 6년차]
[출산이력: x]
[생리주기: 일정]
[내원목적: 조작된 임신소견서, 담당의 제안]
[성적 특이사항 : 섹스 트라우마, 남편의 섹스 강요로 인한 스트레스, 성욕 미비, 섹스 호기심]
뭐? 섹스 호기심? 트라우마, 스트레스, 성욕까지 적은데 궁금하긴 해? 섹스의 장점에 대해 궁금하다는 건가? 뭐가 이렇게 모순적이고 복잡해.
민아는 열심히 각서를 쓰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와서 제일 표정이 편안 해보이는 순간이었다.
섹스 트라우마만 잘 극복하고 섹스에 빠지기 시작하면 성욕을 높힐 수 있다는 건가?
하… 시발 복잡하네. 차트를 봐도 복잡하고 안 봐도 복잡하고 어려운 여자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차트에 모든 내용이 다 적혀 있었지만, 태준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직 제대로 상담이나 각서 내용도 확인 안 했는데 처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처방법 : 임신 초기증상 진단]
진짜 누가 상담실에 cctv나 도청기 달아놨나? 사모가 원하는 처방법까지 벌써 적어 놨네. 어쩔 수 없이 사모와 한배를 타라는 건가…
그래 뭐 잘못 되더라도 사모가 모르는 척 하겠어? 저렇게 각서까지 쓰고 집안에 돈도 많으니 믿고 가는 수밖에…
“태준씨 다 썼어요. 보시고 추가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뭐든… 다 가능해요.”
“아… 네…”
얼마나 절실하면 저렇게 다 가능하다고 해주는 거야. 진짜 뭐 돈이라도 달라면 주겠다는 거야? 그래도 난 돈보다도 의사면허 지키면서 환자들 따먹고 싶다고…
사모가 병원에 온다고 해서 좋은 사교모임 사모나 젊은 애들 소개해줄 줄 알았더니… 구렁텅이에 빠진 거 같네…
“아 그리고… 제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좀 있어요.”
“네? 어떤…”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동생들이 좀 있거든요. 근데 다들 저처럼 사람들 많은 산부인과를 피하고 싶은 친구들이라… 실력좋고 믿을 만한 의사를 찾고 있었는데 태준씨만 괜찮으시면 소개해 주고 싶어서요.”
“정말요? 완전 vip 분들이시겠네요.”
시발 이게 왠 횡재냐. 엘리트 의사나 인맥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개인 의사를 내가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주고 저한테 해주셨던 것처럼 잘해주시면 다들 만족 할거예요. 산부인과라는 게 워낙 민감하잖아요.”
“네 그렇긴 하죠… 근데 왜 사모님이 직접 안 해주시고…”
“무슨 비밀들이 그렇게 많은지 다들 저한테는 진찰받고 싶지 않데요. 그리고 친한 사이일수록 부끄러운 것도 있어서.”
“하하… 하긴 그렇죠… 저야 소개해주시면 감사하죠. 최선을 다해볼게요.”
“네. 저랑 친구들도 다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럼요. 그리고 이 각서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해도 될까요?”
“네. 뭐든지요. 뭘 추가할까요?”
태준은 굳게 각오한 얼굴로 민아를 바라봤다. 민아는 두근거리며 태준의 요구사항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