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다시 만나 (3)
“온다.”
한세희의 말 한마디와 함께 시작된 이고은의 각성.
우웅--
“흑!?”
의자에 앉은 채로 배를 감싸며 몸을 앞으로 숙인 그녀는 곧 식은땀을 흘리며 완전히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세, 세희야! 이거 괜찮은 거 맞지!?”
“...호들갑이야. 그보다 너도 각성자면서 모르는 거야?”
나의 각성에 대해서는 사실 기억이 없다. 시기상으로 유추하자면 납치 강간 사건에서 극적으로 구출 당하고 병원에서 각성한 것 같은데 그때의 기억이라고는 독한 소독용 알코올 냄새밖에 없으니까.
“하윽...! 시...우님...”
“포, 포션!”
“아직이야! 몸이 재구성되면 엄청 배고플 거야. 그때 포션만 한 게 없으니까 꺼내라고 한 거지. 지금 몸이 아픈 건 상처가 아니야.”
아공간에서 꺼낸 파우치를 뒤집어 탈탈 털어내니 우수수 떨어지는 갖가지 포션들을 재빠르게 받아낸 한세희가 도로 집어넣었다.
“야... 이거 최상급 포션 아니야? 너 이런 것도 가지고 있었어? 거지라고 하더니 무슨...”
“누나아아!! 나 여깄어!”
“시...우님...”
“...아주 지랄들을 해요.”
이고은이 뻗어오는 손을 꽉 붙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주변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마나 알갱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달칵-
“오. 진짜 각성이네. 오랜만이다.”
박아라와 이유라가 함께 들어왔다.
둘 다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 흥분의 잔열이 남아있는 거친 몸짓이었다.
“어떻게 됐어.”
한세희는 시우와 이고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나직이 읊조렸다.
“뭘 어떻게 해. 죽일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살게 해줬지. 그년 방직공 길드 소속이던데.”
“마리에타가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했음.”
“그년은 이제 알 바 아니고. 알잖아.”
휘몰아치는 마나 알갱이의 개수를 세던 이유라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당장이라도 뽑아낼 것처럼 붙잡았다.
박아라는 심란한 듯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일단 백화점 CCTV들의 영상 기록은 전부 삭제하고 저장 장치들도 부숴버렸어. 증거는 없을 거야.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이라 본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기억나는 대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살짝 떠보긴 했는데 다들 모르는 눈치였어.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거던가.”
“분명 본 사람은 있을 거야. 네가 가서 협박하면 봤다고 하겠냐. 보이는 대로 봤을 뿐인 사람들을 어떻게 해버릴 수도 없고...”
“지금이라도 다...”
진득한 살기를 알게 모르게 흘리던 이유라를 한세희가 소리쳐 막아냈다.
“언니! 말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전부... 처리한다고 해도 의심을 사고 파헤쳐질 거야. 관심을 끄는 게 더 위험해.”
한세희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방 안쪽을 바라봤다.
활짝 열려 있는 방문 너머 침대에 누워있는 이고은과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절부절못하는 은발의 엘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병원에서 만났다는 여자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 자신들의 남자친구.
그 남자친구가 비록 일반인을 상대로 휘두른 주먹이라 다소 힘이 빠지긴 했지만, 고위 각성자의 주먹을 잡아내고 자신들의 시야에서 한순간 벗어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때 그의 발끝에서 번졌던 매우 희미한 붉은 빛의 잔상.
“분명 적광이었어.”
“마족의 힘을... 어떻게 시우가...”
박아라는 떨리는 눈동자로 활짝 열린 방안의 시우를 보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우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어. 한쪽은 당연히 엘프겠지만.”
이유라는 씹어뱉듯 그렇게 말하곤 의자를 하나 꺼내 열린 방문 주변에 자리 잡고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로 앉았다.
“소문이 돌겠지...하...”
박아라도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이유라의 반대편에 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자연스럽게 침입자를 경계하고 시우를 보호하기 쉬운 위치를 잡는 둘을 보는 한세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레드 혼혈이란 걸 알아도 배신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좋은 걸까... 돌아서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긴 하네.’
하이 랭커가 셋이나 되지만 부족하다. 적어도 발키리 길드의 모든 여자를...
“으아! 세, 세희야!! 고은 누나가 아프데! 오또케!”
“하아...”
저기 사랑스러운 은발 하프 엘프를 지킬 수 있다면 뭐든 못하리.
그의 애정을 나눠야 받아야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슴 한편이 조금 시리지만 이제는 선택과 이해가 아닌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적어도 시우와 밤을 보낸 여자들은 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하아...하아...아윽!”
“오또케!”
식은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린 그녀의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계속 닦아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각성의 신비... 따위는 지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항상 냉정하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고 그녀의 손에 얽힌 내 손도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렸다.
허공을 떠다니는 마나 알갱이들이 하나둘 이고은의 몸속으로 스며들 때마다 그녀의 몸은 크게 떨렸다.
두둑-
“흐으윽!!”
“으아...”
한세희가 말했던 신체의 재구성이 시작됐다.
피부 속에 가려진 뼈와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선 공포라 보는 내내 눈을 돌리고 싶었다.
“마, 많이 아파?”
나도 모르게 한 질문에 이고은은 눈을 살짝 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미, 미안.”
“하윽! 그냥. 그냥 본 것뿐입니다. 하아... 보고 싶어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낯간지러운 소리도 해대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잠깐 고개를 돌려 방문 밖을 보니 나를 보고 있는 세 명의 여자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시선에 나는 괜찮다는 듯 이고은에게 잡혀있는 손의 반대쪽 손을 흔들어주자 세 명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뚜두둑-- 우득-- 까드득--
“끄으... 아악!!!”
마침내 참고 참았던 이고은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외침과 함께 무수한 마나 알갱이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읏!”
그녀의 몸이 온통 새하얀 빛에 휩싸여 버릴 정도의 강렬한 빛에 팔을 들어 눈 앞을 가리고 있길 한참.
“시우! 포션!”
뒤에서 날아온 외침에 바로 옆에 뒀던 최상급 포션의 마개를 열어 이고은의 입이 있을 위치로 가져다 댔는데.
“에.”
“하아... 하...시우님...”
가지런한 눈썹 아래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과 나른하게 감기는 긴 속눈썹, 날카로운 콧대.
그 아래에 붉게 빛나는 탐스러운 입술과 고른 치열.
분명 이고은의 얼굴이 맞고 한없이 자연스러운데 무척이나 아름다워진 얼굴에 멍때리다가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일단 입에 포션 병을 물려줬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그녀의 들려진 고개 밑에 땀에 젖은 새하얀 목이 출렁거리며 포션을 삼킬 때 나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피부 엄청나게 좋아졌잖아... 핥으면 우유 맛이 날 것 같은...’
이래서 역체감이라고 하는지. 각성하기 전에도 일반인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예쁜 외모였는데 이제는 정말 내 여자친구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결점 없는 외모가 돼버렸다.
조화롭게 이목구비의 위치가 조금씩 이동했다고 해야 하나. 피부에 아주 조금 보이던 다크서클이나 잡티도 전부 사라져버렸다.
포션 병을 무느라 벌어진 입술은 왜 이렇게 붉은지.
한눈파는 사이 포션이 전부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그 와중에 조금 흘린 한줄기의 포션이 그녀의 입가를 따라 내려왔다.
턱 밑을 따라 목까지 타고 흐르는 작은 물방울.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고 인간이 만유인력에 당겨지는 것처럼.
핥~짝
정말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물방울에 혀를 가져다 대고 핥아 올렸다.
“하아악!”
“어, 어라?”
나는 그냥 목을 핥았을 뿐인데.
“헤으읏...♡”
이고은 누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구 망가트리며 마구 들썩이며 가버렸다.
이불이 들춰지고 착 달라붙어 있던 면티에 드러난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그 아래 조금 커진 듯싶은 가슴 정중앙의 젖꼭지는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꿀꺽...”
“야... 방금 각성한 사람은 엄청 예민해. 저, 적당히 해라...”
한세희의 경고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
“정말 감사했습니다.”
차분한 얼굴로 우리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이고은 누나.
“제대로 각성에 성공했나 보네. 자세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실패도 하는 거였어?”
“당연하지. 실패하면... 각성의 기회는 끝이야. 최상급 포션이라 때깔도 곱네.”
불퉁하게 말한 한세희는 이제 관심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시우 님의 최상급 포션은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는 이고은을 보던 이유라와 박아라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씩 축하의 말을 남겼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이고은 누나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
“어? 누나 어디 가려고?”
“...시우님.”
내게 한 걸음 다가온 그녀는 몸을 속여 나와 눈을 맞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시우 님은 발키리 길드에서 활약하고 계시죠.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에서.”
어... 정상이 아닌 여자들이 가득한 곳이고 또 내가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각성하게 된 것도 최상급 포션의 가치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시우 님의 곁에 함께 할 수 있을 만큼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나. 내가 길드장에게 잘 말하면 누나도...”
“그런 식으로는 시우 님의 곁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비각성자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전부 떨쳐버리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을 때.”
쪽-
“...”
“그때 다시 만나요.”
내 볼에 입을 맞춘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