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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미끼 (4)


​ 어떻게 괴물이 내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 “시우! 정신 차리고 빨리 한세희에게 합류해!” ​ 어쩌면 지하 주차장의 일이 일시적인 현상이었는지도. ​ “시우님!” ​ 아니면, 내가 그들과 관련 없는 무언가였다거나? ​ 쾅-!! ​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상황에서 오히려 혼란이 찾아오자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 “야!” ​ “아!” ​ 내 볼을 감싸는 두 손으로 강제로 들어 올려진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한세희의 화난 얼굴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 “뭐하냐고! 정신 똑바로 차려!” ​ 한세희의 등 뒤로 돌진하던 여자가 길드장의 밀어차기에 처맞고 나자빠졌다. ​ “이대론 안 되겠다. 애들아! 길 뚫어!” ​ “비켜! 다 재우게!” ​ 최지윤의 활에 걸린 마나 화살이 천장을 향해 쏘아졌다. ​ 피잉- 펑! ​ 천장에 부딪혀 부서진 화살에서 터져 나온 마나가 머리가 살점으로 뒤덮인 사람들이 기어들어 오고 있던 쪽에서 환한 빛을 냈다. ​ “슬립!” ​ 난전 상황이 되고 살점에 감염된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힘 조절을 해가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 “괴물! 괴물은!” ​ 나는 다급하게 외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 ‘없다.’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고립되면 버티기 힘들어.” ​ 잠에 취해 널브러지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살점들이 떨어져나와 다른 쪽으로 옮겨가며 덩치를 키웠다. ​ [키에에엑!!] ​ [도망치는 건가?] ​ 괴성과 세리안 렐리트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며 사방에서 들려왔다. ​ “멈춰!” ​ 이유라의 품에 안겨 달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며 외쳤다. ​ 덜컥- ​ 한순간의 멈칫하는 움직임 이후에 바로 달려드는 사람들. ​ ‘효과가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통한다고 보기에는...’ ​ 법봉으로 사람들을 쳐내며 길을 뚫는 레베카의 뒤로 길드원들이 대열을 맞춰 달렸다. ​ 어두운 복도를 따라 울리는 괴성과 무수한 발소리가 무척 섬뜩했다. ​ [치직-- 길드장!] ​ 그때 길드장의 통신 장비에서 박아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 “바빠! 지금 지하에 적이...” ​ [지상에도 나타났어! 길드끼리 뭉쳐서 대응 중이야! 4번 출구 쪽 정리해둘 테니까 그쪽으로 와!] ​ 뭐? ​ “젠장...” ​ 누군가의 읆조림이 달려 나가는 가쁜 숨 사이로 섞였다. ​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사실 세리안 렐리트인지 괴물인지 모를 놈이 정화자 직속 부대를 전부 죽인 때부터 이렇게 됐을 일인지도 모른다. ​ “이유라! 수도관!” ​ 한세희의 외침에 나를 안고 있던 이유라가 달려가는 그대로 도약했다. ​ “으앗!” ​ 몸에 걸리는 부하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 ​ 사악- ​ 펑-! ​ 깔끔하게 베어진 수도관에서 터져 나온 물이 빠르게 달려가는 우리 뒤쪽으로 세차게 쏟아졌다. ​ “죽어!” ​ 허공을 날아가던 한세희가 뒤돌아 두손을 뻗었다. ​ 수도관에서 터져나오던 물이 그대로 장벽을 이루고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가 되어 뒤쪽에 따라붙던 감염된 사람들을 밀어냈다. ​ 캬아아악!!! ​ “이쪽으로!” ​ 길드장이 이끄는 대로 꺽어들어 간 우리는 곧 밝은 빛이 들어오는 출구를 발견했다. ​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폭음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 “지금부턴 최대한 빠져나가는 데 집중한다. 다른 길드들은 일단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전부 우리를 쫒아올거야.” ​ 정혜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 안에 담긴 진실은 괴물과 감염된 사람들이 나를 쫒아올거란 얘기였다. ​ 서서히 다가오는 빛 속으로 달려 나가는 길드장의 갈색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 “가자!” ​ *** ​ 꺄아악! ​ 엄마! 엄마아! ​ [시민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각 길드에서 최선을 다하고...] ​ 쾅! ​ 끼에에엑!! ​ 빠르게 달려 나가며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돔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훑어가며 달려드는 살점을 마나를 덧씌운 주먹으로 터트렸다. ​ “청란! 4번 출구!” ​ 청란은 박아라의 외침에 귀 기울이며 간격을 유지하며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 ‘늦습니다. 이러면 늦어요.’ ​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쓰러지고 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의 공포와 비명은 처음 느껴보는 일이다. ​ 시우 님이 지하에 있고 지금도 그쪽으로 달려가며 난동을 부리는 괴물들이 넘쳐난다. ​ 그것도 모르고 일단 막아 세우고 있는 다른 길드는 도움은 될지언정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 더군다나 피부 접촉만으로도 ‘감염’된다니. ​ 힘없는 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며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 가슴속에서 끈적이는 불쾌함과 무력감이 차가운 불길처럼 타올랐다. ​ 속에서 끓어오르던 불길이 마침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자매들과 초원을 달리며 사냥하던 때를 떠올렸다. ​ 생명력이 넘치는 두 다리로 달리며 드넓은 초원을 빠르게 스쳐 가며 눈에 보일 듯 선명한 유대감에서 끝없는 자유로움을 얻었던 그때를. ​ 지금처럼 답답한 상황이 그 위를 뒤덮어가며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쾅-! ​ 한데 묶은 파란 머리를 휘날리며 단 두 번의 도약으로 관중석 중간까지 올라간 다음 그때의 의지를 담아 울었다. ​ “아우우----!!” ​ 청란을 중심으로 번져나간 외침이 돔 스타디움에 메아리치며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 아우우우--- ​ 우우우---- ​ 동족들의 외침이 그 뒤를 따라 함께 울려 퍼졌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서히 고양되는 정신으로 그곳을 바라본다. ​ 무대 한복판에 서 있는 거대한 살점의 탑. ​ 그곳의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얼굴이 하늘을 보며 거무죽죽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저걸 부숴야 해!’ ​ “청란! 길드원들이랑 합류하고 가도 안 늦어!” ​ 박아라는 4번 출구의 주변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더욱 가열차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제압하며 소리쳤다. ​ “크르르-!” ​ 이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중에 혼나더라도 지금은 해야 할 때. 지금은 달려야 해. ​ 걸음마다 휘감기는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두 다리를 감싸고 이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강하게 몰아쳤다. ​ “비켜!” ​ 앞을 막아서는 살점들을 무자비하게 터트리며 계속 달렸다. ​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하나둘 모이는 갯과 수인족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창처럼 목표를 향해 세워졌다. ​ 이젠 4번 출구가 아닌 살점의 탑으로 향하는 늑대 무리를 향해 모이는 감염된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벽을 만들어냈다. ​ “내가 한다!” ​ 가디언 길드에서 함께 하던 동료가 거대한 해머를 뒤로 당기며 마나를 끌어모았다. ​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 한올 한올에서 느껴지는 정교한 마나 강화. ​ 마침내 그것이 극점에서 터지고 살점의 벽과 충돌했다. ​ ----!! ​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과 몸을 휘청이게 할 정도의 충격. ​ 터져나가는 살점 사이의 구멍으로 보이는 목표를 보며 손안에 마나를 모았다. ​ “여기!” ​ 커다란 덩치를 가진 이가 대검을 눕히며 외치고 청란은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타닥- ​ 대검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은 청란이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대검이 뒤로 당겨졌다. ​ “으랴아앗!! 가라!” ​ 한순간 주변이 흐릿해지고 시야에는 오로지 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머리만이 담겼다. ​ 주변을 시끄럽게 하던 비명도 폭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 내려다본 얼굴은 언젠가 봤던 그 초록 머리 엘프의 것이었다. ​ 그러나 초점은 없고 하늘의 너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 고양된 정신이 최고의 집중력을 끌어내며 목표를 제외한 모든 것을 지워냈다. ​ 이미 한계까지 응축한 마나가 손안에서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 요동치다가 어느 순간 한없이 고요하게 뭉쳤다. ​ 우웅- ​ 마나를 다루는 이들이 부르기를 강기라고 하던가. ​ 극한의 기예를 연마해 벽을 부수어 만들어낸 푸른 빛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의 이마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 -----!!! ​ “청란-!” ​ 청란은 귓가에 스치는 시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지만 환한 빛이 모든 걸 감싸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 *** ​ 출구를 통해 나오자 박아라가 빠르게 상황을 전했다. ​ “각 길드가 최대한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어. 출입구는 봉쇄된 상태고 상황을 진정시킬 때까지 밖으로 괴물을 내보내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있어.” ​ “정화자들은.” ​ 길드장이 빠르게 묻자 박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어. 살점에 감염된 사람들이 늘어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어.” ​ 청란이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주변을 훑자 박아라가 한곳을 가리켰다. ​ “뭐야...” ​ 한세희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트렸다. ​ 검붉은 살점으로 이루어진 탑이 무대 위에 높게 치솟아 있었다. ​ 살점의 탑을 중심으로 몰려든 감염된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검은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헤쳐 나가는 무리가 보였다. ​ 어쩐지 내가 나왔는데도 감염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최대한 본체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청란?” ​ “완전 야성에 사로잡혔어. 하울링을 해대더니 동료를 모아서… 아.” ​ 곧 청란이 높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 푸른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로테스크한 거대한 얼굴의 위로 몸을 띄운 그녀에게서 눈부신 푸른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 ‘아름다워...’ ​ 청란은 그 어떤 표정도 없이 반개한 눈으로 거대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돔 스타디움의 조명 아래에서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신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 길드장은 그것을 보더니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한세희를 보며 외쳤다. ​ “폭발이다! 충격에 대비해!” ​ “아, 어! 쉴드!” ​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들고 앞을 막아선 이유라와 길드장이 자세를 잡았다. ​ 내 옆에 붙은 피피와 최지윤까지 마나를 끌어올리며 사방으로 기세를 내뿜었다. ​ 곧 반투명한 보호막이 길드원들을 전부 감쌀 정도로 크게 만들어지고 나는 그 속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청란을 보며 외쳤다. ​ “청란---!!” ​ 콰아아--- ​ 굉음과 함께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의 빛이 돔 스타디움의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 그와 동시에 이유라와 길드장의 검이 교차하며 앞으로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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